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태후와 독대하다
내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했나? 떡돌이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다가 물었다.
“황제보다 태후 마마께 더 잘 보이고 싶은가 봐?”
좀 삐진 투였다. 대답하기 곤란한 게 아니라, 대답하기 싫은 질문이었나 보다.
그래, 자기는 황제 내시다 이거지. 황제를 좀 더 신경써달라 이거지.
“응.”
하지만 난 황제의 내시가 아니다. 난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내 대답에 흠칫한 떡돌이는 곧 코웃음을 쳤다.
“머리 좀 굴리는데, 천 귀인.”
게다가 빈정거리기까지.
그래도 나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응.”
“의외로군. 넌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우두머리한텐 잘 보이는 게 나아. 그리고 우두머리가 아닌 사람들한테도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어.”
“정말 예상 밖인데. 넌 항상 네 멋대로 하잖아.”
“내가? 언제?”
“…….”
떡돌이가 왜 저렇게 기막히단 표정을 짓는진 모르겠지만, 진심이다. 난 여기서 평화를 지키고 싶다.
이 몸으로 들어오기 전 너무 많이 시달리기도 했고…… 지금은 내 몸을 지킬 만큼 강하지도 않으니. 그러려면 우두머리와 잘 지내야지.
“그래. 본인이 모르면 된 거지.”
뭐야 저 욕 같은 체념은?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떡돌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기분 나쁘게 빙긋 웃었다.
하지만 내가 항의하기 전에 제대로 대답은 해주었다.
“넌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된다.”
“물론 나 자체가 매력적이긴 한데. 태후 마마는 너랑 생각이 다를 수도 있잖아.”
“태후 마마는…….”
왜 저러지? 갑자기 떡돌이가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숙였다.
어딜 보나 했더니 발치에 난 버석한 풀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말을 안 하지? 의아해서 쳐다보았지만, 그래도 계속 풀만 보고 있는데…… 혹시?
“그 풀을 좋아하셔?”
“아니.”
대답은 빠르네.
“그럼?”
다시 재촉하자, 떡돌이는 마지못해 알려주었다.
“태후 마마는 자신을 잘 포장하는 사람에게 크게 데인 적이 있어.”
개원이 같은 놈한테?
갑작스럽게 태후에게 동질감이 느껴지네. 심심하니 시를 읊으라 할 때는 다른 세상 사람 같고, 되게 멀게 여겨졌는데.
“그러니 정말로, 너는 그냥 평소처럼 하면 돼. 넌 너일 때 가장 멋지니까.”
“!”
“왜 그래? 얼굴이 빨개졌는데?”
“아니. 별로.”
이번엔 내가 고개를 숙일 차례다.
내가 녀석의 말에 기습을 당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자, 떡돌이는 날 미심쩍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닌데. 얼굴이 많이 붉은데.”
그러고는 자기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이래?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말자.
승언이겠지. 승언이는 내가 떡돌이를 편하게 대하면 늘 저러고.
떡돌이는 내 손에 얼굴이 밀려나면서도 웃음을 터트리며 놀려댔다.
“뭐야 천 귀인. 이런 말을 좋아하나 봐?”
“천만에!”
“좋아하는 눈치인데?”
“아니야.”
“얼굴이 붉어졌잖아. 반응이 평소와 달라.”
“아니라고.”
“내가 너한테 반했다고 놀려대더니, 너야말로 나한테 반한 건 아닌가?”
“이런…… 고얀! 갈!”
아니라니까!
버럭 외치고서 씩씩거리고 있자니, 뒤늦게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떡돌이는 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너, 우리 아버지랑 말투가 똑같구나.”
이건 고수 말투다. 무림 고수쯤 되면 이런 말투를 사용해야 된다. 편하게 말하면 만만하게 본다고.
나는 민망해서 벌떡 일어났다.
사실, 떡돌이가 ‘나는 나일 때 가장 사랑스럽다’고 해서 좀 기분이 좋았다.
무림에서는 내가 숨만 쉬어도 그걸 못 견뎌하는 놈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런 놈들에게 쫓기면서 험한 소리를 듣다 보면, 가끔은 내 존재 자체가 문제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지.
떡돌이가 한 말은 그래서 좀 기분이 좋았다. 역시 내가 문제가 아니야, 그 새끼들이 문제였어, 이런 기분.
하지만 저렇게 낄낄 배를 잡고 넘어가는 걸 보니 열 받아!
잠시 들뜬 기분은 취소다.
* * *
긴장을 해도 시간은 잘만 흘러갔고 해는 오늘도 평소처럼 떠올랐다.
나는 평상시보다 좀 더 단정하게 차려입었고, 원웅은 거기에 최대한 솜씨를 발휘해서, 천소여의 우울한 인상을 화장으로 가려주었다.
“잘 하고 오세요, 소주!”
내가 처소를 나서기 전. 두 궁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서 응원했다.
뭘 잘하고 오란 건진 모르겠지만…….
“잘하고 올게!”
나도 똑같이 대답했다.
처소 밖으로 나가자 태후가 보낸 궁녀가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 서 있었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일반 다른 궁녀들보다 훨씬 위엄 있어 보이는 모습으로.
“이리로 오시지요, 천 귀인.”
그녀는 나를 보자 무덤덤한 얼굴로 인사했고, 돌아서서 앞서 걸어갔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그 뒤를 따라가며 한 번 심호흡했다.
“후!”
나답게 하자. 나답게.
엄청 잘 보이진 않아도 돼. 찍히지만 않을 정도면 괜찮아.
* * *
‘찍힌 건가.’
찬바람이 분다. 살얼음이 공기 중에 다닥다닥 껴 있으면 이런 분위기일 것 같은데.
무표정한 얼굴, 굳은 입매, 흔들림 없는 눈동자. 태후가 내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 눈치를 살피면서 나는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됐는지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취미가 뭐냐고 묻기에 운동이라 대답한 게 잘못이었나?
사서경전을 읽어보았냐고 묻기에 들어는 보았다고 대답한 게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후궁이 어떤 존재냐고 묻기에 깊게 생각해본 적 없다고 말한 거?
후궁들끼리 싸움이 붙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기에, 종목과 사유에 따라 다르다고 대답한 거?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길지 않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기에, 십 년 기다렸다 복수할 정도면 이미 군자가 아닌 것 같다고 대답한 거……?
황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기에, 기억을 잃어서 기억나는 게 없다고 대답한 게 문제였을지도.
젠장. 어떤 대답이 올바른 거고 어떤 대답이 잘못된 건지 알아야 판단을 하는데!
떡돌이가 솔직하게 대답하라 했잖아. 솔직하게 대답한 거라고…….
역시 ‘후궁이 어떤 존재냐’에 대한 대답이 문제였을까. 이건 좀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았으니.
그 순간.
“푸하하하!”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태후께서 갑자기 껄껄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왜 갑자기 저렇게 웃어대시지?
태후께선 이젠 아예 옥좌에 팔을 걸치고 어깨까지 떨며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듣던 그대로구나. 폐하께서 널 어여삐 여기는 이유를 알겠어.”
뭘 어떻게 들으셨기에……? 황제가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한 거야?
굉장히 신경쓰이는 말이었다.
“입궁하거나 관직에 오르면 다들 변하게 되지.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적건 많건 신분이 높건 낮건 모두 다. 어쩔 수 없단 건 안단다. 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거든. 살기 위해 변한 이들을 어찌 탓할까.”
그러나 사람을 혼란스럽게 해 놓고 태후께선 자기 할 말만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머리론 알면서도 가끔은 계략을 꾸미지 않는 맑은 사람이 그리워져. 천 귀인은 그런 사람이로구나.”
어쨌든 결론은 태후께선 내가 마음에 드신단 건가? 그러면 된 건가?
떨떠름하게 쳐다보자, 태후께서는 중얼거리면서 아예 고개까지 끄덕거렸다.
“그래, 고궐 같은 놈보다 네가 훨씬 낫지. 맹한 게 나아.”
들릴 들 말 듯한 소리지만 들었다.
이번에도 신경 쓰이는 부분이 두 개 있네.
고궐이 누구지? 남자 같은데. 설마…… 황제가 승언이 전에 총애한 사내인가?
그리고 맹한 게 낫다는 건, 나더러 맹하다고 하신 건가? 난 맹하지 않은데.
제갈세가 자식들처럼 머리를 팽팽 굴리진 못하지만, 그래도 내가 맹하단 소리 들을 정도는 아니지 않나?
“예쁘기도 하지.”
흠흠흠. 그래도 나쁜 뜻으로 한 말씀은 아닌 듯하니 뭐.
게다가 태후 마마 좀 봐. 눈에서 꿀 떨어지겠다. 내가 되게 좋으신가 봐.
쳐다보고서 같이 히히 웃자 어째서인지 또 껄껄 좋아하시고.
황제도 그렇고 떡돌이도 그렇고, 연얼 군주랑도 친구가 됐는데 이제는 태후 마마까지!
나는 혹시 황궁 사람들이 좋아하는 유형일까?
그사이 식사가 끝났다. 이제 돌아가야 하나?
나는 좀 아쉬워서 태후 마마를 힐긋거렸다.
몇 시진 전만 해도 오기 싫어 끙끙거린 주제에 할 행동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
난 날 향해 저렇게 눈으로 ‘어유 예뻐라’ 하고 표현해주는 사람은 처음 봤는걸.
황제는 날 좋아한다고 말은 하지만 면사로 맨날 제 눈 가리고 있고.
떡돌이는 날 연모하는 게 분명한데 애가 가끔 눈이 이상해.
그래서 태후 마마가 저렇게 ‘이뻐이뻐’ 하고 봐주시니 좋았다.
봐봐. 눈이 마주치니까 같이 웃어주시잖아.
“관어국에서 아주 맛있는 산딸기를 보내왔는데. 먹고 가련?”
산딸기까지!
“네!”
먹을 걸 챙겨주시다니! 태후 마마는 정말로 내가 좋으신가 봐!
* * *
“천 귀인. 너…… 먹을 거 주면 다 좋아하는 건 아니지?”
다음날, 떡돌이에게 태후 마마가 날 무지 좋아하는 눈치라고 자랑하자, 그는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아니 이 내시가 말이야, 사람을 어떻게 보고!
“아니야. 그랬다면 난 널 좋아했을 텐데, 아니잖아.”
사람을 돼지로 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퉁명스럽게 맞받아치자, 떡돌이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이래, 천 귀인. 너도 날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누가 그래? 내가 너 좋아한다고?”
“네 표정이.”
“아니거든!”
내가 단호하게 소리치자 떡돌이는 더더욱 충격받은 표정으로 자기 가슴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진심은 아닐 거다. 말은 저래도 입이 웃고 있잖아.
“아, 맞아. 떡돌아. 넌 궁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많이 알지?”
태후 마마 일은 잘 해결됐고. 떡돌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 잘됐다. 방금 생각났어.
사실은 꼭 떡돌이에게 묻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별달리 물어볼 사람이 없고…… 내시들은 정보에 빠삭하다니까.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무림에선 다들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떡돌이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내가 왜 궁 안 정보에 빠삭할 거라 생각하지?”
넌 내시니까?
너무 편견인가? 내시라도 정보에 빠삭하지 않을 수 있나?
하지만 편견인지 아닌지 확인해볼 수도 없는걸. 상대는 자기가 내시란 걸 감추고 싶어 하니.
적당히 둘러대자.
“넌 뱁새 닮았잖아.”
“욕?”
“칭찬인데.”
“아무리 들어도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속담이 생각나는 욕인데.”
“아니야. 난 얼굴 보고 한 말이야. 넌 얼굴이 뱁새 닮았어. 그래서 뭔가 정보에 빠삭할 것 같아.”
떡돌이는 수긍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상관없다. 그냥 둘러대려고 한 말이니까.
“어쨌든 정보에 빠삭한 뱁돌아. 물어볼 게 있는데.”
“자연스럽게 별명 바꾸지 말지?”
“흑합 장군이랑 염 귀인은 무슨 사이야?”
“흑합? 염 귀인? 두 사람은 갑자기 왜?”
떡돌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뜬금없이 여기서 그 두 사람 이름이 왜 나오냐는 표정.
쟤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나는 연얼 군주가 염 귀인과 흑합 장군 이야기를 해준 후부터 내내 궁금했다.
“며칠 전에 염 귀인이 내관 시체 발견한 일로 누명 썼을 때. 혼자는 못 죽겠다면서 날 끌어당겼잖아?”
“…….”
“나랑 접점도 없는 사람이 왜 그딴 짓을 한 건가, 엄청 화났거든. 근데 연얼 군주께서 그러더라고. 흑합 장군 때문이래.”
흑합의 이름을 사칭한 적이 있어서 찔리나. 떡돌이가 손가락을 움찔한다.
그 반응을 모른 척해주고서, 나는 질문을 마무리 지었다.
“사람들은 나랑 흑합 장군이 친하다고 생각하잖아. 네가 흑합 장군 이름을 사칭하는 바람에. 아무래도 그거랑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일 때문인지 알아?”
* * *
염 귀인은 앞에 선 수상쩍기 그지없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흑합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다가 소개받은 자였다.
비원. 이자를 소개해 준 사람은, 이 수상한 사람의 별호가 ‘비원’이라고 했다.
신통한 방법을 이용해 사람의 어두운 소원을 들어주기로 유명한 인물이라고.
소개해 준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라 결국 만나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좀 불안했다.
게다가 궁전 안에서 만나는 것인지라 불안감은 한층 더했다.
“그래. 소원이 있으시다고.”
주춤거리면서 너무 시간을 끈다고 생각했나. 마침내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염 귀인은 주춤했다. 상대의 목소리는 깊은 동굴 안쪽에서 내는 듯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특이한 목소리. 어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도 목소리를 듣는다면 바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면 황궁 사람은 아닌가? 이런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행동해도 누구에게든 정체가 들킬 테니?
하지만 황궁 사람이 아닌데도 이 밤중에 깊은 동쪽 구역까지 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싹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염 귀인은 지금 공포심보다 복수심이 더 컸다.
“흑합 장군에게 복수하고 싶다.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흑합 장군은 무술 솜씨가 대단하고 휘하에도 용맹한 장수들이 많아. 그런데 가능하다고?”
“신분이 높은 분에겐 그 나름의 처방이 있으니까요.”
“귀인 천소여도 함께.”
“그러지요.”
공포란 특이하게도 오히려 정면에서 마주 보면 점점 크기가 작아지고 만다.
염 귀인도 그랬다. 입 밖으로 복수 이야기를 꺼내자 한결 불안한 마음이 가셨다.
염 귀인은 아까보다 한결 차분하게 물었다.
“얼마면 되지?”
그러나 내내 순순히 대답하던 상대가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듣고 오셨을 텐데요. 전 돈으로 값을 받지 않습니다.”
듣긴 했지만…… 염 귀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뭘 원하지?”
상대는 커다란 소매 안에서 천을 꺼냈다. 무언가를 똘똘 말아둔 흑색 천이었다.
“이것을 환한 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는 곳에 묻어주십시오. ‘천년비영혼진쾌도래’라 쓴 종이와 함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