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짝사랑으로 타협을 봤다
내가 후궁으로 부활한 걸 알고 저렇게 말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천 귀인의 몸에 들어온 것처럼, 다른 사람의 영혼도 내 진짜 몸에 들어왔나?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 내 이름을 사칭……?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다. 나는 긴장해서 사자 친왕을 노려보았다.
“별로 표정이 안 좋으시네. 천 귀인께선 천년비를 싫어하시나 보군요.”
이런. 너무 노려봤구나.
“죽었단 얘긴 들었는데. 부활했단 얘긴 처음 들어서.”
나는 일단 모른 척 물었다.
하지만 만약 사자 친왕이 내가 천년비란 걸 알고서 저러는 거라면…….
‘죽인다.’
나는 내공 없이 사용하는 무공 천수비를 펼치기 위해 한 손을 등 뒤로 보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접었다.
비밀을 지키는 가장 깨끗한 방법은 역시 목을 따는 거지. 그런데 궁궐 내에서 친왕을 살해해도 괜찮나?
괜찮을 거야. 난 죽었다 깨어난 연약한 후궁 몸이잖아? 맨손으로 사자 친왕을 죽였다고 누가 생각하겠어. 암.
“흑도단체 사하비단이 천년비를 구하고, 그게 인연이 되어 손을 잡았다더군요. 그런데 손은 왜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천 귀인?”
“등 긁으려고요.”
사자 친왕의 대답을 듣고서 나는 손을 도로 원위치시켰다. 손가락에 힘도 풀었다.
다행이었다. 사자 친왕은 내가 천년비라는 걸 모르고 있어.
이름을 사칭한 천년비가 나타난 건지, 내 몸을 차지한 천년비가 있는 건지는 사자 친왕이 한 말만으론 알 수 없지만.
일단 사자 친왕이 나에 대해 알고서 저런 말을 한 건 분명 아니다.
그보다 사하비단이라니? 사하비단이라면 분명……?
‘그 또라이 변태가 이끄는 집단 아냐?’
날 사칭한 사람이 누구든 미친 거 아냐? 하필 손을 잡아도 그 또라이 변태랑?
“천 귀인?”
아차. 이번엔 또 너무 오래 멍하니 있었나 보다. 내가 얼른 벌어져 있던 입을 닫자, 사자 친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놀랍습니까?”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단 것도 놀랍고요. 천년비……인가 하는 그 사람은, 아니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요, 그 뭐야. 독불장군이라 들었는데요. 혼자서 활동하는. 그런데 사하…… 뭔가 하는 집단이랑 손을 잡았다고 하니까 좀 놀라서요.”
“사하비단입니다.”
“사하비단.”
“천 귀인은 무림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군요?”
“내가 무림에 대해 알 일이 뭐가 있겠어요. 곱게 컸는데.”
그런데 곱게 큰 분들이 자기 입으로 곱게 컸단 말을 하긴 하나? 모르겠다. 다행히 사자 친왕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눈치지만.
“그건 그렇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하지만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면 변한다지 않습니까. 심경에 변화가 온 거겠죠. 어쨌든 천년비와 사하비단이 손을 잡고 정영검 개원에게 복수를 통보했다니, 앞으로 일이 재밌어질 겁니다.”
정말로 무림 얘기를 좋아하는구나. 눈에서 빛이 나네, 빛이 나. 즐거워 보인다. 듣는 나는 하나도 안 즐겁지만.
세상에. 가짜 내가 나타난 거로도 모자라, 가짜가 내 복수까지 다짐했다고? 대체 무슨 일이야?
* * *
사하비단. 부활한 천년비. 복수. 이 일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
그러려면 궐 밖으로 나가야 했다. 궁궐 안에서 무림 사정을 알기는 힘드니까.
하지만…… 나는 후궁전 가장 외벽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어 살펴 보았다. 높은 담벼락이 쭉 펼쳐져 있었다.
여길 빠져나간다? 턱도 없겠군.
궁궐에서 밖으로 나가는 외벽은 후궁전 외벽보다 훨씬 높을 텐데.
여기 벽만 해도 무공 없이 뛰어넘어갈 높이가 아닌걸.
내공 없이 사용하는 무공 천수비가 있지만 그건 경공이 아니었다.
위급 상황을 대비한 일격필살이자 비장의 한 수이지. 경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천수비를 이용해서 궐을 나갈 수는 없다.
정보를 얻으려면 수도라도 둘러보고, 하오문이든 개방이든, 정보를 취급하는 무림인을 만나야 하는데.
‘젠장.’
그렇지만 이 몸으로는 궐 밖으로 나가지조차 못하고…… 어쩌지?
“뭐 하세요, 소주?”
내가 담벼락 끝을 향해 손을 뻗고 있자, 원웅이 되게 이상하게 보였나 보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불렀다.
나는 얼른 손을 내렸다.
“아니야. 그냥 담벼락이 얼마나 높은지 보고 싶어서.”
“그런 걸 알아서 뭣하게요. 얼른 가서 점심 드세요, 소주.”
“응…….”
어차피 여기에 더 있어 봐야 좋은 생각이 떠오르진 않지. 난 원웅을 따라 순순히 처소로 돌아갔다.
하지만 머리는 계속 굴렸다. 방법을 찾아. 방법을 찾아야 돼.
내가 이 몸으로 살려고 결심한 건 천소여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약 천소여가 살아 있고 우리 둘이 몸이 바뀐 거라면, 만나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해 보아야겠지.
만약 천소여는 이미 죽었고 내 몸에 엉뚱한 사람이 들어온 거라면…… 뭐. 천소여의 몸을 차지한 내가 뭐라 뭐라 하겠어.
그냥 걔는 그 몸으로 살게 두고 나는 이 몸으로 사는 거지.
하지만 그런 사정 없이 멀쩡한 사람이 내 이름을 사칭해 이용하는 거라면……!
“모가지를 똑 따 주겠어.”
“예? 소주, 저요?”
“아니, 아니야.”
그러려면 일단 무공을 찾아야 된다. 하지만 어떻게? 여기엔 무공을 훈련할 만한 적당한 장소도 없는걸.
젠장. 그러고보니 떡돌이! 떡돌이한테 청적 외에 한적한 장소가 있는지 물어보려던 참이었잖아?
사자 친왕이 이상한 말을 해서 다 잊어버렸지만.
하지만 방금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굳이 떡돌이한테 부탁할 필요가 있나? 황제한테 부탁하자.
그는 내가 좋다 했잖아?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찾아달라고 하면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천만금이나 금은보화를 달란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명색이 황제인데? 암. 그럴 거야.
“원웅!”
“예, 소주.”
“폐하를 뵈려면 어디로 가야 돼?”
“예? 폐하요? 먼저 찾아가시려구요?”
* * *
그 시각.
황제는 사자 친왕과 마주 보고 앉아 다과를 먹고 있었다.
천 귀인에게 마음을 고백했단 이야기를 막 끝낸 참이었다.
사자 친왕은 이야기를 다 들은 후 혀를 차며 감탄했다.
“혼자 연모할 테니 그쪽은 연모하지 말라 하셨다고요. 대단합니다, 폐하. 정이 떨어져서라도 이젠 정말 폐하를 받아들이지 않겠군요. 거기까지 계산하신 겁니까?“
“정이 떨어지다니? 천 귀인이? 짐에게? 설마.”
사자 친왕의 말에 황제가 웃었다. 안 믿는 투였다.
“정말입니다, 폐하. 그런 말을 듣고서 정 안 떨어질 사람은 없어요.”
사자 친왕이 거듭 말했으나 황제는 쓰게 웃기만 했다. 그 모습에 친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떡돌이니 하는 이상한 이름으로 이중 연애나 하시고. 이게 무업니까, 대체.”
“용포를 입고 있으면 의심하고 의심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지. 상대의 잘못이 아니야. 이 옷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하지만 떡돌이일 때에는 그게 아니니까.”
“결국 진실은 밝혀질 거고, 사랑놀이는 깨어지기 마련입니다. 정말로 짝사랑으로 만족하시겠습니까?”
“난 사람도 사랑도 믿지 않아. 이 정도 거리가 좋다.”
단호한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사자 친왕은 혀를 끌끌 찼다. 그도 자신의 이복동생이 왜 저러는지는 알았다. 알고 있지만…….
백명의 사람이 있으면 각각 다 다를 텐데. 지레 겁을 먹고 마음을 닫아버리니 안타까웠다.
황제는 다시 중얼거렸다.
“이 거리가 좋다. 이 거리에 있으면 천 귀인이 가문, 권력, 부귀, 영화, 어떤 걸 사랑으로 포장하든 상처받지 않을 수 있으니.”
“그러다 천 귀인이 대놓고 폐하를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정도로 여기면 어쩌시려고요.”
“설마 대놓고 뭘 요구하고 그러겠느냐.”
* * *
여기저기 물어보니 황제는 심궁에 있다고 했다.
‘심궁이라니.’
심궁은 황궁 지도 딱 중앙에 있는 건물인데. 토론이나 회의 등 말 그대로 황제가 정무를 보고 대신들이 나랏일을 하는 곳.
“거기 가도 돼?”
측근 궁녀인 원웅에게 묻자, 원웅은 자기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주의사항에 가지 말란 이야기는 없었지만…… 굳이 찾아가는 사람은 없는 거로 알고 있어요, 소주.”
또다른 측근 궁녀인 부성은 옆에서 다른 의견을 내밀었다.
“오늘도 폐하께서 소주를 시침에 부를지도 모르잖아요. 차라리 그때 뵙고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폐하가 오늘도 날 부를지 안 부를지 어떻게 알고.”
“어제 꽃다발까지 주셨는데도요?”
꽃다발을 주면서 한 말이 꺼림칙하니 그러지.
“일단 가보지 뭐.”
가다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후궁이 들어가도 되는 곳인지 아닌지. 안 되면 들어오지 말라 막을 거 아냐.
마음을 먹자마자 나는 후궁전을 나가 심궁 구역까지 걸어갔다.
황제가 내 호위를 하라며 보내준 태감 귀자가 함께 가기에 길을 찾는 게 어렵진 않았다.
마침내 거대한 심궁 건물 앞에 도착하자, 와. 관리들 시선이 장난 아닌데?
“황제 폐하께서는 어디 계신가?”
그래도 다행인 건 물어보면 다들 위치를 알려주긴 했다는 거.
그렇게 묻고 물어서 황제가 머물고 있다는 휴게실 앞으로 가자, 황제의 태감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다들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중 한 명은 아예 내게 다가와 물었다.
“천 소주, 여기엔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폐하를 뵙고 싶어서 왔는데. 봬도 되나?”
태감은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않은 채 귀자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둘이 눈짓을 주고받다가, 한숨을 내쉬고서 돌아서서 방을 향해 고했다.
“폐하. 천 귀인님께서 폐하를 찾습니다.”
대답 대신 안에서 짤랑 방울 흔드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시랍니다.”
방울 소리가 허락한다는 뜻이구나.
그래도 바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야.
후궁은 못 들어가는 곳이라고 막아선다면 순순히 돌아설 생각이긴 했지만, 별개로 기분은 상했을 테니까.
태감 둘이 문을 양옆에서 잡고 열어주었고, 나는 그 사이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아치문에 휘장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어서, 덩굴 치우듯 그 휘장도 치우면서 들어갔다.
그러자 안쪽에 커다란 방석을 깔아둔 황제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희한하게도 탁자는 보이지 않고, 커다란 방석만 여기저기 놓여 있다. 이국적으로 꾸민 건가?
황제의 앞에 찻잔 두 개가 있는 거로 보아서, 나 이전에 다녀간 손님도 있는 모양이고.
“제가 바쁜데 찾아왔습니까?”
혹시 다른 일이 있는데 내가 방해했나 싶어서 묻자, 황제는 아니라고 대답하더니 앉으라며 맞은편 방석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가서 치마를 펼치고 앉자, 황제가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 아느냐? 여기까지 온 건 태후마마와 황후뿐. 후궁은 네가 처음이다.”
“아 그래요?”
“그래.”
“그렇구나.”
“?”
“왜요?”
“그게 다냐?”
“뭐 다른 반응이 필요합니까?”
그런데 내가 오기 전에 뭔 일이 있었나?
별말을 나누지도 않았는데. 황제가 입술을 꾹 다문다. 꾹 닫힌 입에서 심술이 묻어났다. 뭐 어쩌란 거야?
왜 저러나 싶어 물끄러미 쳐다보자 시선이 부담스러운가. 황제는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느냐?”
“맞아. 폐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아니 왜 자꾸 저래? 황제가 다시 입술을 다물었다.
차이점이 있긴 했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심술궂은 느낌이 없다는 거. 면사를 거두면 아마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 보일 것이다.
“아 또 왜요.”
물어보지만 이번에는 툴툴대지도 않았다. 그저 웃는데. 그 미소가 아파 보일 뿐.
“무슨 부탁이지? 말해보거라. 우리 천 귀인 부탁이라면 모두 들어주어야지.”
목소리는 다정한데도.
“폐하. 사람들이 안 오는 조용하고 외진, 외지진 않아도 되는데 하여튼 조용하고 넓은 공간 없을까요? 청적 같은데요.”
왜 저러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말하라니 말하자.
그런데 내가 뭔 말을 했다고? 황제는 차를 마시려다가 찻잔을 도로 내려놓으면서 황당하단 투로 물었다.
“넌 그게 부탁이냐?”
“그런 데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거기까지가 부탁입니다. 이왕이면 그런 장소에 저 외엔 아무도 못 오게 해주시면 더 좋고요.”
이번엔 또 왜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황제가 갑자기 한 손으로 자기 입을 가렸다.
면사 때문에 드러난 부분이 입뿐인데. 그 입조차 가리니 얼굴이 다 가려졌다.
어쨌든 굳이 입을 가린 채, 황제는 놀라워하는 투로 물었다.
“짐과 단둘만 있고 싶어서 그러하냐?”
“무슨 소리에요, 폐하도 없어야 아무도 없는 거죠.”
어어? 황제가 이번에는 손을 확 입에서 떼는데, 다시 심술보 가득한 입 모양으로 돌아왔다.
아니 대체 왜? 왜 오늘따라 저렇게 변덕이 죽 끓듯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