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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31화 (31/283)

##  31화. 천 귀인은 운이 좋은가?

“25호가 임무에 실패하고 붙잡혔다고?”

부하가 한 뜻밖의 보고에 비원이 눈썹을 치켜뜨고 물었다.

“누구에게?”

염 귀인에게 흑합과 천 귀인을 향한 복수를 약속한 후. 비원은 흑합 장군과 천 귀인에게 각각 부하를 보냈다.

비원은 흑합 장군에게 부하를 보내면서 성공 확률을 반반으로 잡았다.

흑합 장군은 뛰어난 무위로 유명했으니, 일단 못 먹을 수도 있는 감을 찔러본단 식이었다.

물론 이를 염두에 두고 더 실력이 뛰어난 부하를 보냈지만, 그렇더라도 천 귀인에게 보낸 25호 역시 절대로 약하지 않았다.

비원은 천 귀인에게 간 부하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고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까고 보니, 천 귀인에게 보낸 자객이 붙잡혔다고? 죽은 것도 아니라 잡혔어?

원래 생포가 죽여서 잡는 것보다 어려운 법 아닌가.

“황제가 천 귀인에게 고수를 호위로 붙인 건가?”

“그렇기도 하지만 이번은 그 고수가 나선 게 아닙니다.”

“그럼?”

“마침 지나가던 기몽 장군이 습격 장면을 목격하고 구해주었다 합니다.”

“기몽 장군이?”

“왜, 군왕 전하 암살 사건의 수사를 맡은 그자 말입니다.”

비원은 차갑게 감탄했다.

“그자의 실력이 대단하군. 천 귀인은 운이 좋아.”

* * *

그러나 막상 비원이 감탄하는 기몽은 지금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내가 잡았다고?’

사라진 기억 때문에.

기몽 장군이 기억나는 건, 야밤에 혼자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천 귀인뿐.

뒤에 뭘 숨겼냐고 물어보았더니, 뭔지 확인하라며 옆으로 물러섰지. 거기서 기억이 끊어져 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갑자기 자신은 자객을 잡은 영웅이 되어 있었다. 자객을 잡기는커녕 구경도 하지 못했는데.

“왜 그러십니까, 장군님? 대단한 공을 세우셨는데,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공. 공이라.”

“감히 황궁을 습격한 자객을 잡았는데, 대단한 공이지요. 이대로라면 흑합 장군도 곧 따라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따라잡다니? 내가 그자보다 뒤처진단 뜻이냐?”

“예? 아니,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닙니다!”

괜히 부하에게 신경질을 낸 기몽 장군은 팔짱을 끼고서 심각한 표정으로 책상 위 보고서를 노려보았다.

보고서에는 자객을 심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자객은, 천 귀인이 황제의 총애를 얻는 게 보기 싫었던 사람에게서 명령을 받고 잠입했다고 했다.

죽일 생각은 아니고, 그냥 잡아다가 겁을 줄 생각이었다고.

기몽 장군은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러나 기몽 장군은 붙잡힌 자객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죽일 생각이 아니었단 것도, 명령을 내린 사람에 대한 것도. 체포되어서 제일 처음 한 말은 가짜 진실이 확률이 높으니까.

“…….”

하지만 자객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보다, 지금은 천 귀인에게 더 신경이 쓰인다. 자객보다 천 귀인이 더 수상해 보이고.

“장군?”

기몽 장군이 허공만 쳐다보자, 그게 이상하게 보인 부하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한참 후. 기몽 장군은 책상에서 일어섰다.

“잠시 나갔다 오지.”

* * *

심장이 두근두근하다.

물론 내 뒤처리는 완벽했지만, 혹시라도 기몽이나…… 하여튼 누구라도 수상한 점을 발견하고서 날 찾아올까 두려웠다.

일부러 청적에도 가지 않았다. 몸이 안 좋단 핑계를 대고서.

“이거 시금치죽이에요, 소주. 이걸 드셔 보세요.”

“오늘은 소화되기 쉬운 음식으로만 드세요, 소주.”

다행히 며칠 전 쓰러졌던 덕에 아무도 내 꾀병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미안해, 원웅. 미안해, 부성. 일부러 걱정 끼치는 건 아니야.

그렇게 온종일 내 침실에서 뒹굴뒹굴하면서 하루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그날 저녁.

정확히는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은 저녁 직전. 결국, 사달이 벌어졌다.

해가 막 저물어가고 관리들이 퇴청하는 그 시각. 기몽이 내 처소로 온 것이다.

“아니, 그 장군은 왜 자꾸 소주를 찾아온대요?”

원웅이 씩씩거리자, 웬일로 부성이 말렸다.

“그래도 소주를 습격하려던 자객을 잡아주셨잖아.”

“하긴. 그건 그래.”

‘그건 그래’는 무슨. 아니야.

게다가 분명 난 기몽과 자객 둘만 놔두고 갔는데.

기몽이 날 습격하려던 자객을 잡았다는 이야기는 대체 어쩌다가 나온 건지 모르겠네.

젠장, 그보다 어쩌지?

“안 나가보세요, 소주?”

평소에는 툴툴대면서도 기몽이 오면 바로 나가던 내가, 오늘은 침상에 앉아 발만 구르자 이상했는지 부성이 물었다.

“소주? 왜 그러세요?”

왜 그러냐고 대답도 할 수가 없어서 갑갑하구만.

“지금 내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만나기 힘들다고 해봐.”

나는 일단 아까부터 밀고 있던 꾀병을 계속 밀었다.

힘없이 대답하고서 침상 등받이에 몸을 기대 눈을 감았다가 슬쩍 실눈을 뜨자, 원웅이 내 말에 따르기 위해 나가고 있었다.

부성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와 문을 번갈아 보고 있고. 내가 안 나갔다가 경을 치를까 봐 걱정하는 얼굴이다.

둘 다 천 귀인에게 참 잘하는 측근 궁녀들이지만, 확실히.

이런 걸 보면 원웅 쪽이 좀 더 뭐랄까. ‘천소여’ 자체에 애정이 있는 것 같아.

부성은 좀 더 현실적으로 보여. 그렇다고 부성을 나쁜 사람이라 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상사로서는 원웅이 더 마음에 들 수밖에 없네. 둘이 능력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니.

“소주. 소주.”

그러나 밖으로 나간 원웅조차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들어왔다.

“기몽 장군님이, 걱정되어서 그냥 갈 수가 없다고 괜찮은지 잠깐 보고 가시겠다는데요. 들어와도 되냐고 물으세요.”

“……원웅아.”

“네, 소주.”

“기몽 개새끼라고 한번 말해줘.”

“기몽 개새끼…… 아이고머니나! 제가 기몽 개새끼란 말을 감히 어떻게 하겠어요, 소주. 전 기몽 개새끼 같은 말은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려요.”

세 번이나 말해주다니. 역시 원웅 최고.

엄지를 치켜들자, 원웅은 눈을 찡긋하고서 엄지를 같이 치켜들었다.

부성이 이럴 때가 아니란 얼굴로 채근했다.

“소주, 기몽 장군에게 들어오라 할까요?”

“응.”

어쩔 수 없지. 이렇게까지 하는데 돌려보내면 더 이상해 보이겠지.

결국,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하긴. 뭐가 어떻게 됐길래 갑자기 기몽이 날 구한 게 됐는지, 나도 좀 알자.

잠시 후. 문이 드르륵 열리고 기몽이 안으로 들어왔다.

* * *

“혹시 제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기몽이 한 말은 이거였다. 나는 힘없이 침대에 늘어져 있다가 순간 베개를 던질 뻔했다.

역시 기억이 남아 있는 건가? 머리를 몇 번 두드리면 기억이 사라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하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베개는 그대로 두고, 일단 모른 척 물었다.

“몸이 안 좋은 사람에게 오자마자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니.”

화난 척 덧붙이기도 해보고.

“이런. 실례했습니다.”

내 말을 들은 기몽은 얼른 사과부터 했다. 그래 봐야 사과 뒤에는 다시 같은 질문이지만.

“그런데 제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역시 베개를 던질까. 머리를 상하좌우로 탕탕탕 두드려주면 기억을 조작할 수 있을지도…….

“제 머리를 내려치셨습니까?”

“아니요.”

아직.

“그런 것치곤 너무 제 머리만 집중적으로 쳐다보시는데.”

“정말 아니에요.”

아직.

내 말이 하나도 믿기 어려운가. 기몽 장군이 눈을 가느다랗게 뜬다.

근데 저 남자, 이 와중에 눈화장은 정말 착실하게 했구나.

궁궐에서 만난 모든 사람, 남자 여자 통틀어서 저 사람이 눈화장을 제일 정성스럽게 해. 직접 하나?

“이번엔 또 제 눈만 보시는군요.”

이런. 기몽이 나를 더욱 의심쩍게 보잖아.

한숨을 내쉬고서 아예 시선을 돌렸다. 이러면 되겠냐? 이러면?

“어제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제 기억이 사라진 겁니까? 왜 제가 귀인을 공격한 자객을 잡은 사람이 되어 있고요?”

기몽은 또다시 거듭 물었다. 그런데 듣고 있자니 이상하네. 무슨 소리야?

“날 공격한 자객을 잡았단 이야기는 장군이 한 거 아닌가요?”

“제가요?”

“난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 입으로 말하진 않았으니, 당연히 당사자인 기몽이 주장했을 거라 여겼지.

그러나 기몽의 표정을 보니 아닌가 보다. 그 역시 처음 듣는단 소리다.

“전 천 귀인이 자객에게 습격당했단 것도 몰랐습니다. 뭔가를 감추고 있다고만 생각했을 뿐.”

뭐라고? 그럼 정말로 자기 기억이 사라진 게 이상해서 날 찾아온 거야? 그러면 그 이야기는 누가 퍼트린 소문이야?

설마…… 다른 목격자가 있었나?

머리를 팽팽 굴리느라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기몽이 의심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또.

“혹시 천 귀인께서 자객을 쓰러트린 다음, 저 역시 쓰러트린 건 아니십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질문이 좀 더 정확하고 구체적이었다. 나는 정곡을 찔린 데 놀라서 그에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내가 발뺌하자, 기몽은 딱딱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맞춰보면 그렇게밖에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천 귀인께서 무언가를 감추고 있던 것도, 제가 자객을 잡았단 소문이 난 것도, 제가 중간에 기억을 잃은 것까지도 말이 되니까요.”

빼어난 수사관만큼 범인을 짜증 나게 하는 건 없는 법이다. 어떻게 저렇게 쏙쏙 잘 알아맞히지?

하지만 인정할 수는 없는지라, 나는 얼른 소매를 걷어붙였다.

“뭐 하시는 겁니까?”

기몽이 의아해서 바라보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였다.

“이거 봐요.”

그리고서 기몽에게 내 팔을 보여주자, 그는 황급히 몸을 돌리며 날 질책했다.

“어, 어찌 이러시는 겁니까.”

이 와중에 귀는 왜 빨개진 거야? 누가 보면 내가 팔이 아니라 다른 부위를 보여준 줄 알겠네.

“아 좀 보라고요.”

거듭 재촉하자 기몽은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나는 그의 앞에 대고 내 팔을 흔들어 보여주었다.

“보여요? 이 여리여리한 팔목?”

아직 내공과 체력 위주로 훈련하는 중이라 ‘천 귀인’은 팔이 여리여리하지.

근육조차 제대로 안 붙어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근육은 무림인 기준 근육이다.

사람이니 기본적인 근육은 당연히 있겠지.

하지만 기몽은 무인이니, 이 팔을 보면 내가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건지 알아차릴 거다.

역시나. 기몽은 내 팔을 빠르게 보더니 인상은 찌푸렸으나 고개는 끄덕였다.

“그렇군요.”

“난 이렇다 할 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 내공도 없어요. 곱게 큰 귀족이라고. 그런데 내가 자객을 잡고 기몽 장군까지 잡았다고요?”

나는 손을 가리고 일부러 과도하게 까르르 웃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기몽 장군은 장군직 때려치워야겠네요.”

기몽 장군은 발끈했으나 반박하진 못했다.

“알았으니 소매는 도로 내리시지요.”

* * *

기몽 장군이 나간 사이.

염 귀인은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일이 꼬이고 꼬여서 몇 가지 오해가 있었지만, 그걸 모르는 염 귀인으로서는 갑갑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만에 흑합을 떠올린 염 귀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무사할까?

‘물론 수상한 그 물건들을 모두 파냈으니 무사하겠지.’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염 귀인은 당연히 기몽이라 생각했으나,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기몽이 아니었다.

“그쪽-!”

염 귀인과 거래를 한 그 수상쩍은 사람. 비원이었다.

염 귀인은 놀라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자의 말을 따랐다가 천 귀인이 거의 죽을 뻔했다. 그만큼 위험한 인물이었다. 긴장할 수밖에.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염 귀인이 묻자 비원은 대답 대신 물었다.

“묻기로 한 건 묻으셨습니까?”

염 귀인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묻었으니 천 귀인이 쓰러졌고, 천 귀인이 쓰러졌으니 내가 여기에 잡혀 왔겠지.”

그 순간. 비원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염 귀인은 어리둥절해졌다. 천 귀인을 쓰러뜨리기 위해 묻으라고 한 거 아닌가?

잠시 조용해졌다. 기다려도 비원이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이번에는 염 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의뢰는 취소하겠어. 난 흑합과 천 귀인에게 복수를 하고 싶던 거지, 둘을 죽이려던 게 아니야.”

“그러면 머리카락은 어디에 있습니까?”

“몰라. 여기 잡힐 때 뺏겼으니까.”

비원이 기막히다는 듯 웃었다.

“머리카락은 뺏기고. 본인은 잡히고. 그런데 의뢰는 취소하겠다?”

그 태도에 들어 있는 비웃음에, 염 귀인은 긴장해서 물었다.

“취소할 수 없단 거야?”

비원이 빙그레 웃었다.

“이미 일을 진행했는데. 지금 취소하면 되겠습니까?”

“원하지 않아. 홧김에 부탁한 거고. 지금은 흑합이건 천 귀인이건, 복수하고 싶지 않아.”

사실 복수는 여전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자에게 복수를 맡겼다가는 그 크기가 생각 이상으로 커질 터. 그러니 이렇게 둘러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원은 쌀쌀맞게 대꾸했다.

“당연히 거래는 더 진행하지 않을 겁니다. 그쪽은 요구 조건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으니까요. 심지어 물건까지 빼앗겼고.”

“잘됐네.”

갑자기 비원의 목소리가 확 낮아지면서 방 안이 스산해졌다.

“하지만 수고비는 받아가야겠습니다. 그쪽의 변심 탓에 제 부하와 물건이 사라졌으니, 그 대가는 직접 치르시길.”

* * *

이후 밖으로 나온 비원은 어둠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갔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자신이 몸을 감춘 어둠보다 어두웠다.

‘천년비의 영혼을 불러들이는 머리카락을 묻게 했는데, 천 귀인이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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