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남겨진 사람은 언제나 슬프다
“궁의를 보내라! 어서!”
황제는 황급히 지시하며 일어섰다.
지체할 틈도 없이 곧장 동쪽 구역으로 달려가는 그를 그림자들이 바삐 뒤쫓았다.
동영궁 안으로 들어간 황제는 천 귀인의 처소로 달려가며 이를 갈았다.
“멀어, 멀어, 멀다. 가까운 데 두든가 해야지.”
마침내 낮은 사립문 울타리 너머로 태감들이 우는 모습이 보였다.
조급해진 황제는 울타리를 걷어차고 들어가 벌컥 문을 열었다.
“계란아!”
안에서는 궁녀 둘이 엉엉 울다가 황제를 보자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인사를 받을 틈도 없었다. 그는 곧장 침상으로 다가갔다.
“폐하.”
탕 궁의가 천 귀인을 진맥하다 말고 일어서려 하자, 황제는 손을 저었다.
“됐다. 진맥부터 해라.”
“송구하옵니다.”
탕 궁의가 진맥을 마저 하는 사이, 황제는 초조하게 두 번째 손가락의 마디를 엄지로 문질렀다.
그러다 탕 궁의가 천 귀인의 손목에서 손을 떼자, 더 참지 못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어떠하냐?”
“심장이 너무 느리게 뛰고 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반대로 황제의 심장을 빠르게 만들었다.
“심장이 느리게 뛰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중병이냐?”
“그게…….”
“말하라.”
“병이라 하기엔 그 외 다른 증세는 없습니다. 부상도 없고, 독에 당한 것도 아닙니다.”
“한데 심장이 왜 느리게 뛴단 거냐.”
“그걸 모르겠-.”
“찾아내라. 모르면 알아내라.”
말을 끊은 황제가 차갑게 명령했다. 눈을 가렸는데도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폐하께서 천 귀인을 지극히 총애한단 소문이 사실이로구나! 탕 궁의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
“예, 폐하.”
* * *
“천 귀인이 쓰러졌다고?”
측근 궁녀가 전한 말에 염 귀인은 바둑을 두다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바둑알이 소맷자락에 스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우 귀인은 떨어진 바둑알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혹시 지고 있으니까 일부러 떨어트린 거 아니에요?”
우 귀인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천 귀인이 쓰러졌다잖아요.”
염 귀인이 설명했지만, 그래도 우 귀인은 바둑알을 주워 원래의 자리에 덤덤히 놓기만 했다.
“들었어요. 하지만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친하지도 않은데.”
사실 친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우 귀인은 천 귀인에게 악의를 품고 있었다.
일전에 천 귀인의 조언을 들어 황제 앞에서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했다가 단단히 망신을 당한 일 때문이었다.
그건 두 사람의 오해로 벌어진 일이었으나, 우 귀인은 아직도 그게 천 귀인의 고의라 믿고 있었다.
“염 귀인도 천 귀인하고는 친하지 않잖아요.”
“그래도 같은 후궁인데, 걱정될 수밖에 없죠.”
“난 그렇게 착하지 않아서.”
염 귀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며칠 전 그녀가 비원이란 자와 거래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우 귀인처럼 태연히 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니 이렇게 심장이 뛸 수밖에.
“혼자 있고 싶어요. 오늘은 돌아가 줘요.”
염 귀인이 이마를 손으로 감싸며 부탁하자, 우 귀인은 바둑돌을 아쉬운 듯 바라보며 일어났다.
“그럼 나중에 봐요.”
우 귀인이 나가자, 소식을 전한 측근 궁녀는 더욱 가까이 염 귀인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소주. 혹시 그 머리카락 때문에…….”
“쉿.”
염 귀인은 놀라서 손가락을 입 앞에 댔다. 궁녀는 얼른 입을 다물었으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왜 쓰러졌는지는 들었어?”
“모르겠습니다. 방 안에서 군주 전하와 놀다가 갑자기 쓰러졌나 봐요.”
“전하가 한 짓은…… 아니고?”
“당연히 아니겠지요. 그런 거라면 군주 전하가 굳이 천 귀인의 방에 왜 찾아가셨겠어요. 범인으로 오해받기 쉬울 텐데요.”
“상태는 어떻대?”
“궁의도 왜 쓰러졌는지 이유를 모른대요. 그래서 지금 폐하께서 화가 아주 많이 나셨다 하고요.”
염 귀인은 손을 덜덜 떨다가 초조하게 물었다.
“죽을 거…… 같아?”
“심장이 무척 느리게 뛴다던대요.”
염 귀인이 비원과 거래하는 모습을 지켜본 궁녀도, 주인만큼 겁이 난 얼굴이었다.
염 귀인은 주먹을 쥐고서 입가를 가렸다. 천 귀인에게 복수를 다짐했지만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적당히 비웃을 수 있는 그런 일. 그 정도 수준을 원했다.
제일 좋은 건 천 귀인이 흑합과 간통을 한다고 몰아가서 한쪽은 냉궁에 가둬버리고 한쪽은 변방에 보내는 것인데, 아예 쓰러져버릴 줄이야.
“나 때문이면 어쩌지?”
염 귀인이 들릴 듯 말 듯 아주 작게 속삭이자, 궁녀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너무 심려치 마세요, 소주.”
궁녀는 다부지게 말했으나 염 귀인은 전혀 위안을 받지 못했다. 머리카락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게 궁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초조해하던 염 귀인은 그러다가 무언가를 깨닫고서 벌떡 일어났다.
“흑합 장군!”
“예?”
“나는 둘 다에게 복수를 해달라 했잖아. 근데 천 귀인이 쓰러졌어. 그럼 흑합 장군도 쓰러졌을 거 아냐!”
“아. 그러네요.”
“그 사람이 죽으면 난……!”
“소주? 어디 가세요, 소주?”
일어난 염 귀인이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측근 궁녀는 놀라서 뒤를 따라 달려갔다.
* * *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어디래? 처음 보는 천장이었다.
‘뭐지?’
누가 내 이름을 세 번 불렀는데…… 이후에 기억이?
눈을 비비고 좀 더 자세히 보니 더 당황스럽다. 역시 처음 보는 천장이야. ‘천 귀인’의 침실이 아니다.
그래도 비슷한 일이 두 번째라 그런가, 처음만큼 놀랍지는 않네. 그러다가 창문을 발견하고서 그쪽으로 가보았다.
둥그런 창문 너머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개울이 보였다. 그 위로 개울만큼 작은 다리가 있고. 밤이네.
다리 위에는 누군가 서 있다. 뒷모습이라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누구지?’
고민하다가 창문을 열자, 그 순간. 다리 위에 서 있던 사람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는 놀라서 욕할 뻔했다.
‘저 사람!’
사하비단의 수장. 또라이 변태잖아?
반사적으로 얼굴이 구겨졌다. 저 변태가 여기 왜 있어?
그 사이, 또라이 변태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뒷짐 지고 걸어오는 거 봐.
그런데…… 저게 미쳤나? 평소에 보던 표정이 아니었다. 살얼음이 낀 차가운 얼굴. 변태 같지 않다.
왜 저러나 싶어 쳐다보고 있자니, 창문 바로 앞으로 다가온 또라이 변태가 오싹한 말투로 말했다.
“귀한 몸이니 잘 모시고 있으라 했을 텐데요. 밤에는 창문을 열지 마십시오. 그분 몸이 상하지 않습니까.”
뭐라는 거야 이건? 목소리는 매정한데 내용이 따습잖아?
황당해서 인상을 구겼으나, 또라이 변태는 더 설명하지 않고 창문을 탁 닫았다.
도로 창문을 열고서 저 주둥이를 딱 내려칠까…… 생각하다가 일단 몸을 돌렸다.
설마 또 이상한 몸 안에 들어온 거 아니야? 불안해서.
원래 또라이 변태는 날 볼 때마다 배시시 웃으면서 “녕녕.”이라고 제멋대로 불러댄다.
그런데 저렇게 나온단 건, 이번에도 나는 내 몸으로 깨어난 건 아니란 거지.
젠장. 이번엔 설마 또라이 변태네 동생, 뭐 그런 몸으로 깨어난 거 아냐? 물론 또라이 변태에게 동생이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아. 다행히 저기 거울이 있다. 나는 얼른 그곳으로 다가가 거울 뚜껑을 열었다.
누구냐. 이번엔 대체 무슨 몸으로 들어온 거야.
그런데…….
‘나잖아?’
세상에. 나, 원래 몸으로 돌아온 거야?
생각해보니 잠시 의식을 잃기 전 내 이름을 누군가 세 번 불렀지.
혹시 영혼……을 도로 불러왔다거나 그런 걸까? 아니, 일단 내 몸이 내 몸이 맞는지부터 살피자.
가능성이 적긴 해도 나랑 흡사하게 생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잖아.
얼른 침대 위로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했다.
온몸 곳곳이 내공을 돌리고 나니 확신이 왔다. 역시 나야. 내 몸이야!
“와.”
얼결에 만세를 부르다가 도로 내렸다.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내 원래 몸. 내공과 근육으로 가득 찬 내 몸을 되찾은 건 좋은데.
다시 빌어먹을 정파 놈들에게 악적 소리를 들으며 쫓길 생각을 하니 그건 좋지 않았다.
궁전에서도 마냥 평화롭진 않았지만, 그래도 원래 몸으로 지낼 때보다는 여유로웠잖아.
게다가 떡돌이. 나 좋아하는 우리 내시는 어째. 내가 없어서 우는 거 아냐? 같이 떡 나눠 먹을 사람도 없고?
황제는? 나를 짝사랑만 하겠다는 이상한 황제는 어쩌지?
……아냐, 걔는 나 없어도 잘 지낼 거야. 후궁만 몇 명이야?
내가 없으면 또다른 짝사랑 상대를 찾아서 놀걸? 연얼 군주가 차라리 걱정되지.
원웅이랑 부성도 어떻게 되나 좀 염려되고. 일반 궁녀들은 업무처라 해야 하나?
하여튼 그런 부서 이동이 가능한 것 같았지만, 측근 궁녀들은 평범하게 입궁한 사람들이 아니라 후궁이나 황후가 친정에서 데려온 경우라 들어서…….
그럼 두 사람은 도로 친정으로 가려나? 아니면 그냥 보상금 같은 걸 받고서 퇴궐하나?
‘어? 잠깐만.’
생각해보니 내가 지금 걔들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지금 내 상태도 단순히 ‘만세! 돌아왔어!’ 할 때가 아니야. 이상한 점이 하나둘이 아니라고.
의문점 하나. 또라이 변태가 왜 나한테 저리 남처럼 굴지?
아니, 우리가 물론 남은 맞지. 맞는데. 평소 또라이 변태의 행동을 떠올리면 진짜 이상하다.
내가 괜히 그놈을 또라이 변태라 부르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놈. 감기가 어쩌구 한 말. 마치 나랑 최근에 얘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말했어.
난 내내 천 귀인 몸속에 있다 왔으니, 그놈하고는 진짜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도.
‘내 몸속에도 혹시 다른 영혼이 들어왔었나?’
가능성 있다. 충분히 있어.
사자친왕이 그랬지. ‘부활한 천년비’가 사하비단과 손을 잡았다고.
그러면 내 몸속에 들어온 그 영혼이 변태 또라이와 손을 잡았던 건가?
들어왔다면 누구? ‘진짜 천소여’의 영혼? 아니 전혀 다른 누군가의 영혼?
여기서 의문점 둘. 그렇다 치고. 어떻게 원래 몸으로 돌아온 거지?
의식을 잃기 전에 들은 그 목소리. 그게 열쇠일까?
그리고…… 제일 중요한 마지막 의문.
난 용고를 먹고 죽었는데 어째서 멀쩡하지?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댔다.
참으로 이상해. 천 귀인도 용고를 먹었다지만, 나는 그녀가 어떻게 용고를 먹은 건지, 먹은 게 진짜 용고인지, 심지어 그걸 어떻게 구해 먹었는지조차 하나도 아는 게 없다.
그래서 탕 궁의가 놀라 하는 걸 보면서도 별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건은 다르다. 나는 분명 용고를 먹었다. 심장을 녹이는 통증도 느꼈고, 내가 죽어간다는 걸 분명히 알았다.
먹으려고 먹은 건 아니지만.
그런데 심장이, 사라졌어야 하는 심장이 이렇게 멀쩡하게 뛰……지 않네?
뭐야! 내 심장! 내 심장 안 뛰고 있잖아?
당황해서 얼른 상의를 벗어 던지고 심장 부근을 살폈다.
“으어!”
그러자 뜻밖에도 심장 부근에 처음 보는 흉터가 있었다. 놀라서 거울 앞으로 가서 보니 더욱 잘 보였다.
잠깐만, 뭐야 이거!
아니, 심장이 안 뛰면 내가 지금 어떻게 살아 있는 건데?
발을 구르다가 황급히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야!”
그러고서 소리를 내어 변태 또라이를 부르자, 아직 다리에 서 있던 변태 또라이가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그는 낮게 욕을 뱉더니 다가와서 제 윗옷을 벗어 내 얼굴과 상체를 동시에 덮었다.
“조심하라 했을 텐데.”
아까와 같은 싸늘한 목소리.
하지만 난 이번에는 아까처럼 참지 않았다. 대신 상의를 도로 내리고서 변태 또라이의 멱살을 잡았다.
확 끌어당기자 그는 대번에 끌려왔다.
“야, 내 심장 어디 갔어?”
나는 이를 갈며 외쳤다.
그러자 변태 또라이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갑자기 눈썹 끝이 내려가서 물었다.
“녕녕?”
“왜 자꾸 남 이름을 멋대로, 아니, 내 심장 어디 갔냐고!”
버럭 외치자 대답은 없고 그가 또 “진짜 녕녕?” 한다. 이어서 변태 또라이는 대답을 생략하고 커다랗게 웃어댄다.
뭐가 그리 좋은지 변태 또라이는 혼자서 껄껄 웃어대다 웃음이 멎자, 이번에는 내 턱을 잡고 위로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돌아왔구나, 녕녕.”
“네가 진짜로 죽고 싶구나.”
머리로 녀석의 머리를 박아버리자 쾅 소리가 났지만, 녀석은 아픈지 주저앉으면서도 여전히 웃어댔다.
“내 심장 어디 갔는지나 말해.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도.”
변태 또라이는 웃음을 뚝 그치고는 내가 집어던진 자기 윗옷을 다시 들어서 내게 내밀었다.
“옷부터 입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누가 변태로 보일까?”
녀석의 질문에 내가 상의를 벗고 있단 게 기억났다. 아. 젠장. 심장을 확인한다고…….
낯부끄럽지만 태연한 척 얼른 웃옷을 받아 대충 걸치고 매듭을 맸다.
“이거 봐.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줘야 한다니까.”
변태 또라이가 자연스럽게 내 옷고름을 자기가 다시 묶어주려 하기에 얼른 뒤로 물러났지만.
“허튼수작 그만하고 대답이나 해.”
대답이나 하라니까, 변태 또라이는 히죽 웃으면서 창틀에 턱을 괴었다.
“은인인데 은인 대접은 좀 해주지 그래?”
“은인? 무슨 소리야?”
“쓰러져 있는 너를 내가 발견해서……”
그런데…… 이상해. 그가 무어라 말을 하는데 갑자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또다시 안개가 차올랐다. 확신이 왔다. 나 기절할 것 같은데. 또.
* * *
“됐다.”
염 귀인은 흙투성이 손으로 머리카락과 종이를 움켜쥐었다. 얼굴은 눈물범벅이지만 그녀는 웃고 있었다.
“됐어.”
“소주…….”
“도로 파냈으니 흑합은 죽지 않을 거야. 그렇지?”
측근 궁녀는 ‘네, 네’ 서둘러 대답하며 주위를 살폈다.
외진 곳이라 보는 사람이 없지만, 잘못하면 저주를 한 거라 오해받을 수도 있었다.
“알았으니 빨리 가요, 소주.”
측근 궁녀는 염 귀인이 파둔 흙을 재빨리 덮고 발로 문질렀다.
“얼른 가요. 빨리요.”
그때.
“거기 누구냐.”
수사청의 끈질긴 사냥개, 기몽 장군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