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관심은 없지만 들어보고 싶은 말
천을 벗긴 염 귀인은 깜짝 놀랐다. 그 안에는 잘린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이걸 잘 묻은 다음 세 번 절을 하면 됩니다.”
“이게 무슨…….”
등골이 쭈뼛해져 중얼거리자, 옆에서 염 귀인의 측근 궁녀가 겁먹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자와 거래하지 마세요, 소주.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수상해요.”
소리를 들은 건지 푹 눌러쓴 모자 아래에서 음침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맞습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셔도 됩니다.”
염 귀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럴까?
하지만 마음을 바꾸더라도 불안했다. 이미 저자는 이쪽의 얼굴을 보았잖아.
자신은 비원이란 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저쪽은 제 얼굴도 신분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지금 거래가 틀어지더라도 이 부분은 내내 신경에 거슬릴 터. 그렇다면 차라리…….
“황궁에서는 저주가 금지되어 있다. 이런 걸 묻다가 걸린다면 나는 냉궁에 갇히겠지.”
염 귀인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하자 비원이 조롱조로 웃었다.
“황궁에 저주가 금지되어 있다고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는 말투였다.
문득 염 귀인은 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물어봐야 대답하지 않을 터. 염 귀인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거래는 할 수 있어. 단, 어떤 식으로 복수를 할지. 그걸 말해. 그래야 나도 위험을 무릅쓸지 아닐지 결정할 수 있으니.”
* * *
흑합 장군이 원래는 염 귀인이랑 약혼한 사이였다니. 뭐야. 전혀 안 어울리는 조합인데?
모르겠다. 이미 염 귀인이 후궁이고 흑합 장군은 떡돌이 친구여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내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우뚱대자, 원웅이 나무 상자를 들고 지나가다가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왜 자꾸 몸을 그렇게 흔드세요, 소주. 그러다 평상에서 굴러떨어지실까 봐 겁이 나요.”
“고민 중이었어.”
“무슨 고민이요?”
“말 못 할 고민.”
떡돌이에게는 대놓고 물어봤지만, 그건 설마 이런 관계가 나올 줄은 몰라서 그런 거다.
하지만 이미 알아 버렸는데, 소문내듯 말하기는 좀 그렇지?
어쨌든 염 귀인이 날 싫어한 이유는 이제 알겠네. 아직 흑합에게 마음이 남은 거야.
원인을 아니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하다. 왜 저렇게 날 싫어하나 진짜로 궁금했으니까.
시원한 것과 별개로 기분은 여전히 더럽지만.
‘내가 뭘 어쨌다고! 심지어 진짜 흑합 장군은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데!’
속으로 구시렁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뭐, 내가 염 귀인 멱살을 잡고서 날 끌어들이지 말라고 해 봐야 무슨 수가 있겠어.
그 사람이 나한테 시비를 걸면 받아치면 되는 거고, 나는 내 할 일이나 하자.
“어디 가세요, 소주?”
“폐하의 품으로.”
“예?”
“농이야.”
황제가 보장해준 비밀 공간에 가야지. 가서 수련이나 해야겠어.
* * *
……그렇게 생각했는데.
“폐하께서 왜 여기 있어요?”
황제가 선객으로 와 있었다.
내가 황당해서 묻자, 그는 드러누워 있다가 상체를 일으키며 태연히 대답했다.
“짐이 말하지 않았느냐? 여긴 원래 짐의 비밀 장소인데.”
“폐하도 안 오는 저만의 비밀 공간 아니었어요?”
“네가 먼저 가 있을 때는 짐이 눈치껏 안 왔던 거지.”
“그런……!”
내 비밀 장소는? 나만의 비밀 장소는?
도끼눈을 뜨고서 씩씩거리자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짐과 같이 있는 걸 싫어하는 후궁은 너 하나뿐일 거다.”
“폐하가 모르셔서 그렇지 더 있을지도 몰라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사람들한텐 짐도 신경을 쓰지 않으니 상관없다.”
말은 잘하지! 조 주둥이! 조둥이!
찰싹찰싹 두드려보면 속이 시원하겠네!
황제가 면사 아래로 입만 드러낸 건, 혹시 자기 주둥이를 두드려달라고 그런 건 아닐까?
“입을 맞추고 싶으냐?”
“아니요!”
“짐의 입을 계속 쳐다보는데.”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혼자 웃겨!
떡 하니까 떡돌이 생각나네. 전에 만났을 땐 왜 떡을 안 줬지?
“무슨 생각 하느냐?”
“다른 사내 생각이요.”
어라? 황제가 코웃음을 친다. 날 좋아한다면서, 내가 다른 사내를 생각한다는데 질투도 안 나나 봐?
하긴. 질투한답시고 누구냐 꼬치꼬치 캐묻는 것보단 낫지.
나는 팔짱을 끼고서 벽의 귀퉁이에 가 앉았다.
“…….”
하지만 역시 황제가 신경 쓰인다. 운기조식도 할 수 없어. 운기조식 도중에 갑자기 말 걸거나 건드리면 어떡해?
지금은 관심 없는 척 누워 있지만.
결국 일어서자, 거봐. 황제가 바로 눈을 뜨고 묻는다.
“어디 가느냐?”
“제 처소에요.”
“방금 왔으면서?”
“전 혼자 있고 싶은 거지 폐하와 둘이 있고 싶은 게 아니라서요.”
내 대답이 싫은지 황제가 작게 혀를 찼다.
“계란아.”
이어서 부르는 목소리. 차갑다. 차가운데 장난기만 가득하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계란아.”
“누구더러 자꾸 계란이래요?”
“별명을 멋대로 짓는 건 네 특기가 아니었나?”
“아닌데요?”
“발뺌하는 게 특기인가.”
“아이고오.”
나는 코웃음을 치다가 문득 상대가 황제란 게 떠올라서 황급히 입을 다물고 곁눈질했다.
평소처럼 행동하고 보니 신경이 쓰였다.
황제는 손가락 하나로도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데. 내가 앞에서 너무 멋대로 굴었나?
이게 다 내가 잘난 탓이다.
무림의 절대 고수. 그것도 뭘 하든 미움받는 고수로 지내면서,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데 익숙해져서 그래.
나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
처음엔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고 싶어서 이 시선 저 시선 신경을 썼지.
하지만 어떻게 행동해도 결국 그들이 날 미워할 거란 걸 알게 된 후에는 그냥 내 마음대로 행동했다.
그게 습관이 되었나 봐. 지금은 후궁의 몸이고, 황궁 안이고, 이전만큼 강하지도 않고, 상대는 심지어 황제인데. 자꾸 옛날처럼 행동하다니.
뭐 옛날이라고 부를 만큼 오래전도 아니지만.
어쨌든 이제부터라도 신경을 써야 할까?
“계란말이.”
“하명을 하시옵소서 폐하.”
“…….”
아. 별로였나?
면사 아래로 드러난 황제의 입술 양 끝이 아래로 쳐진다. 저건 마치…….
“메기수염…….”
“뭐?”
“아, 아니요. 아니옵니다.”
“하던 대로 하거라. 소름이 돋는다.”
저 황제가!
기가 막혀서 입술을 벌리자, 그 사이. 황제가 가뿐한 몸놀림으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깜짝이야. 몸놀림이 생각보다 가볍고 날래잖아? 나는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났다.
“왜, 왜요?”
당황해서 묻자 황제는 사람을 놀라게 한 주제에 태연자약하게 요구했다.
“계란아. 따라 해보아라.”
“뭘요?”
“짐의 말을.”
“짐의 말을.”
왜 이런 요구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계란아. 따라 해보아라.”
“계란아. 따라 해보아라?”
“사랑합니다, 계란아.”
“사랑합니다, 계란아?”
“사랑합니다, 폐하.”
“…….”
뭐어!
“짝사랑으로 만족한다면서요?”
“짐은 분명 말을 따라하라 했을 텐데. 짐이 그렇게 말했던가?”
“멋대로 고백시키려 드니까 그렇죠!”
이 황제 좀 보게. 아주 능구렁이야 능구렁이?
내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혀를 차자, 면사 아래로 드러난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장난……을 친 건가?
젠장. 뭐 표정이 보여야 구분이 가지.
혹시 저 면사, 자기가 무슨 표정인지 가리려고 두른 건가? 그런 거라면 효과적인데?
“무슨 후궁이 연모한다고 말 한마디 안 해 주나.”
“짝사랑만 하겠단 폐하도 있는데요 뭘.”
“말 한마디 안 지지.”
“원래 전 승리만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네가 좋다.”
“…….”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말에 놀라서 풀을 뽑았다. 뽑은 풀을 꼭 쥔 채 그를 쳐다보자,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풀은 왜 뽑는 거냐.”
반대로 나는 저절로 인상이 일그러졌다.
저 사람은 진짜 이상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심인 건지 모르겠어.
* * *
다행히 다음날에는 황제도 내 비밀 구역에 침범하지 않않다.
그 다음날에도.
덕택에 나는 이틀 내내 운기조식을 하고, 몸 안의 내공을 가다듬어 보고, 간단하게 기초 체력을 다듬고, 어디 근육이 부족한지 점검하며 시간을 보냈다.
진즉 이랬다면 얼마나 좋아?
하지만 중간중간 황제가 생각났다.
아, 절대로 그 황제를 좋아해서 이러는 게 아니다. 그냥…… 그냥?
결국, 연얼 군주가 술을 마시자면서 놀러 왔을 때. 나는 대놓고 물어보았다.
“원래 폐하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해요?”
연얼 군주는 내 앞에 술을 졸졸 따라 주다가 되물었다.
“말을 어떤 식으로 하는데요?”
“뭐가 장난이고 뭐가 진담인지 모르게 해요.”
그건 그렇고 연얼 군주 이 사람, 술 정말 좋아하네.
연얼 군주는 자기 앞의 잔도 술로 채우더니, 그걸 홀짝 입안에 털어 넣고서 고개를 기웃했다.
“글쎄요. 전 폐하랑 말을 많이 섞고 그러진 않아서.”
아. 왕족이라고 해서 무작정 친하진 않구나.
“폐하가 천 귀인은 자주 놀리나 봐요?”
“날 연모한대요.”
“그러면 좋은 거 아닌가?”
“근데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짝사랑으로 남고 싶다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
게다가 짝사랑으로 만족한다면서 내 입으로 자기를 좋아한단 말은 듣고 싶어 하고.
연얼 군주는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쓰지도 않은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군주는 그 상태로 고개만 기웃하다가 “흠.” 소리를 내며 털어놓았다.
“폐하가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긴 해요.”
“얼굴은 맨날 왜 가리는 거래요?”
“글쎄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서.”
연얼 군주는 황제가 얼굴을 가리건 얼굴을 떼고 다니건 별 상관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황제 쪽에 아예 관심이 없구나, 이 사람.
그러다가 군주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폐하가 진심인지 아닌지 신경 쓴단 건, 천 귀인은 폐하에게 진심이라는 건가요?”
“아니요.”
“예?”
묻기에 대답했을 뿐인데, 연얼 군주가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그러고는 입가를 가리더니, 고개를 내 쪽으로 내밀며 목소리를 죽였다.
“천 귀인은 그럼 폐하를 야망을 위한 도구, 뭐 이런 거로 보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닌데요.”
“그럼요?”
“그렇게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연얼 군주는 이번에도 화들짝 놀랐다.
내 말이 이상한가?
하지만 정말인걸. 황제가 진담으로 저러는 건지 장난으로 저러는 건지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그건 황제가 황제니까 그런 거고…… 황제한테 밉보이면 곤란해지잖아.
“복잡한 사이네.”
연얼 군주는 혀를 차고서 다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폐하께서 천 귀인을 유달리 챙기기에 이번에는 정말로 좋아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폐하께서 날 유달리 챙기는 편인가요?”
“의무 날짜가 아닌데도 시침하라 부르는 건 천 귀인뿐이잖아요.”
그게 대단한 건가?
“침상에서 재우고 아침에 보내는 것도 천 귀인뿐이고.”
음. 그건 다들 놀라긴 했지.
그런데 막 고개를 끄덕이는 그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 누군가 속삭이는 느낌이 났다.
낮은 목소리. 귀를 거치지 않고 뇌에 대고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였다.
-천년비
이름을 부르는 듯한…….
내 이름을 부른다고?
나는 놀라서 연얼 군주를 쳐다보았다.
“절 불렀어요?”
기겁해서 묻자 연얼 군주가 “네?” 하고 되물었다.
“내가 불렀나요?”
그러고는 자기 얼굴을 자기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기웃했다.
“어휴 내가 취했나?”
그 사이에도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년비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엔 확실히 들었어. 연얼 군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가 남자의 목소리인지 여자의 목소리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목소리에 어감 자체가 없는 듯. 마치 돌을 깎아 만든 목소리 같았다.
이상해.
그 순간.
-천년비
다시 한번 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마지막으로 눈앞에 안개로 차오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정신이 흐릿해졌다.
* * *
녹색 휘장이 기둥과 지붕을 덮고 있고, 바닥은 모두 회백색 돌이었다.
황제는 중앙에 놓인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평소에는 그 좌우로 측근들이 서서 조언을 하거나 급한 서류를 먼저 올렸을 터이나 오늘은 달랐다.
책상 앞에는 흑합 장군 한 사람만이, 오른쪽 옆에는 측근 태감만이, 그리고 주위에는 늘 붙어 다니는 호위들만이 있었다.
“하명하신대로 조사하였으나, 수오부 군왕과 접촉한 무리는 연얼 군주 쪽과는 관련이 없었습니다.”
황제는 흑합 장군의 보고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하지만 혹시 모르니 시선을 떼지 말고 좀 더 지켜보라.”
“예, 폐하.”
수오부 군왕이 무림의 사특한 이들과 손을 잡고서 간교한 계략을 꾸미고 있단 걸 알게 된 후.
황제는 이복형제에게 몇 번이나 둘러 경고하였으나 군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황제는 측근 그림자를 보내 그를 직접 처단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 사특한 무림인들이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혹시 그 무림인들이 이번에는 군왕의 누이인 연얼 군주에게 접근하진 않나, 흑합에게 지켜보라 지시했다.
그 결과를 오늘 흑합 장군이 황제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 무림인들이 누구인지는 알아냈느냐?”
“이 부분은 정확하진 않습니다.”
“정확하지 않아도 좋다. 말하라. 감히 황가를 능멸하려 한 이들이 누구인지, 모든 가능성을 열고 조사해야 할 테니.”
“사하비단. 이런 이름을 가진 무림의 흑도 단체가 관련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황제는 손가락으로 툭 책상을 두드렸다.
“의외로군. 마교나 혈교 쪽일 거라 여겼는데.”
“예. 원래는 변방의 작은 무뢰배 무리였으나, 새로이 수장을 맞이한 후로 급부상 중이라 합니다.”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 단체에 대해 무어라고 말을 하려는 듯.
그러다가 그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휘장 아치문 너머로 어린 얼굴의 태감 한 명이 서성이는 게 눈에 들어와서였다.
어린 태감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와서 말하라.”
황제가 눈치채고서 부르자, 태감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우물거렸다.
“어서 오라!”
그 모습을 본 황제의 수석 태감이 꾸짖자, 어려 보이는 태감은 그제야 달려와 얼른 허리를 숙였다.
“송구하옵나이다, 폐하. 실은 천 귀인께서 쓰러졌단 보고를 들었는데, 이를 언제 말씀드려야 할지 곤란하여…….”
말을 다 잇기도 전에 황제가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