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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6화 (16/283)

##  16화. 나의 예리한 관찰력으로

와. 황제가 일주일 안 부르니 다들 바로 무시한다고?

“여기 사람들은 적응 속도가 빠르네.”

“뭐가요, 소주?”

비가 내릴 듯 말 듯 흐린 날씨였다. 내가 대뜸 중얼거린 소리를, 부성이 용케 듣고는 지나가며 물었다.

“폐하가 날 안 부르니까 다들 너희를 도로 무시한다며.”

이런. 내 말이 꾹꾹 눌러둔 부성의 분노 포장을 풀어버린 모양이다.

부성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곧 “그렇죠!” 하고 버럭 외치면서 도끼눈을 떴다.

“진짜 나쁜 것들! 폐하께서 소주를 매일 부르실 적에는 엄청 친한 척 굴더니! 폐하께서 고작 일주일 소주를 안 불렀다고 태도가 대번에 변했어요!”

과장 없는 이야기인지, 좀 떨어진 곳을 지나가던 태감까지 달려와서 말을 보탰다.

“참입니다, 소주. 이전처럼 변한 거면 차라리 낫지요. 이전에는 없는 사람 취급했다면, 지금은 아주 비웃고 난리도 아닙니다.”

“그래?”

두 사람이 동시에 “예!” 하고 외치고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쌍으로 저러는 걸 보니 진짜인가 보네. 나원 참.

황제의 총애를 받을 땐 아주 다양한 방면으로 공격을 해대더니. 총애를 잃자 바로 무시라. 무림이랑 어찌 이리 똑같을까 몰라.

무림인들은 무기와 주먹을 휘두르고 여기서는 권력과 부하들을 휘두를 뿐, 나머지는 꼭 같잖아?

* * *

“……그런 일이 있었어.”

오랜만에 청적에 갔더니 떡돌이가 돌 위에 앉아 풀피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얜 왜 내가 있을 때만 여기에 오나 생각했는데. 내가 없어도 여기에 잘 오나 보다. 한가한 놈.

어쨌든 간만에 만난 게 반가워서, 나는 일주일 동안 내가 궁인들로부터 받은 구박에 대해 털어놓았다.

씩씩대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궁인들이 받은 구박이지 내가 직접 받은 구박은 아니라서. 그 정도로는 열받지 않았다.

떡돌이는 내 말을 신중하게 듣더니 팔짱을 끼고 심각한 척 중얼거렸다.

“자유를 찾아가더니 상처받은 새가 되었구나.”

“아 오글거려. 뭐라는 거야?”

“네가 여전히 재수없단 말을 하고 있었다.”

“뭐래. 만만치 않거든?”

그의 자세를 따라하면서 중얼거리자, 떡돌이는 태연히 웃었다.

이후 우리는 별거 아닌 화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개미라던가 새라던가, 나방이라던가, 하여튼 진짜로 별로 중요치 않은 것들.

딱히 재밌어서는 아니고. 그냥 둘 다 멍하니 말을 주고받다 보니 벌어진 상황이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떡돌이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황제가 일주일 간 널 부르지 않았다고 했지?”

“응.”

“왜 그런지는 알아?”

“알아.”

“안다고?”

“응.”

질문을 던져서 대답을 들었으면 믿으려는 시늉이라도 해라, 자식아.

왜 자기가 먼저 물어 놓고서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데?’ 하는 못 미더운 눈으로 쳐다보는 거야? 두 눈에 ‘불신’이라고 아예 글자를 새겨 놨잖아?

“이유가 뭔데?”

“내가 알아버렸거든.”

“뭘?”

“황제에게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단 걸.”

떡돌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확실해? 혼자서 착각하는 거 아니고?”

“진짜야. 내가 이 얘길 하니까 그다음부터 날 안 불렀는걸?”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뭐가?”

한숨을 내쉰 떡돌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꽃을 꺾더니 내 귓가에 꽂아주면서 웃었다.

“어울리네.”

“나더러 미쳤단 거야?”

“너…… 욕 알아듣는 데만 눈치가 빠르구나.”

인상을 찌푸리고서 그의 허벅지를 찰싹찰싹찰싹 연달아 내리치자, 떡돌이는 덩달아 내 허벅지를 찰싹찰싹 두드렸다.

그러고는 나더러 눈치 좀 키우라던가, 하여튼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내 입으로 자랑까지 하긴 그렇지만, 나는 눈치가 나쁜 편이 아니다. 아주 빼어나진 않지만, 남들만치는 가지고 있다.

가끔은 남들보다 빠삭한 눈치를 자랑하기도 하지.

그래서 나는, 내 진가를 모르는 떡돌이에게 내 눈치가 얼마나 빠삭한지 진가를 알려주기로 작정했다.

“사실 난 눈치가 아주 좋아.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정말이야?”

“그럼. 너한텐 말하지 않았지만, 황제에 대해 알아낸 게 하나 더 있어. 이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 했지만.”

“했지만?”

“네가 자꾸 나더러 눈치 없다고 하니 알려줄게. 대신 비밀로 해야 돼. 할 수 있겠어?”

떡돌이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나는 덩달아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비밀’이란 말을 꺼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은밀하게 주고 받을 말은 아니었는데도.

“그게 뭔데?”

떡돌이는 내쪽으로 고개를 약간 기울이더니, 내 귓가에 대고 물었다.

비밀이라고 했더니 내가 뭐 대단한 기밀을 말할 거라 여기나?

하지만 분위기는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전염되는 법이다.

떡돌이가 이렇게 묻자, 나는 덩달아 내가 아주 대단한 기밀을 쥐고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똑같이 떡돌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황제가 좋아하는 여자는…… 사실 승언이야. 황제는 남색가야.”

“!”

* * *

“크흡. 아. 죄송합니다, 폐하.”

사자친왕이 웃음을 터트리자,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를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래도 사자친왕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서 어깨를 들썩였다.

“우리 둘만의 공간에 자꾸 후궁을 부르시기에 섭섭했더니. 부를 가치가 있는 후궁이로군요. 참으로…… 독창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웃든지 말하든지 하나만 하지 그러느냐.”

황제가 차갑게 말하자 사자친왕은 웃음을 선택했다. 배를 잡고 호탕하게 웃어대는 형제를 쳐다보다가, 황제를 고개를 저었다.

사자친왕은 한참 동안 웃어댄 후에야 입가를 넓은 소매통으로 가리고서 눈웃음을 지었다.

사자친왕은 황제의 이복형제로, 그가 형제 중 가장 가까이 대하는 왕족이었다.

수오부 군왕이 이상한 이들과 결탁하는 것 같단 말을 전한 것도 그였고, 여러 가지 황제가 갈 수 없는 곳에서 정보를 넘겨주는 이도 그였다.

청적 역시, 원래는 그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황제와 만나던 장소였다.

“그래도 좋지 않으십니까?”

“무엇이 말이냐.”

“폐하께선 늘 황제로서의 폐하가 아니라, 그냥 폐하 본인을 사랑해 줄 사람을 그리워하셨잖습니까.”

부채를 꺼내든 사자친왕이 얼굴에 대고 하얀 깃털을 팔랑팔랑 부치며 웃었다.

“이를테면 승언이 같은.”

“사자!”

“하하, 농담입니다. 하지만 폐하, 굳이 흑합 장군 이름을 사칭해 천 귀인을 만나시는 건, 그 귀인이 폐하를 폐하로 보지 않길 원하시는 게 아닌지요?”

* * *

후궁들에게는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몇 가지 교육용 책들이 있다. 그 이름은…….

“그 뭐야. 제일 기초 서적 이름이 뭐라 했지?”

“양의억액의효과정이요.”

제일 쉽다는 서적 이름이 저거다. 딱 이름만 봐도 느껴지지 않나?

엄청나게 어려움. 난이도 최상. 베개로만 사용할 것.

하지만 의외로 아니었다. 펼쳐보면 안다. 내용은 쉬웠다. 기가 막혀서 바로 덮어버릴 정도로.

“뭐야 이거. 말하기 전에 천 번 생각하라고? 대답하기 전에 상대가 갑갑해서 가지 않을까?”

“그냥 그 정도로 신중하란 뜻 아닐까요?”

“이거 봐봐. 되게 웃겨. 말도 하지 말고 손도 움직이지 말고 발도 움직이지 말고 사람들 대할 때도 거리를 두고 눈 깜빡이는 횟수까지 정해 놨어. 더 웃긴 건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래. 미친 거 아냐? 밥 먹고 똥 싸지 말란 수준인데?”

“소주!”

내가 혀를 차면서 책을 덮자, 원웅이 발을 동동 굴렀다.

“소주, 제발 험한 말 좀 쓰지 마세요. 누가 들을까 염려됩니다.”

“누가 들으면 어떻게 되는데?”

“소주께서 배운 게 없어서 그렇다 욕할 거예요!”

“지금도 욕하잖아.”

“그건…….”

욕을 안 듣는단 말은 차마 못 하겠나 봐. 원웅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린다.

나는 책을 원웅에게 내밀고서 평상에서 일어났다.

“소주? 간만에 공부하신다더니요?”

“공부할 거야.”

무공 공부. 슬슬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안 쳐다보게 되었으니, 청적 말고 조용한 비밀 공간을 다시 찾아서 수련을 해야지.

내 원래 무공 실력의 반, 아니, 십 분의 일만 찾아도 궁중 생활이 배는 편하고 안전해질 테니.

적어도 이런 이름 복잡하고 말도 안 되는 후궁 필수 서책보다는 분명히.

궁중 예법이야 허례허식을 익히는 데 실용적이기라도 하지, 이딴 건 배울 필요도 없다.

그런데 부실한 사립문 울타리를 밀고서 막 나갔을 때였다.

두 손을 어색하게 앞으로 뻗은 태감 두 명이 총총걸음으로 근처에 와서는 허리를 숙이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천 귀인. 흑합 장군께서 천 귀인께 이 비단을 선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앞으로 쭉 뻗은 손 위에는 연한 옥색과 붉은색의 천이 걸려 있었는데, 그게 비단이었나 보다.

원웅이 얼른 나서자 태감은 원웅에게 비단을 건네고서 나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떤 반응을 보일 거냐는 듯.

어떤 반응을 보일 거냐고?

“사기꾼…….”

* * *

날 속인 주범은 떡돌이다. 내가 그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 먼저 흑합의 이름을 댔으니.

하지만 흑합 장군 역시 공범이었다. 떡돌이가 날 계속 속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잖아?

지금까지 내 원망은 떡돌이에게만 향해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주범이기도 하고 내가 만나는 이는 그 하나뿐이니.

그런데 흑합 장군이 내게 귀한 비단 두 필을 보내오자, 흑합 장군도 떡돌이와 비슷한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아마 날 속이면서 같이 좋아하고 있을지도 몰라.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면서 천 귀인은 무식하다고 막 흉을 보는 거지!

생각하니 너무 의심스러워서, 결국 나는 흑합 장군을 직접 찾아가 보기로 결심했다.

날 속이고 있으니, 그 사람은 내가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찔리겠지!

“잠시 나갔다 올게.”

작정하자마자 나는 얼른 내 처소를 지나 동영궁 밖으로 나가 흑합 장군이 머무는 거처로 곧장 걸어갔다.

“귀자야. 심부름 하나 하거라.”

하지만 거처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떡돌이를 찾아왔다고 이전처럼 바로 방문 목적을 밝히진 않았다.

전에 ‘천 귀인’의 모습으로 떡돌이를 만나려다가 튕긴 적이 있으니까.

대신 황제가 보내준 태감을 보내, 흑합 장군에게 ‘꼭 전해야 할 물건이 있으니 나와주십사’ 부탁만 하라고 했다.

“절대로 내가 불렀단 걸 눈치채게 하지 마.”

“그런다고 나올까요?”

“무슨 수를 써서든 불러내 봐. 아무 핑계나 대서라도.”

이후 귀자를 성문 앞으로 보낸 후 나는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귀자가 무어라고 말한 건진 모르겠지만, 정말로 흑합 장군이 문밖으로 나왔다.

심지어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기까지 했다.

전에 본 검은 목련! 흑합 장군이 분명했다.

판단을 마치자마자 나는 얼른 나무 밖으로 달려나갔다.

“저기! 잠시!”

혹시 내 얼굴을 보고 뒤돌아 달아나는 건 아닌가 했는데.

흑합 장군은 내가 부르자 오도카니 선 채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러고는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먹물 향 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시지요?”

당당한 태도였다. 그래서 이상했고.

뭐야. 왜 이렇게 당당해? 떡돌이랑 둘이서 짜고서 날 속이는 주제에?

“소저?”

게다가 다른 이들과 달리 나를 ‘천 귀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데?

설마…… 날 모르나?

“난 천 귀인이라고 하네.”

“!”

모르네. 확실하게 내 얼굴을 몰랐나 봐.

눈동자가 엄청난 속도로 떨리기 시작하잖아? 이 와중에도 표정은 덤덤하지만.

이름을 빌려준 건 물론 내 처소로 선물까지 보내기에, 당연히 내 얼굴을 아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서 그냥 이름만 빌려준 모양이다.

나는 그에게 ‘네가 흑합 장군인 걸 알고 있다, 이 사기꾼아’라고 말하는 대신 모른 척 웃고서 물었다.

“난 흑합 장군을 데려오라고 하였는데. 왜 그쪽이 나왔는가? 장군이 외출하였나?”

굳이 모른 척 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원래 들키기 전이 가장 졸리니까.

다른 하나는, 귀자 때문에.

귀자가 내 태감이긴 하지만 예전부터 함께 있던 태감은 아니잖아? 최근에 합류한 태감이지.

그러니 혹시 모르지 않는가.

귀자가, 내가 흑합 장군 사기극을 눈치챘단 걸 알고서 다른 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퍼트릴지도.

그러니 모른 척 이렇게 나가는 것이다.

“그쪽이 천 귀인…….”

흑합 장군, 그러니까 진짜 흑합 장군은 날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어떻게 대응할 거지, 이제? 나는 속으로 낄낄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진실을 고백할까? 사과할까? 어물어물 넘어갈까?

얼마나 오랫동안 망설였을까. 마침내 결정을 내렸는지, 흑합 장군이 골목길을 손으로 가리키며 권했다.

“잠시 함께 걷겠습니까?”

* * *

‘저분이……!’

염 귀인은 나란히 걸어가는 헌앙한 한 쌍의 남녀를 보며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서 나무에 이마를 기댔다.

보따리를 들고서 염 귀인을 따라온 그녀의 궁녀가, 그 모습을 보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

“소주, 천 귀인과 흑합 장군 사이가 심상치 않다고 황후마마께 다시 말씀드리는 게 어떨까요?”

“…….”

“우 귀인은 이상한 서신을 들고 와 황후마마 심기를 불편하게 했지만, 소주께서는 확실하게 증거를 잡아내서 황후마마께 바친 전적도 있잖아요. 소주께서 말씀하시면 황후마마께서도 천 귀인이 감히 다른 사내와 사통한단 걸 믿어주실 거예요.”

“그랬다가 흑합 장군에게도 피해가 가면?”

“그거야…….”

사통한 게 진짜라면 둘 다 벌을 받는 게 맞죠. 궁녀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염 귀인의 표정이 정말로 괴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궁녀는 보따리를 꽉 쥔 채 걱정했다. 이렇게까지 힘들어 하시다니…….

‘역시 소주께서는 아직 흑합 장군님을 못 잊고 계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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