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8화 (28/283)

##  28화. 화살은 어디를 향하나

의식을 차리자마자 벌떡 일어서려 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내 손을 잡고 있어서 그렇다.

고개를 돌리자 얼굴을 가린 면사가 보인다. 그 아래로 드러난 입술과 긴 목도. 황제구나.

시선을 더 아래로 내리니 이번에는 손이 보였다. 내 손을 덮은 커다란 손이.

하지만 내가 깨어났는데도 황제가 영 반응이 없는 게 이상했다.

“폐하.”

결국 직접 불러보자 그제야 손이 움찔했다. 약간 아래로 숙이고 있던 고개도 위로 올라왔다.

잠들어 있었구나. 난 또 걱정스럽게 나 보고 있는 줄 알았지. 면사 저거 사기치기 딱 좋네.

“계란아?”

“누구더러 계란…… 아니, 폐하 맞아요?”

“깨어나자마자 뭔 소릴 하는 게냐.”

그의 손을 쥐어보자 단단했다. 황제인데도 손이 단단해. 황제 손은 말랑할 줄 알았는데.

“깨어나자마자 유혹부터 하고.”

“폐하가 맞는지 확인해 본 건데요.”

“왜 자꾸 짐을 확인하는 게냐.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건 네 쪽인데.”

아까 깨어났을 때, 난 생전 처음 보는 곳에 있었으니까. 내 원래 몸으로 돌아갔었지.

살아 있었어. 심장이 없는데도.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하긴. 지금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는 건 마찬가지다. 원래 몸에 돌아왔나 싶더니, 왜 또다시 천소여의 몸인 거지?

“머리가 아프냐.”

“예?”

“네가 이렇게 조용한 애가 아닌데.”

홀로 고민에 빠진 모습이 이상한가. 황제가 손을 들어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고.”

걱정에 잠긴 목소리…….

“제가 쓰러졌습니까?”

“그래.”

“걱정하셨습니까?”

황제는 손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말이라고.”

“어떻게 된 거예요?”

“짐이 묻고 싶다. 갑자기 쓰러졌단 말을 듣고 어찌나 놀랐는지.”

“변태 또라이…….”

“뭐라?”

“아니, 폐하 말고요.”

내 몸으로 돌아갔을 때 만난 변태 또라이. 그놈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놈에게 물어보면 대답이 돌아올까?

‘하지만 지금 몸으로 그놈과 만날 수가 있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자니, 이 와중에 황제가 나를 끌어안았다. 몸이 기우뚱하더니 커다란 품 안에 파묻혔다.

생각보다 황제는 가슴이 넓었다. 단단하고. 놀라서 올려다보자, 그는 두 팔로 나를 꽉 가둔 채 중얼거렸다.

“성격이 더러우면 건강하기라도 하던가. 놀라게 하지 마라.”

이 인간이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누구 성격이 더럽대?

따지고 싶지만 그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하니 지금은 넘어가 주자.

내 귀에 닿은 그의 가슴에서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기도 하고…….

“어휴. 폐하는 저한테 완전히 푹 빠지셨네요. 이제 어쩔래요?”

“……일각만 입을 다물거라.”

* * *

“소주께서 쓰러지신 동안 얼마나 난리가 났는지 몰라요!”

“폐하께서 막! 탕 궁의한테 완전히 멋있게 호통을 막!”

황제가 돌아간 후, 측근 궁녀인 원웅과 부성은 신이 나서 손까지 휘저어가며 떠들었다.

하지만 밝은 모습과 달리 둘 다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내가 갑자기 의식을 잃어버리니 많이 놀랐나 봐.

그 때문에 나는 한동안 두 사람을 달래주느라 온갖 건강한 척을 다 해야 했다.

팔도 내밀어보고 기합도 질러보고 일부러 웃을 땐 입도 크게 벌리고.

그러다가 두 사람이 좀 괜찮아졌다 싶을 즈음에야, 나는 틈을 엿봐서 얼른 질문했다.

“있지, 내 상태가 정확히 어땠어? 혹시 내가 쓰러졌을 때 말이야. 기억을 잃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진 않았어?”

이거 진짜 궁금했다. 내가 내 진짜 몸에 잠시 돌아갔을 때, 반대로 이 몸에는 ‘진짜’ 천소여가 돌아왔는지 아닌지.

물론 내 진짜 육신에서 지낸 영혼이 천소여의 영혼인지 다른 사람 영혼인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그러나 원웅과 부성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아니요?”

“소주는 계속 쓰러져 있었어요.”

“심장 박동이 아주 느려졌는걸요.”

“탕 궁의도 원인을 모른다 하고…….”

그럼 내 영혼이 내 몸에 돌아간 사이 이 몸은 빈 몸으로 있던 건가? 그건 왜 그렇지?

몹시 수상쩍다. 역시 빨리 무공을 익혀서 몰래 월담해 수도로 나간 다음 정보를 수집해야겠어.

언제 또 그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단 거잖아. 어찌 된 일인지 빨리 알아내야 해.

게다가…… 다음에도 일이 지금처럼 진행된단 보장은 없지.

다음에 내 몸에 돌아갔을 땐 천 귀인의 몸에 다시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 몸은 어떻게 될까? 죽을까?

내가 죽으면 황제는 슬퍼할까? 오늘 보니 의외로 진지하게 걱정한 모양이던데.

의외였지. 난 내가 없어져도 떡돌이가 걱정을 하지 황제는 무덤덤할 줄 알았는…… 아 떡돌이! 떡돌이는 지금 얼마나 놀랐을까!

“청적에 좀 다녀올게.”

내가 침상에서 일어나자 원웅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소주! 깨어난 지 얼마나 되셨다고요!”

부성은 밖으로 나가더니 얼른 탕약을 가져와 내밀었다.

“맞아요. 지금은 그냥 이거 드시고 한숨 푹 주무세요. 병명을 모르니 최대한 몸을 사리셔야지요.”

병의 문제가 아니야. 난 그냥 영혼이 나갔다 들어온 거라고!

갑갑해라. 말을 할 수 없으니 답답하네.

하지만 두 궁녀가 나를 말리는 이유는 안다. 저 두 사람의 눈에 나는 환자지.

의식을 잃었다가 막 깨어난 환자. 그런 환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나가려는데 말릴 수밖에 없을 거야.

“알았어.”

결국 두 사람의 말을 따라 도로 침상에 앉았다.

생각해보니, 떡돌이도 내가 깨어났단 소식을 들었을 거야. 내시니까. 그러니 꼭 지금 보진 않아도 될 거다. 만나기로 약속한 것도 아니고…….

“근데 이 탕약, 꼭 먹어야 돼?”

* * *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도로 돌아오십니까. 여기가 뭐 좋은 데라고요.”

기몽 장군이 혀를 차자 염 귀인은 탁자 위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누군 오고 싶어서 온 줄 아나.

하지만 우물에서 태감의 시체를 발견해 목격자이자 용의자로 심문을 받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아예 현장에서 검거됐으니, 기몽 장군이 기가 차 할 만도 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억울한 마음을 꾹 누르며 염 귀인은 차분하게 말했으나, 기몽 장군은 웃으면서 자기 눈두덩이를 가리켰다.

“제 눈은 무언가를 보았습니다만.”

“그냥 산책을 했을 뿐이다.”

“산책도 하고. 흙도 파고. 판 김에 뭐도 좀 묻고. 그런 거지요. 네.”

‘뭐를 묻었다’는 말에 염 귀인이 움찔하자, 기몽 장군은 미간을 찌푸리며 웃었다.

“참 시기적절하지 않습니까? 하필 이 때에 천 귀인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쓰러졌으니까요.”

“나와는 관계가 없다. 난 천 귀인이 쓰러진 후에 그곳에 간 게 아니냐.”

“제가 아까 말을 잘못했군요. 염 귀인께서는 묻으러 간 게 아니라 파내러 간 것이지요.”

“나는-.”

염 귀인은 다시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기몽 장군이 탁자에 두 가지 물건을 내려놓자 바로 말문이 막혔다.

하나는 머리카락을 싼 천.

하나는 ‘천년비진쾌도래’라고 쓴 종이.

둘 다 수사청에 오자마자 압수당한 것들이었고, 흙이 묻어 있었다.

“천 귀인이 쓰러진 후 이걸 파냈다는 건, 천 귀인이 쓰러지기 전에 이걸 묻었을 가능성이 크단 거지요.”

“나와는 상관없어.”

기몽 장군은 빙그레 웃었다.

“폐하께서도 과연 그리 생각하실는지.”

그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염 귀인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하필 일이 꼬여도 이렇게…….

그 사이. 밖으로 나간 기몽 장군은 종이를 펼쳐보았다.

염 귀인 앞에서의 의기양양한 표정과 달리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정황상 염 귀인의 행적이 수상하긴 한데.

염 귀인의 말처럼 종이에 쓰인 문구가 이 일과 그녀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저주 당사자 이름을 써 둘 텐데. 왜 천소여가 아니라 천년비라 써둔 거지? 무슨 뜻이 따로 있나?’

* * *

걱정과 달리 이후로는 시간이 평범하게 흘러갔다. 아픈 데도 없고, 날 부르는 괴이한 목소리도 안 들리고.

아. 희한한 소식이 하나 있긴 했지. 염 귀인이 나한테 저주를 걸다가 현장에서 기몽에게 발각되어서 지금 수사청에 가 있다고.

“이참에 아예 냉궁에 처박혀서 못 나오게 됐으면 좋겠어요.”

부성은 소식을 전해주다가 제풀에 화가 나서는 입에서 불을 내뿜었다.

“진짜 한두 번도 아니고. 항상 이게 뭐래요?”

그렇게 평화롭게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까? 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서인지 또 후궁들이 동원된 마상 격구 놀이가 열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 * *

“우리가 참석한다고?”

전에 마상 격구 시합을 강제로 관람하다가 실수한 후. 나는 혹시나 해서 격구 규칙을 부성과 원웅에게 들어 익혀두었다.

다음에도 같은 실수를 하면 안 되니까.

그래서 이번 격구 시합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젠 규칙을 아니까 제대로 응원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갔는데.

태감이 뜬금없이 모인 후궁들에게 격구용 의상을 주는 게 아닌가.

황후도 몰랐던 일인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이게 무엇이냐?”

황후가 묻자, 황제 옆에서 늘 따라다니는 태감이 얼른 허리를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황후 폐하. 응원만 하는 건 소주들도 지루하실 거라고, 이번에는 직접 참여하라는 황명이십니다.”

이어서 태감이 설명하길, 이전처럼 사자 친왕과 황제가 두 패로 나누어지는 건 그대로인데, 거기에 소속되어 경기를 뛰는 사람이 이번에는 병사들이 아닌 후궁들이 될 거라고.

전에 후궁들이 응원하던 장소를 보니, 어느새 병사인지 관리들인지 모를 이들이 모여 앉아서 이미 북과 장구를 들고 있었다.

……어째서인진 모르겠지만 기몽 장군도 있네. 너도 응원하러 왔니?

눈이 마주치자 그가 씩 웃는다.

웃지마 자식아. 우리가 언제부터 웃으면서 인사 나누는 사이라고.

어쨌든 이번에는 응원을 병사들에게 시킬 모양이구나.

‘진짜 지들 멋대로네.’

혀를 찼지만 어쨌든 마음에 든다. 보는 것보단 뛰는 게 재밌지.

납득하고서 나는 격구할 때 입을 옷과 방어구를 받은 후 근처의 건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급된 신발 역시 평소보다 편해서 마음에 들었다.

이런 게 있으면서 왜 평소엔 주질 않는 거냐. 왜.

그렇게 옷을 입고서 경기장으로 가 보니 어느새 말도 준비되어 있고, 사자 친왕과 황제 역시도 도착해 있었다.

둘 다 후궁들과 비슷한 차림인데, 차이점이 있다면 머리에 꽂은 깃털?

수탉이냐……. 뭐야 저 깃털은?

“마마님들, 이쪽으로 오시지요.”

황당해서 두 남자가 머리에 꽂은 깃털을 보고 있자니 경기 진행을 맡은 태감이 후궁들을 부른다.

가리키는 곳으로 가서 서자, 태감은 추가된 규칙을 빠르게 설명해주었다.

“송구하옵지만, 마마님들께 소속을 고르게 하면 당연히 모두 폐하를 고르실 테니, 공정성을 위해 친왕 전하께서 한편이 될 마마님들을 먼저 뽑기로 하셨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자연적으로 폐하와 한 소속이 되어 경기를 치르실 겁니다.”

태감이 설명을 끝내자, 이미 말을 맞췄는지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사자 친왕이 앞으로 나서며 우리에게 포권을 취했다.

“후궁마마들과 함께 경기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황후에게 다가가 물었다.

“황후마마와 한 소속이 될 영광을 제게 주시겠는지요?”

“그러지.”

황후는 우아하게 웃고서 그에게 다가갔고, 그런 식으로 사자 친왕은 한 명 한 명 자기 소속이 될 후궁들에게 한편이 되어 달라 요청했다.

여기서 거절할 수도 없는지라 대다수는 기쁜 듯 받아들였다.

그런데 참. 사자 친왕과 황제가 경기 결과를 두고 내기라도 했나? 사자 친왕이 뽑은 구성원을 보면 좀 웃기다.

황후는 황후라 뽑은 느낌인 반면, 다른 후궁들은 뼈대를 보고 뽑은 티가 났다. 자세가 바르고 건강해 보이는 후궁들 말이다.

엄청 이기고 싶은가보네…… 생각하는 순간. 근처에서 태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한 분만 더 고르시면 됩니다, 전하.”

그 즉시 사자 친왕은 바로 내 쪽을 확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놀랍게도 씩 웃더니 내 앞으로 다가오며 황제에게 물었다.

“제가 천 귀인을 제 소속으로 데려가면, 폐하께서 화내실까요?”

그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황제에게 갔다. 그러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화는 안 낼 거 같긴 한데.

젠장, 면사 좀 벗어라. 면사 때문에 표정이 안 보이잖아.

일단 입만 봐서는 별 표정이 없는데……. 곧 그 입꼬리는 삐죽 위로 올라갔다.

“이건 승패를 노리는 경기이니, 당연히 괜찮지.”

“그럼 저는-.”

“하지만 천 귀인은 몸이 약해 경기에 도움은 안 될 거다.”

뽑지 말란 이야기네.

그러나 사자 친왕은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농담조로 다시 대꾸했다.

“위험을 감수한 경기는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죠.”

뽑지 말라는 데도 저러는 걸 보니, 황제를 놀리고 싶은가 봐.

그래도 사자 친왕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황제가 무어라 대답할지는 좀 궁금해지는데?

나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도 사자 친왕의 질문을 듣고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보이진 않지만, 각도상 날 보는 것 같다.

자. 어떻게 대답할 거야, 황제?

하지만 이번에는 망설이는 시간이 짧았다.

“뽑지 마라.”

황제의 단호한 말에 사자 친왕은 의뭉스럽게 웃었다. 태감도 입을 가리고 히죽댔다. 후궁들은 표정이 좋지 않지만.

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뭐야. 혹시 저 황제, 나는 자기랑 한편을 해야 하니까 뽑지 말라는 걸 돌려 표현한 건가?

……날 진짜 좋아하긴 하네.

하지만 그 감동은 황제가 자기편을 고를 때 깨졌다.

염 귀인이 수사청에 잡혀가는 바람에 인원이 홀수가 되어서 한 명은 경기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황제가 바로 날 가리키면서 말했기 때문이다.

“천 귀인을 빼면 되겠군. 전력이 안 될 테니까.”

뭐야?

내가 당황한 티가 났나. 태감이 내 눈치를 보며 응원석을 가리켰다.

“천 귀인께서는 저쪽으로 가 앉으시지요. 나중에 결원이 생기면 천 귀인을 부르겠습니다.”

저…… 저 못된 황제 같으니라고! 감히 나를 무소속으로 만들다니!

나는 무림에서도 늘 혼자 놀았는데! 궁전에서도 혼자 놀란 말이냐!

나는 황제가 친 뜻밖의 뒤통수에 기가 막혀서 주먹을 꽉 쥐었다. 감동은 이미 얼어서 죽었다.

하지만 씩씩대도 별수 없었다. 황제는 휙 말머리를 돌렸으니.

결국 나는 콧김을 내뿜으면서 응원석으로 가 털썩 앉았다.

내가 속상해하자 원웅은 차가운 물을 건네주면서 웃었다.

“폐하께서는 소주가 걱정되는 거예요. 전에 쓰러진 적도 있으시니까요.”

그러면 그렇게 말했어야지! 대놓고 내가 쓸모없다잖아!

원웅은 필사적으로 좋은 소리를 이어갔지만, 이미 분노는 내 마음을 잠식했다.

나는 찬물을 한 번에 들이키며 주문을 외웠다. 결원 생겨라. 결원 생겨라. 결원이 생기는 즉시 내가 본때를 보여주마.

감히 이 천년비를 무시하다니.

그 순간. 효과가 있었나. 정말로 결원이 생겼다. 공이 혜비의 말 밑으로 가자 말이 펄쩍 뛰고, 그 바람에 혜비가 낙마한 것이다.

응원하던 병사들이 다들 벌떡 일어났고, 대기하던 의원들은 눈 깜짝할 사이 달려가 혜비를 들것에 실어 나왔다.

혜비가 크게 다치지 않은 게 확인되자, 경기를 진행하는 태감이 나를 보며 외쳤다.

“천 귀인께서 친왕 전하의 편으로 들어오시겠습니다!”

오호라. 나는 사자 친왕 쪽이구나. 잘 됐다. 애초에 나를 따돌린 건 황제 자식이니까.

내가 옆에 놓아둔 채를 쥐고 천천히 일어나자, 원웅과 부성이 큰 소리로 응원했다.

“잘하세요, 소주!”

“소주, 점수 많이 따세요!”

혼자서 응원석을 지키는 내가 불쌍했었는지, 근처의 병사들도 환호하면서 장구를 쳐주었다.

“힘내십시오, 천 귀인!”

흥. 그렇게 하더라도 내 상처받은 마음은 치유할 수 없어.

나는 한 손을 들어 올려 ‘조용히’ 신호를 보냈다.

병사들은 단체 훈련을 잘 받았는지 눈치껏 바로 조용해졌다.

그 고요한 적막이 내게 잘 어울렸다. 나는 이제 고원을 뛰노는 한 마리의 늑대가 될 셈이니까.

나는 채를 한 바퀴 휙 돌려 꼬나 쥐고서 낮게 일갈했다.

“아니. 이 몸은 점수 따위 따지 않는다.”

“예?”

“내가 따는 건 오로지 적들의 모가지뿐.”

“!”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