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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20화 (20/283)

##  20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책을 나갔다가 시체를 발견했는데.

시체를 발견했단 이유만으로 범인이란 의심을 샀다. 이렇게 어이없는 경우가 있을까?

염 귀인은 허망한 얼굴로 나무 창살을 쳐다보았다.

단지 아픈 마음을 누르기 위해 찬바람이나 쐬고 싶을 뿐이었는데…….

염 귀인이 투옥된 감옥은 일반 감옥이 아니었다.

죄가 확정되지 않은 귀족들을 임시로 넣어두는 감옥으로, 내부의 시설은 그냥 평범한 방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내부의 시설이 평범하다 해도 벽이 감옥 창살이라면 기분이 더러운 법.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과 더해져 그녀는 이 상황이 몹시도 괴로웠다.

그때였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허리춤에 열쇠뭉치를 단 간수가 다가왔다.

하지만 염 귀인은 간수를 보지 않았다. 눈길은 자연스럽게 간수의 뒤에 서 있는 여자에게로 갔다.

회색빛을 띤 머리, 검정 일색의 옷과 머리 장식, 건조한 인상, 사람을 분석하는 눈빛. 저 여자는 분명…….

“전하.”

연얼 군주가 분명했다.

염 귀인이 일어나 인사를 올리자, 연얼 군주가 간수에게 자리를 비키란 눈짓을 했다. 간수는 바로 자리를 비켰다.

그 모습이 염 귀인에겐 이상하게 보였다. 혹시 연얼 군주가 이 누명과 관련이 있진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연얼 군주가 갑자기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시체로 발견된 태감이 연얼 군주의 연인이 아닌 이상.

“전하께서 여기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억울한 일을 당했다지요.”

“……예.”

“제안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제안이라니요?”

“이 억울한 일에 천 귀인을 끌어들이세요.”

염 귀인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게 무슨……?”

* * *

- 난 살아 있다. 안심해.

떡돌이는 오늘도 청적에 없었지만 대신 그가 남긴 쪽지가 남아 있었다.

그걸 보자 안심이 되었다. 다행이야. 살아 있구나.

물론 다른 사람이 떡돌이를 사칭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아마 그럴 확률은 작을 거야.

누가 내관을 사칭해서 이런 쪽지를 쓰겠어?

그보다 우리 떡돌이. 글씨가 아주 또박또박 예쁜데?

내관들은 편지 심부름이나 대필 심부름을 자주 해서 글씨가 아주 바르다지.

이렇게 또 떡돌이가 내관이란 흔적 하나를 보고 나니 아주 마음이 쓰라리구만.

나는 혹시나 싶어서 미리 챙겨온 작은 종이쪽지에 ‘그럼 됐어.’라고 쓴 다음 다시 바위 아래에 내려놓았다.

이후 떡돌이가 내게 준 편지는 주머니에 넣고 청적을 빠져나와 후궁전 안을 샅샅이 돌아다니며 혼자 무공을 수련할 만한 장소를 찾았다.

‘쉽지 않네…….’

하지만 워낙 오밀조밀 잘 꾸며놓은 곳이다 보니, 오히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고 외진 곳을 찾기는 힘들었다.

외진 곳이 있으면 수련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곳을 찾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지나갔다.

‘동쪽 구역을 벗어나서 찾아볼 수는 없을까?’

결국, 그렇게 몇 바퀴를 빙빙 돌기만 하다가 다시 처소에 돌아왔을 때였다.

내 처소 주위를 낯선 이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누구냐?”

누군데 내 부실한 사립문 울타리 기를 죽이고 있어?

“천 귀인이십니까.”

“그런데?”

“기몽 장군께서 천 귀인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시겠는지요.”

기몽 장군이라면…… 전에 수오부 군왕 암살 건으로 부딪쳤던 그 ‘눈화장’이잖아?

그 작자가 갑자기 나를 왜?

* * *

영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따라갔다.

여기서 가기 싫다고 거절해 봐야,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될 테니. 사실 그 ‘상황’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며칠 만에 수사청에 와 보니, 기몽 장군이 두 팔을 벌리고서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또다시 만나게 될 거라 했지요, 천 귀인. 이렇게 가까운 시일에 다시 만날 줄이야.”

쓸데없이 되게 반가워하네. 왜 이렇게 친한 척이야?

이후 절차도 이전과 비슷했다. 전에 갔던 그 방에 가서 기몽 장군과 마주 보고 앉고, 상담.

“왜 여기에 불려온 건진 아십니까?”

“몰라요.”

전에는 왜 왔는지 알고 왔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군왕을 죽인 암살자가 잡히기라도 했어요? 확인해달라고 부른 거예요?”

“그랬더라면 좋았겠군요. 다음엔 그 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이번엔 다른 일이구나.

“무슨 일인데요?”

“얼마 전 젊은 내관 한 명이 우물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들었어요.”

순간 깜짝 놀랐다.

다행이었다.

여기 오기 전 떡돌이가 쓴 편지를 읽지 않았더라면, 난 저 말을 듣자마자 ‘역시 떡돌이가 죽은 건가? 내가 떡돌이와 친하게 지낸단 걸 누군가 알고 신고해서 이곳에 불려온 건가?’ 이런 의심이 들었을 테니.

“그런데 그게 왜요?”

“시체를 발견한 목격자이자, 범인으로 의심받는 사람이 염 귀인이십니다.”

“그것도 들었어요. 근데 그게 왜요?”

“그 시각에 왜 우물가에 있었나 물어보았더니, 염 귀인께서 이렇게 대답하시더군요. 천 귀인과 만나기로 했다고.”

욕 나올 뻔.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염 귀인하고 만나기로 했다고?

“나 그 사람이랑 그렇게 안 친한데요.”

황당해서 말하자, 기몽 장군이 빙그레 웃었다.

“그건 이제부터 알아보면 될 일이지요. 사건이 벌어진 시각엔 뭘 하고 계셨습니까?”

“자고 있었어요.”

“바로 대답이 나오는 걸 보니 수상한데요.”

“자고 일어나서 들은 얘기니까 당연히 대답이 바로 나오지요.”

“천 귀인께서 그 시각에 주무시고 있었단 걸 증언해 줄 사람들이 있습니까?”

“내 처소 소속 궁인들은 다 알걸요.”

“천 귀인 아래 궁인들은 모두 다 천 귀인의 사람이니 진술에 신빙성이 없습니다.”

짜증 나네. 뭐 어쩌란 거야?

“방에서 잤는데 다른 처소 사람이 목격자라고 나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짜증스럽게 묻자 기몽 장군은 입을 다물고 눈알을 굴리더니 수긍했다.

“그건 그렇군요.”

기몽 장군은 예상과 달리 최소한 제대로 된 수사를 하려는 생각은 있는 듯했다.

내 말에 무조건 아니라고 박박 우기지 않는 걸 보면.

어쨌든 기몽 장군은 그런 식으로 몇 번 더 질문을 던지다가, 나중에는 수사청에 소속된 궁녀를 불러 지시했다.

“천 귀인께서 혹시 위험하고 수상한 물건을 지니고 계시진 않은지 확인해라.”

명령을 내린 기몽 장군이 밖으로 나가자, 궁녀는 내게 팔을 들어 달라 부탁하고는 조심스럽게 옷 너머를 툭툭 털어댔다.

당연히 아무것도 나오지 않겠지.

꿀릴 게 없기에 나는 짜증스러운 마음으로 이 과정을 묵묵히 견디면서 속으로 염 귀인을 욕했다.

그 사람은 대체 나와 무슨 원한이 있기에 계속 시비를 걸어?

그때였다.

“나왔습니다.”

궁녀가 바락 외치더니 내 주머니 안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기몽 장군은 바로 안으로 들어와 쪽지를 뺏듯이 가져갔다.

나는 순간 저게 뭔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떠올렸다. 떡돌이가 준 쪽지!

“살아 있으니 안심하라? 이거 참. 천 귀인, 아주 의미심장한 쪽지를 가지고 다니십니다?“

떡돌이 그 새끼가 만날 때마다 나한테 떡을 주더니, 결국 목이 막히게 만드는구나.

욕 나온다. 떡돌이가 의도하고 벌인 일은 아니지만, 상황이 너무도 공교로웠다.

기고만장해진 기몽 장군이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면서 나간 후.

나는 머리카락을 붙잡고서 온몸을 비틀어댔다. 진짜 열 받아!

* * *

그렇게 한 사진쯤 혼자 있었나. 삐걱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기몽? 나는 가부좌를 튼 채 내공심법을 살피다가 얼른 다리를 풀었다.

그러나 들어온 사람은 기몽 장군이 아니었다. 누구지? 처음 보는 궁녀다.

아까 몸수색을 한 궁녀랑은 다른 궁녀. 기몽장군이 보냈나?

“내 오라비를 죽인 범인에 대해 실토한다면 나가게 해주마.”

뭐야 얘. 게다가 들어오자마자 이상한 말을 해?

“네 오라비가 누군데?”

황당해서 묻자, 궁녀는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서 꾸벅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송구하옵니다, 천 귀인. 제 오라비 얘기가 아니옵고, 이렇게 말을 전하란 명을 받았습니다.”

명…… 설마.

“연얼 군주가 보낸 건가?”

“송구하옵니다, 천 귀인. 소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말도 못 한단 것치고는 말을 되게 잘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궁녀는 더 여기 있다가는 곤란해지겠다 싶었는지, 곧장 뒤돌아 나가버렸다.

드르륵 문 닫히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다시 조용해졌다.

수오부 군왕이라…… 군왕. 암살자. 마지막으로 본 광경. 그 모든 걸 되짚어 떠올려보다가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얼 군주. 오라비를 죽인 범인을 잡고 싶어서 나한테 매달리는 건 알겠지만, 진짜로 모르는 걸 뭐 어떡하라고요.

그렇다고 진짜 아무나 짚고서 ‘쟤가 범인이다!’라고 해봤자, 그걸로 마음이 풀리겠어? 그건 복수도 아닐 텐데?

* * *

기몽 장군이 다시 돌아온 건 두 시진 정도가 지나서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쫄쫄 굶었는데, 먹을 거 하나 안 들고 왔네.

그렇다고 완전히 빈손으로 온 건 아니다. 뒤에 사람 하나를 달고 왔다. 염 귀인.

내가 여기 있을 줄 몰랐나? 우울한 얼굴로 기몽을 따라 들어온 염 귀인도, 이쪽을 발견하더니 나만큼 표정이 썩어서 기몽 장군을 확 노려보았다.

“염 귀인께서는 이곳에 앉으시면 되겠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기몽 장군은 태연히 내 옆에 놓인 의자를 빼주며 권했다. 염 귀인은 일부러 다른 자리에 앉았지만.

기몽 장군은 그걸 보자 픽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염 귀인께서는 바르고 성실하게 사셨나 봅니다.”

“무슨 소리죠?”

“이런 데서는 조사관의 말을 따르는 게 도움이 될 텐데. 모르시는 것 같기에.”

“!”

“혹시 나중에 비슷한 일이 생기거든, 제 조언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기몽 장군…… 염 귀인이 자기가 앉으란 데 앉지 않아서 싫었구나.

염 귀인은 불쾌해졌는지 인상을 더욱 구겼지만, 기몽 장군이 한 말이 신경 쓰이는 듯 그가 처음 앉으라 권했던 의자를 연신 힐긋거렸다.

그걸 보자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와.”

“왜 절 보면서 감탄하십니까, 천 귀인?”

“기몽 장군은 한결같이 재수 없구나 싶어서요.”

“!”

“어쩐지 안심했어요. 나한테만 재수 없는 게 아니었다니.”

기몽 장군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지만, 염 귀인은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웃지 마, 염 귀인. 너도 만만치 않게 재수 없어.

“흠.”

기몽 장군은 헛기침을 했지만, 이 부분에 대해 항의하진 않았다. 대신 염 귀인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그러면 이제 두 분이 다 자리에 앉으셨으니 조사를 계속하겠습니다. 내관이 사망했으리라 추정되는 건 18일 해시입니다. 이날에 두 분이 만나기로 하셨다고요?”

나는 바로 반박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 이쪽 분하고 별로 안 친해서. 굳이 만날 일이 없어요.”

내가 손가락으로 염 귀인을 가리키자, 염 귀인은 덩달아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거짓말했다.

“안 친한 건 맞아요. 하지만 웬일로 오라고 날 불렀기에 갔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천 귀인은 없고 시체만 있었죠.”

불러서 왔다고?

“기몽 장군, 기몽 장군은 저분이 안 친한 제가 부르면 순순히 올 사람 같아요? 그것도 해시에?”

나는 황당해서 기몽 장군에게 동의를 구했다. 의외로 수사에는 객관적인 기몽 장군은 그건 그렇다고 납득해주었다.

“이보세요.”

그걸 본 염 귀인은 더욱 기분이 상한 듯했지만.

“그럼 두 분 귀인께서 만나기로 한 건 일단 보류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두 분은 결국 그날 만나지 못했으니까요. 게다가 그 시각…….”

기몽 장군이 말을 하다 말고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내용을 확인했다.

잠시 서류를 들춰서 확인한 그는 곧 거기에서 손을 떼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시각에 천 귀인께서는 처소에서 주무셨고, 염 귀인께서는 다른 사람을 만나셨다고요?”

“맞아요.”

“염 귀인께서는, 그러면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도 제게 말씀해주시지 않으실 건지요?”

수사는 이런 식으로 지지부진하게 흘러갔고, 결국 기몽은 이번에도 별 성과를 얻지 못한 듯 뭐 씹은 얼굴로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부하를 시켜 염 귀인을 데려가라 지시한 후. 자기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내 앞으로 와 섰다.

뭐야? 왜 안 나가고?

의아해서 쳐다보니, 그가 내 앞에서 웃으면서 물었다.

“오늘은 흑합이 도와주러 안 오나 봅니다?”

착각일 수도 있긴 한데. 그게 무척 즐거워 보였다. 약간 아쉬워 보이기도 하고.

“전에 흑합 장군에게 날 빼앗긴 게 화가 났나 봐요?”

“누구라도 화가 날 상황이었죠. 제 권한을 방해받은 거나 다름없으니.”

그건 그렇지. 내키지 않지만 납득은 간다. 나도 내 일을 하는 도중 정파 놈 하나가 와서 방해하면 화가 났을 거다.

하지만 납득이 가는 것과 이 상황이 피곤한 건 전혀 별개였다.

“이번에도 흑합 장군이 도와줄 거라 기대한다면, 그 기대는 일찌감치 버리는 게 좋을 겁니다, 천 귀인. 그자는 지금 다른 임무로 궁 밖에 나가 있으니.”

“나갔다고요?”

“그렇게 사이가 좋더니. 말하지 않고 갔나 보군요?”

알고 보니 떡돌이는 흑합 장군이 아니었지. 당연히 흑합 장군은 나한테 자기 행선지에 대해 말할 이유가 없고.

하지만 그걸 가지고서 기몽 장군이 좋아하니까 괜히 짜증이 나네?

“물론 폐하께서도 도와주시지 않을 겁니다. 폐하의 총애를 잃으셨다지요? 가엾게도.”

말을 끝낸 기몽 장군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오르는 순간.

“장군님!”

문밖에서 누군가 외쳤다.

“무슨 일이냐.”

기몽 장군이 묻자 문밖의 목소리가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폐하께서,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 천 귀인을 풀어주라 하셨습니다!”

와. 기몽 장군, 표정이 장난 아니게 험악해졌어.

“들어와!”

기몽 장군이 버럭 외치자 문이 열리고 그의 부하가 나타났다.

부하는 내 쪽을 힐긋 쳐다보면서 보고했다.

“폐하께서, 천 귀인이 쪽지 때문에 오해를 샀단 말을 들으셨다고……. 그 쪽지는 폐하께서 쓰신 것이니 천 귀인을 풀어주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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