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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9화 (29/283)

##  29화. 괜찮아 난 당당하니까

내가 당당하게 걸어가 말 위에 훌쩍 올라타자, 사자 친왕은 의외란 투로 감탄했다.

“자세가 좋군요?”

당연하지. 여기서 나보다 말을 잘 타는 사람은 없을 거다.

천라지망을 피하기 위해 말 위해서 밥 먹어본 사람만이 나와 겸상할 수 있다.

하지만 구구절절 내 기마 실력을 뽐내는 대신, 나는 고독한 늑대처럼 웃고서 채를 멋지게 돌렸다.

“그럼 경기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 * *

“천 귀인이 격구를 잘하나 봅니다?”

기몽 장군의 부관이 옆에서 물었다. 천 귀인이 대가리 어쩌구 하는 걸 똑똑히 들은 부관이었다. 기몽 장군은 미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글쎄. 나도 본 적이 없으니 모르지.”

“아주 위풍당당하던데요.”

그러자 다른 부관이 낄낄 웃으며 끼어들었다.

“기세등등한 거지. 폐하의 총애를 한몸에 받잖는가.”

“하지만 말에 올라타는 자세도 그렇고, 제법 실력이 있을 수도 있겠는데?”

“타는 자세가 좋다고 격구를 잘하는 건 아니지. 특히 마상 격구는.”

기몽 장군은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천 귀인의 솜씨를 기대하는 건 부관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밑의 일반 병사들도 다들 장구채와 북채를 쥐고서 한 방향, 천 귀인이 있는 방향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최근 들어 천 귀인만큼 화제를 몰고 다닌 후궁이 없다 보니, 다들 궁금해하는 듯했다.

게다가 천 귀인은 수사청에 몇 번이나 왔지만 올 때마다 황제가 빼간 전적도 있지 않던가. 아까 출전하기 전 내뱉은 의미심장한 말도 그렇고.

“장군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천 귀인이 격구를 잘할 것 같습니까?”

“보면 알겠지.”

말을 하는 사이, 마침내 경기가 시작되었다. 부관은 얼른 천 귀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다들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손은 열심히 장구며 북을 두드리는데, 시선은 다들 천 귀인에게만 향할 정도로.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실망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아깝네요.”

후궁들이 천 귀인과는 제대로 맞붙지도 않으려 한 탓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데다 얼마 전에 쓰러진 전적이 있는 후궁.

실수로 다치게 했다가는 황제에게 밉보일 게 분명하니, 후궁들로서는 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기몽 장군의 옆에서 부관이 웃음을 터트렸다.

“천 귀인은 격구를 잘 못 하나 보군요.”

“공은 저쪽에 있는데 엉뚱한 방향으로만 맴돌다니.”

딱히 다른 후궁들이 안 막더라도, 천 귀인은 격구를 못 했다.

다른 후궁들은 공을 쫓거나 막거나 열심히 하는데, 천 귀인이 탄 말은 홀로 엉뚱한 방향을 맴돌 정도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후궁들이 천 귀인을 피하는 건지 천 귀인이 공을 피하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긴. 픽픽 쓰러질 정도면 몸이 튼튼하진 않겠지요.”

“그래도 당당하게 나가기에 비장의 한 수가 있으려니 했는데.”

기몽 장군의 양옆에서 부관 둘은 내내 대화를 나누었다. 한껏 기대했다가 크게 실망했는지 아쉬워하는 투로.

그러나 기몽 장군은 말없이 경기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천 귀인에게 실망하느라 잠시 경기 흐름을 놓쳤던 부관이 “오오!” 하는 소리를 냈다.

공이 황제와 사자 친왕 사이로 흘러가자, 황제와 사자 친왕이 그 공을 치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반대 방향에서 말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걸 본 병사들은 미친 듯이 북을 두드리면서 환호했다.

반면 궁의들은 혹시라도 황제와 친왕이 동시에 다칠까 봐 발을 동동 굴렀다.

기몽 장군은 눈썹을 치켜떴다.

꽤 위험한 거리. 자칫 잘못하면 정말로 누군가는 크게 다칠 거리다.

그러나 둘 다 여전히 말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심지어 두 사람은 아직 공을 노리는지 채까지 들어 올렸다.

그렇게 채와 채가 속도를 타고 맞부딪치려는 바로 절체절명의 순간.

“내 것이다!”

어디선가 천 귀인이 나타나더니 공을 휙 가져갔다.

“…….”

병사들은 환호하다가 우뚝 멈췄다.

방금 뭐였지?

고래와 고래가 싸우고 있는데, 어디서 물개 하나가 사이로 ‘핑’ 나타나 지나간 느낌이었다.

한 박자 늦게야 다들 뜨악해서 북 치기, 장구 치기를 멈추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건가?

천 귀인은 혼자 외진 곳을 맴돌지 않았나? 왜 갑자기?

아니, 그보다. 공을 가로채도 하필 황제와 친왕이 노리는 공을 가로채다니.

윗사람이라고 봐주지 않고 경기를 하는 것도 어느 정도이지. 이건 무슨 눈치를 팔아먹는 수준 아닌가.

‘저 여자가?’

기몽 장군도 황당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이. 천 귀인은 모두가 놀란 틈을 타서 황제 쪽 득점 문으로 빠르게 돌진하고 있었다.

아까 맹하게 경기장 주위를 기웃댈 때와는 전혀 다른 속도였다.

사자 친왕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천 귀인 쪽으로 말을 돌리며 외쳤다.

“천 귀인! 이쪽으로!”

사자 친왕과 비슷하게 이성을 차린 황제도 천 귀인의 뒤로 미친 듯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게다가 천 귀인의 앞에는 길을 막고 선 후궁이 둘.

반면 사자 친왕의 앞으로는 아무도 없다.

여기서 천 귀인이 사자 친왕에게 공을 넘기면 사자 친왕이 득점하기 딱 좋은 위치였다.

“천 귀인!”

그러나 천 귀인은 사자 친왕의 부름을 무시하고 달렸다.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지켜보던 부하들이 더욱 뜨악해 입을 벌렸다.

“폐하를 무시하고 있어.”

“전하도 무시하고 있어.”

“점수엔 관심 없다더니…….”

이 경기장에서 점수에 목숨을 건 사람은 누가 봐도 천 귀인 혼자였다.

그 틈에 황제는 천 귀인의 바로 뒤까지 추격해 채를 치켜들었다.

아슬아슬하게 공을 뺏어갈 뻔한 그 순간.

“천 귀인! 이쪽!”

사자 친왕이 말머리를 옆으로 돌리며 다시 외쳤다. 이제 마지막 득점 기회였다.

“점수는!”

“?”

“내 것이다!”

그러나 천 귀인은 천둥처럼 외쳤고, 그 소리에 사자 친왕이 탄 말이 놀라서 비틀했다.

‘협동심이 전혀 없어…….’

부하들은 다들 북채를 내려놓고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 순간. 천 귀인이 채로 공을 딱 내리쳤다.

황제가 공을 뺏으려 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천 귀인의 채가 먼저 공을 쳤다.

엄청난 속도로 나아간 공은 ‘팡’ 소리를 내며 득점 문을 뚫고 나갔다.

다들 멍해져서 뜯긴 득점 문을 바라보았다.

선수로 뛴 후궁들도, 황제와 사자 친왕도, 응원하던 병사들도, 심지어 기몽 장군조차 넋을 놓고 천 귀인을 바라보았다.

“후.”

이 와중에 천 귀인은 혼자 뿌듯한 표정으로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좋은 전투였다.”

사람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천 귀인…… 눈치 없구나.’

* * *

마상 격구가 끝나자 사람들이 날 보는 눈빛이 변했다. 다들 입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 벌리고 눈은 동태처럼 뜨고 날 쳐다본다.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 거지. 세상에, 천 귀인은 대단하구나! 겉은 우울해 보이지만 속은 아주 정열적이었어!

그들의 감탄이 귓가에 들리는 듯해서, 나는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천년비의 몸일 때는 내가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남겨도 다들 날 인정하지 않았지.

하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니 다들 순수하게 감탄하는구나.

어떤 의미로는 조금 감동이었다.

“이야. 기가 막힌데.”

심지어 사자 친왕조차 저렇게 말해주어서, 나는 황제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 * *

격렬한 운동을 한 후 따뜻한 물에 목욕하면 기분이 좋다. 그 물에서 좋은 향기가 나면 더욱 좋다.

게다가 목욕을 끝내고 나오자 원웅은 내게 시원한 꿀물도 주었다.

“고마워.”

“아니요, 소주. 고생 많으셨어요.”

“나 멋있었지?”

“암요. 우리 소주가 최고예요. 세상은 누가 뭐래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럼!”

꿀물을 마신 후 침실로 들어가 침상에 눕자 잠이 쏟아졌다. 아직 천소여의 몸은 체력이 약해서 그럴까?

하지만 기분 좋은 수마였다. 굳이 저항하는 대신 나는 가물가물 밀려오는 졸음에 편하게 몸을 맡겼다.

그리고 실제로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창밖이 붉었다.

저녁? 한 시진은 잔 모양인데? 상체를 일으키고서 눈을 비비자, 얄팍한 벽 너머로 밖에서 주고받는 대화가 다 들려왔다.

황제가 보낸 태감이 왔구나. 황제가 저녁 식사를 나와 함께하고 싶어 한단다. 내 격구 하는 모습을 보고 새삼 반했나 보지.

침상에서 일어서자 마침 문을 열고 부성이 들어오며 외쳤다.

“소주, 일어나셨네요! 깨우기 죄송했는데.”

“응.”

저 벽이 방음이 안 되더라고.

“잘 됐어요. 빨리 꾸며 드릴게요.”

“이대로 가면 안 돼?”

“절대 안 되죠!”

곧 원웅까지 달라붙어서 내 머리카락을 좌우로 두 가닥만 땋은 후 그걸 돌돌 말아 올려주었다.

황제가 이미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지 최대한 간단한 치장이었다.

대신 거기에 하얀 장신구를 달고 옷도 하얀색으로 입어서, 거울을 보니 평소보다 좀 더 단아한 인상으로 보였다.

그러고서 밖으로 나가자, 태감은 황제가 기다리는 정자로 나를 안내해주었다.

심궁과 동쪽 구역 사이에 있는, 작은 호수에 반쯤 걸쳐서 지은 정자로. 예쁘네. 운치 있고.

황제는 거기에 먼저 와 있었는데, 분위기를 엄청나게 잡고서 난간에 기대어 호숫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수묵화…… 수묵화?

저러고 있으니 떡돌이와 느낌이 좀 비슷한 것 같기도? 떡돌이도 가만히 있으면 수묵화처럼 보이는데.

“계란아.”

고개를 기웃하고 있자니, 황제가 고개를 돌리며 나를 불렀다.

그러자 수묵화 같던 인상이 싹 사라지면서, 그냥 평소의 황제가 되었다.

사실 황제는 얼굴을 가렸으니 인상이고 뭐고 보이지도 않지만.

* * *

잠시 뒤. 우리는 상을 마주하고 앉아 식사를 했다.

“웬일로 식사를 하자 부르십니까?”

나는 한가득 차려진 상을 보며 감탄해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황제가 준비해 놓은 상은 내가 평소에 먹는 소박한 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교자상이었다.

떡, 만두, 탕은 기본이고 기본 반찬만 서른여섯 가지에 주요리만 아홉 개다.

얘는 맨날 이런 걸 먹나? 그래서 피부가 저리 좋은가?

“오늘 많이 뛰지 않았느냐.”

“암요.”

“짐은 너처럼 열정적으로 격구 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헤헤. 감사합니다.”

“칭찬하는 게 아닌데.”

“그럼 질투하는 건가요? 제 실력을? 아. 하긴. 폐하는 제 공을 노렸지만 뺏지 못하셨죠?”

“…….”

“진짜 질투예요?”

“생각 중이다. 이 미묘한 감정이 둘 중 어느 쪽에 그나마 더 가까울지.”

날 사랑하는 마음과 내 실력을 부러워하는 마음. 둘 사이에서 갈등한단 건가?

어쨌든 내 일은 아니기에 젓가락을 들어서 앞에 놓인 조기구이 살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

와. 입안에서 사르르 녹잖아? 예전에 어촌에 갔을 때, 시장에서 사서 혼자 불에 구워 먹은 그 맛과는 차원이 다르다.

당시에 나는 한 마리 사 온 조기를 거의 다 태워 먹는 바람에, 울면서 까만 부분까지 다 먹었지.

그러나 여기서 나온 조기는 태우지 않았는데도 바삭하고 비린내가 없다.

“격구는 어디서 배운 게냐?”

“독학으로요.”

내 궁녀들한테 규칙에 관해 물어보고 외웠지. 근데 황제는 밥 안 먹나? 왜 내 얼굴만 보고 있지?

……설마 날 사랑하는 마음이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는 경지에 벌써 오르진 않았을 텐데.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행이로다.”

“왜요?”

“사랑하는 우리 천 귀인을 혼낼 수는 없으니, 네게 격구를 그따위로 가르친 사람을 혼낼 생각이었거든.”

“……그따위요?”

순간. 맛있던 조기 맛이 뚝 떨어졌다. 자세히 보니 좀 탄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는 웃으면서 젓가락을 들었지만,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서 그에게 항의했다.

“제 실력을 지금 그따위라 폄하하신 겁니까?”

* * *

다음날. 하루해가 지났지만, 황제가 한 말은 여전히 가슴에 남아 분노의 장작이 되었다.

나는 그 장작을 빼버리기 위해 청적으로 달려가서, 씩씩거리면서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했다. 나쁜 황제! 나쁜 황제!

그러고 있자니 떡돌이가 나타나 떡을 건네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화난 얼굴이야?”

그러고는 자기도 떡을 한 입 크게 베어 물고서 오물오물 씹으며 날 보는데…… 오래간만에 만났는데도 아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우리가 어제 보기라도 한 양.

그 분위기가 나에게도 전해져서, 나는 오랜만이라고 좋아하는 대신 떡을 움켜쥐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황제 새끼, 아주 얄미워 죽겠어!”

“!”

이런. 갑자기 떡돌이가 얼굴이 벌게져서 콜록거린다. 가루가 목에 걸린 건가.

등을 두드려주자 그는 가까스로 진정해서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방금 뭐라고?”

내가 실수했다. 떡돌이는 황제의 내시이니 그의 앞에선 말을 조심해야 했는데.

나는 내 입을 찰싹찰싹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떡돌이도 자기 가슴을 제 주먹으로 두드리며 다시 물었다.

“왜 그래?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있어. 날 화나게 만든 일이 있지.”

“그게 뭔데?”

“자세히는 알려줄 수 없어. 하지만 두고 봐. 내가 폐하의 엉덩이를 노리고 있으니.”

“!”

그 거만한 엉덩이, 언젠가 기회를 잡아서 걷어차고 말 테다.

그런데 떡돌이 쟤는 왜 또 사레에 걸렸어? 식도가 약한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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