## 32화. 그대가 듣고 싶지 않다던 말
“……무사히 넘어간 건가.”
내가 혼자서 중얼거리자, 원웅이 옷을 정리하면서 물었다.
“뭐가요 소주?”
“기몽 장군 말이야.”
나는 팔짱을 끼고서 대답했다.
이틀 전. 나를 아주 의심스럽게 바라보면서 나간 기몽은 다행히 이후로 아무 말이 없다.
하긴. 이 여리여리한 팔뚝을 보고서 ‘내가 저 팔뚝에 졌다니!’ 생각하고 싶진 않겠지.
“어쨌든 이로써 전부 다 무사히 넘어간 거네. 그럼 됐지.”
나는 다시 평범한 생활로 돌아간 거야. 이제 안심해도 될까?
* * *
기몽에게 자객은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볼걸.
이미 날 노렸던 자객이라 소문났으니, 내가 뒷이야기를 물어보아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안심한 것도 몇 시간이 다였다. 저녁이 되자 이 생각이 떠올라 뒤늦게 후회되었다. 어휴, 바보.
하지만 이미 물 건너갔겠지? 지금 내가 기몽을 찾아가거나 기몽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 얘기를 묻잖아? 기몽은 대번에 자신이 품었던 의심을 되살릴 거다.
그 의심은 장작을 넣은 모닥불처럼 활활 타오를 거고, 그는 다시 한번 더 나를 추궁할 거야. 자기 기억이 왜 사라졌냐고.
그런데 원웅은 이불에 대체 뭘 넣었기에 이렇게 좋은 향이 날까? 게다가 따끈하다.
이불이 왜 따끈한지는 안다. 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원웅이 미리 따뜻한 돌을 넣어두어서 그래.
요즘은 원웅이 제일 좋아. 나는 좋은 향이 나는 이불을 끌어안고서 흐뭇하게 침상을 뒹굴었다.
다행히 이러는 사이, 다시 한 번 더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기몽이 무슨 대수냐’ 하는 안이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이제 위험한 순간은 다 지나갔어. 난 다시 궁전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평화로운 천 귀인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라고.
그러나 뿌듯하게 생각하며 눈을 감는 순간. 밖에서 경사방 태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
오늘 내 목표는 연꽃이다. 정확히는 내 목표가 아니라, 내 측근궁녀 둘의 목표이지만.
황제가 간만에 시침을 들라 나를 부르자, 두 사람은 날 인간 연꽃처럼 만들기 위해서 정성을 다해주었다.
머리카락은 하늘하늘하게 꼬아서 말고, 뺨에는 연보라색 연지를 바르고, 머리 여기저기에 하얀 꽃잎을 꽂았다.
진짜 꽃잎은 아니고 천 조각을 오려서 만든 가짜 꽃잎인데, 거기에 몇 개 보석을 꿰매서 덧붙이기까지 했다.
어차피 발가벗고 가는데, 참 열심히도 치장시켜주는구나. 아니, 발가벗고 가니까 머리나마 열심히 치장해주는 건가?
하여튼 간만에 잔뜩 꾸민 채, 나는 이불말이 상태로 황제의 침소로 옮겨졌다.
그러고서 이제는 익숙해진 침상에 누워 황제를 기다리자, 잠시 후 까만 장포 차림의 황제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그 모습을 보다가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황제는 웃으면서 “그래.” 하고 대답했다. 잘 대답해 놓고서 갑자기 가자미눈을 떴지만.
뭐야. 왜 갑자기 생선 눈깔을 하고 그래?
“왜요?”
“넌 짐에게 화가 나지 않았던가?”
“제가요?”
“그래.”
“제가 언제?”
화가 났네. 말 바꾸자.
“화가 풀렸대요? 지금도 화 난 거 맞아요.”
생각해보니 내 마상 격구 실력을 황제가 ‘그 따위’로 내리깐 후, 내가 화를 냈었지.
이후에 큰일이 벌어져서 다 까먹어버렸지만.
서둘러 말을 돌린다고 돌렸는데도 황제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잊어버리고 있었나 보군. 너 잘 까먹는구나.”
“아닌데요. 죄다 기억하고 있었는데요. 전 쉽게 뭘 잊고 그러지 않는데요.”
우겨보지만 황제는 이미 내가 자기에 관해 잊고 있었다 확신한 듯했다.
괜히 발끈하게 되네. 하지만 우기면 내가 더 유치하게 보일 테니 가만히 있자.
그 사이. 황제는 검은 장포 자락을 스르륵 풀어헤쳤다.
옷자락이 내려가는 소리가 나며 그의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씻고 왔나? 피부가 촉촉해 보여.
그 상태로 황제는 태연히 옆에 누웠다.
“계란아.”
그리고는 눕자마자 먹물 같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화난 목소리로 ‘왜요!’라고 대답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평소처럼 대답했다.
“왜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은 황제에게 화가 나지 않아서 그렇다.
그가 내 마상 격구 실력을 ‘그따위’라고 말했을 때. 그때는 화가 났는데. 그 화를 까먹을 때 분노도 같이 사라졌다.
“왜 부르세요, 폐하?”
그래. 화가 나지 않았는데, 일부러 화난 목소리를 낼 필요는 없지.
“계란아. 너 짐에게 고백할 게 없느냐.”
그러나 황제가 질문을 던지는 순간. 난 아직 내가 화를 내야 한단 걸 깨달았다. 지금은 화를 풀 때가 아니야.
“제가 화나 있을 땐 막 가볍게 말 걸고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쉽게 화를 푸는 소심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나는 차갑고 도도하게 말하고서 눈을 감아버렸다.
옆에서 기가 차서 헛웃음을 뱉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래도 눈을 뜨지 않았다.
안다. 화내는 순서가 좀 틀렸지. 나라고 몰라서 뒤늦게 화를 내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순순히 대답하기에는 찔리는 게 너무 많아서…….
나야 존재 자체가 비밀투성이잖아.
이런 처지다보니, 황제가 ‘고백할 게 없냐’고 물어보면 어떤 걸 묻는 건지 몰라서 심장이 막 두근두근하는걸.
그러니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일단 버럭 화를 내는 거다. 다행히 최근에 만났을 때도 난 화를 내고 있었으니.
“계란아.”
그러나 황제는 눈치 없이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게다가 이 황제가 오늘 목소리에 술을 타서 왔나. 왜 이렇게 내 귀를 취하게 하는 소리를 내?
괜히 소름이 돋는다. 오싹해서 고개를 돌리자 어쩐지. 면사로 가린 그의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왜, 왜요?”
그게 좀 부담스러워서 고개를 조금 뒤로 빼며 거듭 묻자, 황제는 다시 한번 더 물었다.
“계란아. 나한테 고백할 게 없느냐?”
이어서 덧붙이는 말.
“있을 텐데?”
“…….”
뭐야. 진짜로 뭔가를 알고서 묻는 건가? 안 그래도 찔리는 게 많은 마음이 더욱 쿵덕쿵덕 두근거린다.
생각해보자. 내가 황제에게 고백해야 할 게 뭐가 있지? 가장 최근 일로는 기몽 사건.
그 전 일로는 황제의 엉덩이를 노리고 있다 선언한 사건.
시초가 되는 사건으로는 내가 천 귀인이 아니란 거……?
“계란아.”
어느 것도 말할 수 없어서, 결국 나는 얼른 말을 돌려버렸다.
“사랑해요.”
“!“
황제는 내게 자기를 사랑하지 말라고 했지. 그래서 말을 돌리기 위해 ‘사랑한다’는 말을 고른 것이다.
황제가 듣기 싫어하는 말이니까. 그는 내 고백을 들으면 불쾌해서 다른 의구심을 접을 테니까.
효과가…… 있나? 내 고백을 들은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옆으로 누워 날 쳐다본 채 그대로 굳어만 있을 뿐.
사실은 면사 때문에 날 쳐다보는지 아닌지도 구별이 안 되긴 하지만. 어쨌든 미동조차 없는 건 확실하다.
“폐하?”
그게 이상해서 슬쩍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네.
“폐하아……?”
대답을 기다리다가 다시 한번 더 불러보았다. 이번에는 목소리를 좀 늘여서.
말끝을 길게 늘여서 부르면 좀 애처롭게 들리는 효과가 있다.
내가 이렇게 부르면, 개원이는 “어쩔 수 없네.”라면서 내 부탁을 들어주곤 했지. 그 부탁이 무엇이든.
그러니 황제도 아니, 여기서 개원이 개자식 얘기가 왜 나왔지? 그놈에 대한 건 떠올리지 말자.
하여튼 이번에도 내 말꼬리 늘이기는 효과가 있었다.
내내 침묵하던 황제가 입을 연 것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고백하라면서요.”
“내가 하란 고백은…….”
“사랑해요.”
거듭 말하면서 눈을 빠르게 깜빡이자, 황제는 주춤 뒤로 얼굴을 뺐다.
“심히 부담스럽구나. 너무 과하게 깜빡이는 게 아니냐.”
“이러면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이러지 마라, 계란아.”
사랑스럽지 않구나? 나도 뭐. 사랑스러우라고 한 건 아니다.
어쨌든 이걸로 됐다. 황제는 이미 내 사랑 고백에 휩쓸려서 내 과거 고백은 까먹은 듯하니.
봐봐. 내게 추궁하길 멈췄잖아? 얌전히 두 손을 배 위에 올리고서 생각에 잠겨 있어.
면사로 얼굴을 덮었지만, 고개가 정면을 향한 채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확실하다.
나는 잠시 황제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약간. 아주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도 같았다. 내 고백이 역병이냐, 싶어서.
의심스러운 걸 추궁하다가도 고백 한마디에 다 까먹어버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나?
잠시 그가 내게 말을 걸어주길 기다리다가, 결국 휙 나도 정면을 보고 누워 눈을 감았다.
* * *
깜빡 잠이 들었나.
다음날, 정신이 가물가물해서 눈을 떠보니 이미 옆자리에는 황제가 없었다.
나는 하품을 하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서 멍하니 있기를 한…… 일다경 정도? 밖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 귀인, 기침하셨는지요?”
“어어. 일어났어.”
소리 높여서 대답하자, 내게 일어났는지 물은 목소리는 이번에는 들어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들어와도 된다고 하자, 문이 열리고서 황제의 태감이 들어왔다.
경사방 태감은 아니고. 황제 뒤를 늘 따라다니는 측근 태감이었다. 사람들이 오 공공이라 부르던데.
“폐하께서, 천 소주가 깨어나면 무사히 처소로 바래다주라 명하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물었다.
“폐하는?”
“조강이 있으시어 먼저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전에 보니까 조강 안 나갈 때도 많더만. 오늘은 착실하게 나갔네.
나는 조금 기운이 빠졌지만, 오 공공은 모른 척 웃으면서 문 뒤에 선 태감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덩치 큰 태감이 다가와 나를 번쩍 들어 올려주었다. 이불말이 상태라 이렇다.
돌아가려면 이렇게 도움을 받아야 해.
그 상태로 처소로 돌아가 보니, 부실한 사립문 울타리 너머까지도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무슨 냄새야?”
침상으로 운반되면서 부성에게 묻자, 부성은 몹시 기뻐하는 얼굴로 자랑했다.
“아침에 폐하께서 보내신 음식들이에요. 모두 어선방에서 만든 것들이래요! 폐하께서 소주께 맛난 걸 많이 먹이라 하셨어요!”
“그래?”
“원웅이 씻는 걸 도와드릴 동안 빨리 데워서 차려둘게요, 소주.”
날 침상에 내려놓은 태감은 꾸벅 인사를 하고서 나갔다.
하지만 태감이 나가고서도 나는 한동안 계란말이 상태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황제가 갑자기 어선방 음식은 왜 보냈을까? 내 고백을 모른 척하고 나니 조금 미안해졌나? 그래서 밥이라도 먹이려는 건가?
대답을 찾기 전, 원웅이 얼른 들어와 날 돌돌 감싼 이불을 풀어주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소주가 정말로 좋으신가 봐요.”
“글쎄.”
“소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냥 좀.”
본인 말로는 날 좋아한다지만. 정말로 날 좋아한다면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말문이 막히진 않았을 걸.
사랑을 고백하면서 자기는 짝사랑만 할 거라 선언하지도 않았을 거고.
어제 날 무시해 놓고서는 아침에 나만 달랑 두고 가버리지도 않았을 거야.
“폐하는 날 사랑하진 않는 거 같아.”
“소주!”
원웅이 놀라서 자기 입 앞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그래, 여긴 방음이 잘 안 되지. 밖에서도 목소리가 들리니 조심해야지.
“하지만 정말이야.”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서 소곤소곤 다시 말했다. 원웅은 슬픈 눈을 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폐하께서는 소주에게만 모든 걸 특별하게 하시는데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잖아.”
“…….”
하긴. 나도 황제를 사랑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이긴 하지. 그러면 된 건가?
* * *
원웅의 도움을 받아서 깨끗하게 씻은 후. 나는 이번에는 깔끔한 녹색 옷을 차려 입었다.
머리는 거추장스러운 게 싫으니 하나로 묶어 달라 하고, 그 상태로 황제가 미리 보내두었다는 식사를 했다.
밥은 맛있네.
그렇게 궁녀들과 음식을 잘 나누어 먹고 배가 부르자 아까보다는 기분이 나아졌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렇다. 황제도 날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나도 그냥 말 돌리기 용으로 고백을 한 건데.
내가 뭐하러 신경을 써?
이게 다 내 자존심이 높아서 그렇다. 내 높은 자존심이 가짜 고백까지도 신경쓰게 만드는 거야.
다행히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고, 점심 무렵이 되었을 때는 내 비밀 훈련 장소에 가서 무공 훈련을 할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막 나서려고 할 때. 뜻밖의 사람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기몽 장군이 아니었다.
“환완아?”
“네. 의전방에 소속된 의전 관리 중 하나래요.”
그렇게 설명해도 누군지 모르겠어. 어쨌든 그런 사람이 있다 치고.
“그 사람이 누군데 날 찾아와?”
의전 관리……라면 뭐 황궁에서 축제라도 열리나? 일단 거부할 만한 권력이 없기에 순순히 들여보냈다.
들어온 사람은 염소 같은 인상이었다. 나를 보자 꾸벅 인사를 하는데, 참으로 간교하고 계획적으로 보였다.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지만.
“절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마마.”
하지만 환완아가 날 보자마자 하는 말에, 나는 최소한 이 사람은 첫인상으로 판단해도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뜬금없이 황후 마마라고? 빈이나 비도 아닌 귀인한테? 내가 가자미눈을 하고 쳐다보자, 환완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자기 입가를 두드렸다.
“이런. 아직은 천 귀인이시지요. 제가 너무 앞서 말을 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