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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1화 (21/283)

##  21화. 진실을 말해줘

내가 손바닥 위에 자기를 올려두고 기만하기라도 한 양, 기몽 장군이 나를 피곤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치 백 년 동안 쉬지 못하고 당직을 선 표정이네.

하긴. 타고나길 재수 없어서 그렇지, 저놈이 뭔 죄를 저지르고 그런 건 아니지.

저 사람은 그냥 자기 할 일을 하려는데 자꾸 방해받으니 싫을 만도 하다.

죄가 없는 내 입장에선 저놈한테 들들 볶이는 게 괴롭지만, 저놈은 나한테 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있잖아? 그걸 알아내고 싶은 거고.

어쨌든 일단 고개를 저어서, 이 일이 내가 한 짓이 아니란 표시를 했다.

나도 모르는 일이야. 내가 쪽지를 전한 건 폐하가 아닌걸.

이 시기에 딱 폐하가 사람을 보낸 것도 절대로 내 탓이 아니지. 암.

하지만 소용없었다.

“이렇게 또.”

아무리 봐도 억지로 짓는 미소가 이미 기몽 장군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으니.

“제 품을 떠나시다니.”

“그러네요. 자꾸 그렇게 되네요.”

“이렇게 자꾸 도망 다니시면, 제가 정말 졸졸 쫓아다니게 될 텐데요.”

그러진 마시고…….

* * *

밖으로 나오니 자유의 공기가 아주 좋구나.

상쾌함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두 팔을 뻗자, 수사청 관리 몇 명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어쩌면 ‘저 후궁은 올 때마다 쏙쏙 빠져나가는구만?’ 하고 생각하는지도.

뭐 어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자 관리들은 바로바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처소로 돌아갔다.

“소주!”

처소로 돌아가자 울타리 안에서 초조하게 돌아다니던 원웅과 부성은 울먹이면서 나를 불렀다.

마치 죽으러 간 사람이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죽으러 갔던 건 아니지만 괜히 반가워져서 나도 얼른 그곳으로 달려갔고,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서 펄쩍펄쩍 뛰었다.

나중에야 어색해져서 다시 손을 내렸지만. 생각해보니 내가 얘네랑 이럴 만큼 친하진 않은데. 민망하구먼.

“괜찮으세요?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요?”

“염 귀인이 소주를 어쩌구 했다던데, 진짜인가요?”

“응. 들어가서 얘기해줄게.”

나는 얼른 원웅을 데리고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부성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그렇게 셋이서 방 안에 모여 앉아서 얘기를 나누자, 연얼 군주와 염 귀인에 관해 들은 원웅은 펄쩍 뛰면서 씩씩거렸다.

“아 진짜 너무들 하네! 왜 자꾸 소주를 들들 볶는 거래요?”

부성도 고개를 기웃했다.

“그러게요. 군주 전하는…… 그분도 너무하시지만 그래도 가족이 죽었으니 범인을 잡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렇다 쳐도. 염 귀인은 왜 자꾸 소주에게 못된 짓을 하시는 걸까요?”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알까. 나도 궁금하다. 걔가 왜 그러는지.

편지 사건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

편지 사건이, 그래. 그것도 열 받지만 그건 내 손으로 쓰기라도 했지. 이건 대체 뭐냐고.

“흑합 때문이다.”

깜짝이야. 누구지? 우리가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뚫고 문밖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여자 목소리인데?

내가 눈짓하자 부성이 얼른 문을 열고 나갔다.

“군주전하!”

이윽고 그녀가 버럭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군주? 연얼 군주?

나와 원웅도 깜짝 놀라서 나갔다.

세상에. 정말로 연얼 군주가 뒷짐을 진 채 사립문 너머에 서 있었다.

아이고 내 빈약한 처소…… 벽이 얼마나 얇은 거냐. 방 안에서 나누는 대화가 저기까지 다 들리는가 봐.

“군주 전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부성과 원웅이 황급히 인사를 올리자, 연얼 군주는 고개를 끄덕여 내 궁녀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러고는 턱으로 내 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천 귀인. 얘기 좀 하지요.”

별로 얘기하고 싶진 않지만…… 감히 군주를 쫓아낼 권력은 말단 후궁에게 없겠지?

어쩔 수 없이 나는 연얼 군주와 둘이서 내 방에 들어갔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대신 문을 닫자마자 바로 볼일을 물었다. 솔직히 불편한 사이인데. 오래 같이 있고 싶진 않아서.

아, 그러고보니 아까 밖에서 흑합이 어쩌고 저쩌고 하지 않았나?

“염 귀인이 천 귀인에게 그러는 이유는 흑합 장군 때문이에요. 두 사람 사이에 관해서는 직접 조사해 보도록.”

“예?”

“그 정도 정보력도 없이,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살아남을 정도로 여긴 만만한 곳이 아니니까.”

무슨 소리야?

“그걸 얘기해주러 오신 건가요? 몇 시진 전에, 제가 수사청에 있을 때는 궁녀를 보내서 협박하시더니요.”

“협박이 아니라 거래를 청한 거죠.”

그 상황에서 그게 거래로 들리겠냐…… 황당해하고 있자니 연얼 군주가 다시 물었다.

“아직도 마음이 바뀌지 않았나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진짜로 아는 게 없어서요.”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나 이 말 몇 번 반복해야 하는 거지?

그때였다. 연얼 군주가 무거운 목소리로, 목소리보다 더 무거운 화제를 꺼냈다.

“부모님이 암살당한 후 오라비와 난 둘이서 의지하면서 지냈습니다. 내게는 오라비가 형제이자 부모이고, 내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더니 그녀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놀랐다. 엄청나게 놀랐다. 세상에 군주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

“왜 이러세요!”

나는 당황해서 얼른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연얼 군주는 일어나는 대신 애원했다.

“천 귀인! 제발 아는 게 있다면 말해줘요. 정말, 정말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까. 제발.”

그 결연한 태도에 괜히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결국, 머뭇거리다가 나도 그녀와 마주 보게 무릎을 꿇었다. 시선이 맞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 들어봐.

“전하. 제가 말이에요, 절대로 전하를 기만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정말로 본 거라곤 지붕을 뛰어다니던 흑색 무복 밖에 없어요. 심지어 거리도 멀리 있었고, 그조차 뒷모습이었지요. 전하. 전 말 위에서 천 리 밖의 독수리 눈알까지 본다는 유명한 기마민족 출신이 아니에요. 그냥 좋은 집안에서 잘 태어나서 잘 자란 사람이라고요. 아는 게 있다면 저도 차라리 빨리 말해서 털어버렸을걸요.”

“!”

“제가 전하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말을 안 하고 버티겠습니까.”

“복잡한 일에 얽히기 싫어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제겐 더 복잡한 일이에요. 이미 얽혔어요. 기몽 장군이 눈에 불을 켜고서 맨날 절 노린다고요. 전 정말로 알려드릴 게 없어서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전하.”

구구절절한 설명이 이번엔 통한 걸까? 군주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뿌옇게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나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허탈하고 막막해서 저러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내게 매달린 이유는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어서였겠지.

그런데 내가 아니라고 거듭 말하자 이제야 슬픔과 절망이 밀려드는 모양이었다.

어쩌지?

설마 울 줄은 몰랐는데. 당황해서 쩔쩔매다가 나는 어색하게 그녀를 같이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고귀한 분이니 저리 꺼지라고 밀면 어쩌나 싶었는데. 군주는 그냥 조용히 계속 흐느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군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제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안 그래도 팔이 좀 아팠던 참이라, 나는 얼른 손을 내렸다.

그러고서 어색하게 뒤로 물러나자, 이번에는 군주가 헛기침을 했다.

곧이어 찾아온 정적은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다행히 문밖에서 들려온 원웅의 목소리가 민망한 적막을 깨주었다.

“소주, 경사방에서 태감이 왔습니다!“

* * *

“이번에야말로 폐하를 완전히 홀려야 해요, 소주!”

“폐하께서 다른 사람들한텐 눈길조차 주지 않도록 하셔야 해요, 소주!”

간만에 경사방 태감이 찾아와서 원웅과 부성은 굉장히 들떴다.

두 사람은 도끼눈을 뜨고서 내게 신신당부했다.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따뜻한 물로 목욕을 도와주고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해주고 공들여 치장도 해주었다.

황제가 승언이를 좋아한단 걸 아는 나로서는 두 사람의 노력이 헛되게만 보였지만.

그래도 저렇게 들떠 있는데 나서서 초 칠 필요는 없지. 적당히 따라주자.

그렇게 몇 시간에 걸쳐서 평소 이상으로 공들여 가꾼 후. 나는 간만에 이불말이 상태로 황제의 침방에 옮겨졌다.

난 이번에도 황제는 당연히 방 안에 없을 거라 여겼다.

보통 내가 먼저 운반되고 이후에 황제가 나타났으니까.

그런데 웬일이야.

“운반되는 모습을 보니 더욱 우습구나, 계란말이.”

오늘은 황제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머리카락이 촉촉한 것이, 아무래도 씻고 온 모양인데.

왜 씻고 온 거야? 아니, 자기 전에 씻는 건 당연하지만.

어쨌든 황제는 웬일인지 직접 다가와서 태감에게 나를 받아 안기까지 해주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닌가 보다. 경사방 태감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걸 보니.

태감이 나가고 방 안에 안 둘만 남게 된 후. 황제는 나를 침상 안쪽에 놓아주었고, 자기도 내 옆에 누웠다.

나는 어색하게 그를 쳐다보고만 있다가 감사를 전했다.

“또 빼내 줘서 고맙습니다.”

“너처럼 자주 사고치고 다니는 후궁은 세상에 없을 거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그럴 리가. 하지만 기몽의 손아귀에서 날 구해주었으니 일단은 비위를 맞춰주자.

“암요 암요, 전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소중한 존재지요.”

“칭찬이 아니야.”

나도 비위 맞춘 것뿐이거든?

“?”

그런데 왜 저러지? 황제가 더 할 말이 있나?

내 쪽을 힐긋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괜히 딴청을 피우고.

그러다 또 나를 힐긋 보더니, 눈이 마주치면 또 딴청을 피운다.

“하나도 안 귀여우신데요.”

심히 부담스러워서 타박하자, 황제는 나를 한 바퀴 굴려서 더 안쪽으로 밀어 버렸다.

이 인간이 진짜 유치하게!

“이럴 땐 ‘할 말이 뭐냐’고 묻도록 하라, 천 귀인.”

“할 말이 뭐냐.”

“…….”

화났나 봐. 또 한 바퀴를 더 굴려버리네?

젠장. 여기서 두 번만 더 굴러갔다간 벽이랑 마주 보고 자게 생겼어!

“아 좀 하지 마십시오!”

“나한테 할 말 없느냐.”

“진짜로 하지 마십시오!”

“그거 말고.”

“원하는 말만 듣고 살 수는 없으니, 사람이 말을 하면 들으십시오!”

큰일이다. 황제가 또 한 바퀴를 더 굴려서 밀어냈다. 이젠 진짜 딱 한 바퀴만 더 구르면 벽이다.

그나마 날 침상 안쪽에 두어서 다행이지. 내가 바깥쪽이었더라면 계란말이 상태로 뚝 떨어졌겠어.

어쨌든 이제는 말을 조심해야지. 입을 다물고서 눈치를 보자, 황제가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내가 쪽지에 대해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아.”

“아? 아예 생각도 안 한 모양이구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혹시 제 쪽지, 보셨습니까?”

황제가 청적에서 나가는 걸 본 다음 떡돌이에게 편지를 써서 바위 밑에 숨겨두었는데.

혹시 저 황제, 나가는 척했다가 다시 돌아와서 뒤진 거 아냐?

내가 받은 쪽지를 떡돌이가 아니라 황제가 썼다거나……?

몹시 의심스럽다. 내가 가자미눈을 뜨고서 쳐다보자, 황제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내가 널 구한 건 너와 쪽지를 주고받는 사람이 내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예?”

“네게 그 쪽지를 쓴 사람이, 네가 오해받는 걸 원치 않으니 구해달라 했다 하였다.”

“정말요? 떡돌이가요?”

“그래.”

세상에. 떡돌이가 흑합 장군뿐만 아니라 황제와도 아는 사이였어?

심지어 황제는, 떡돌이가 부탁을 하니까 그걸 들어주는 사이였어?

“못 믿겠느냐?”

너무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자, 황제가 내게 가볍게 웃으면서 놀리듯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못 믿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떡돌이가 폐하와 친분이 깊어 보이니 신기해서요.”

“그게 그렇게 신기한가?”

신기하지.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흑합 장군의 이름을 사칭할 정도면 떡돌이도 직급이 낮은 내관은 아닐 텐데.

당연히 황제와 친분이 있을 수도 있지.

어쩌면 황제의 내관일 수도 있고. 아니, ‘어쩌면이 아니야.

떡돌이는 분명 황제의 내관이다. 황제에게 부탁해서 날 빼내올 정도면 분명 황제의 내관이야.

게다가 승언이랑 내내 붙어 다니는 거 봐.

’내가 오다가다 본 허리 굽히고 있는 태관들 중에 떡돌이가 있었을지도…….‘

그때. 갑자기 황제의 얼굴이 코앞으로 훅 다가왔다.

나는 놀라서 주춤 고개를 뒤로 약간 뺐다.

황제는 잠자리에서도 면사를 쓰고 있고, 지금도 면사로 얼굴을 덮고 있다.

그러니 그의 생김새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단지 갑작스럽게 면상을 들이대니 놀랐을 뿐.

“왜요?”

그래도 애써 태연한 척 묻자, 면사 아래로 드러난 입술이 부드럽게 호를 그렸다.

“이제 어쩌지?”

“뭐가요? 그리고 얼굴 좀 치워 주시면 안 됩니까?”

“내 총애를 받고 싶지 않다더니. 일이 이렇게 되어버려서 곤란하겠구나?”

“제가요?”

“다들 천 귀인이 황제의 총애를 다시 차지했다고 수군거릴 텐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야…… 근데 얼굴은 언제 치워 주실 건지요?”

면사를 덮고 있다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 마주하고 말하자니 좀 민망한데.

만약 계란말이 상태가 아니었다면 더 민망했을 거다.

이럴 땐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어떤 자세로 있어야 할지도 막막했을 테니.

다행히 황제는 내가 몇 번이나 부담스럽다고 하자 얼굴을 치워 주었다.

그가 움직일 때 슬쩍 바람이 일면서 그린 듯한 턱선을 잠시 드러냈다 감추었다.

얼핏 봐도 잘생겼는데. 왜 항상 저 면사로 얼굴을 덮어 둘까? 너무 잘생겨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 얼굴에 홀릴까 봐?

황제는 원래 자리에 돌아가 자기 베개를 베고 누운 다음, 내 쪽을 향해 돌아누우며 물었다.

“그래. 대답은?”

“무슨 대답이요?”

“사람들이 다시 널 주목할 텐데, 괜찮겠냐고.”

“아 그건…….”

대답하기 어려운 건 아닌데. 왜 자꾸 저런 걸 묻지?

그러고보니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하지 않았나? 이상하게 저 질문에 집착하네.

“왜 자꾸 그걸 물어보세요?”

궁금해서, 대답하지 않고 반대로 나도 같이 물었다.

황제가 여기에 대답하지 않으면 나도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대답이 얼마나 간단한 것이든.

의외로 황제는 바로 대답했다.

“난 널 계속 부르고 싶은데. 네가 사람들이 신경 쓰인다고 하니 난 네가 신경이 쓰여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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