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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5화 (15/283)

##  15화. 사랑은 폭죽처럼

차 궁녀가 녹색 주전자를 기울이자 졸졸 차 흐르는 소리가 고요히 울렸다.

그릇과 수저가 부딪치는 소리가 뒤를 따랐다.

어두움. 화려하게 치장한 황가의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 식사를 하는데도, 이곳에서 밝은 것이라곤 색색의 비단옷들뿐이었다.

정적은 숨이 막혔고 분위기는 무거웠다.

“연얼.”

그 침묵을 깨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거의 이 각 여만이었다.

조용히 식사하던 고개가 위로 올라왔다.

“예, 폐하.”

“수오부의 일로 마음이 아프겠구나.”

“송구합니다…….”

황제가 말을 건 이는 연얼 군주였다. 며칠 전 동복 오라버니가 궁정에서 암살당한 연얼 군주.

이런 연유로, 그녀는 방 안의 누구보다도 낯빛이 어두웠다.

“요즘 궁 안에 사특한 무리가 돌아다닌다지. 수오부도 그자들과 얽힌 건 아닌가 걱정되는구나.”

그 낯빛은 황제가 뼈 담긴 말을 건네자 어두운데 창백해지기까지 했다.

“오라비를…… 그자들이 암살했단 말씀이신지요?”

“그건 차차 알아봐야겠지.”

연얼 군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덤덤히 답한 황제는, 이어 다른 이들도 차례로 둘러보며 충고했다.

“모두 조심하라. 최근엔 짐의 후궁도 습격을 받았다. 궁 안에서. 조심 또 조심해서 무사안일하라.”

목소리를 맞추기라도 한 양 “예, 폐하.” 하는 소리가 다 같이 울렸다.

연얼은 시무룩해져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연얼.”

이 와중에 황제는 또 그녀를 불렀다. 왜 자꾸 날 부르시지? 연얼은 충동적으로 묻을 뻔한 걸 꾹 참고서 대답했다.

“예, 폐하.”

“네 호위가 한 명 줄었구나.”

“!”

연얼은 대답하지 못하고 흠칫 몸을 떨었다.

왕족들은 서로 시선을 바쁘게 주고받았다.

이 자리에 있는 건 황제가 데려온 호위뿐. 당연히 연얼의 호위는 이곳에 없다.

그런데도 굳이 자리에 없는 호위를 집어서 인원수가 왜 줄었냐고 묻는다는 건…….

‘폐하께서는 연얼 군주를 주시하고 있다 경고하시는 건가?’

황제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조심해서 해석해야 하는 법. 머리 굴리는 소리가 그릇 부딪치는 소리와 섞였다.

찔리는 게 있는지라 연얼은 안색이 파리해졌지만 애써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차지 않아 내보냈습니다, 폐하.”

“어느 부분이 마음에 차지 않았으려나……?”

‘내 부하가 천 귀인을 습격한 걸 알고 하시는 말인가? 아니, 알 리가 없다. 허벅지가 찔려서 부하는 바로 내보냈는데.’

황제가 쓴 면사 아래, 입술 끝이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호위가 하나 모자라겠지? 내 호위를 하나 보내주마. 그 호위는 네 마음에 차리라.”

“황송합니다, 폐하.”

* * *

식사를 마친 황족들이 태후를 제외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줄어든 사람 수만큼 오히려 방 안의 분위기는 더욱 포근해졌다.

태후는 재밌다는 얼굴로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길은 아직도 황제가 착용한 면사에 붙어 있었다.

“왜 그렇게 빤히 보십니까, 어머님.”

“아, 별 이유는 아닙니다. 그저 좀 신기해서 말이지요.”

“신기하다니요?”

“아드님의 생각 말입니다. 한 식구라지만, 연얼 군주는 아드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데. 왜 갑자기 호위를 내려주는 걸까요?”

“별거 없습니다.”

“별거 아닌 일을 할 성격이 아닌 걸, 아드님도 알고 나도 알 텐데요.”

“한마디도 안 져 주신다니까.”

“습관인가 봅니다.”

“정말 별거 아닙니다. 소자는 천 귀인을 습격한 이가 연얼 군주의 호위라 생각할 뿐입니다.”

“별거 아닌 게 아닌데?”

태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다른 이들과는 시각이 다르군요. 세간에선 천 귀인을 습격한 게 수오부 군왕을 죽인 암살자라 여기던데.”

황제의 입술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올라왔다.

세간과 의견이 다를 수밖에. 수오부 군왕을 죽인 암살자는 그가 보냈으니.

물론, 그가 보낸 암살자는 천 귀인을 노릴 리가 없다.

그렇다면 천 귀인을 노릴 사람은 한 부류뿐이었다. 암살범에 대해 알아내고 싶은 사람.

그리고 황제는 그 가능성을 연얼 군주에게서 높게 보았다. 하지만 존경하는 모후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없지 않던가.

“속골이 아픕니다. 이런 얘긴 그만하시지요, 어머님.”

* * *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게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닌 모양이다.

일단 문제점 하나. 이상한 놈에게 습격을 당한 후, 황제는 내게 무공을 익힌 태감을 보냈다.

무공 익힌 태감을. 무공 익힌!

이 태감은 내가 무공 수련하는 모습을 보면 대번에 촉을 세우고서 수상하게 여기겠지. 절대로 좋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점 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기가 어려워졌다.

새로이 무공 익힐 조용한 장소를 찾아 돌아다녀야 하는데.

젠장, 요 며칠 내가 나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알아보고 말을 걸어대니!

하지만 위의 두 가지 문제점은 어찌어찌 해결할 수 있기는 하다.

무공 수련하는 모습이야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고, 사람들의 이목이야 피해서 다니면 그만이니까.

그게 귀찮고 번거롭고 힘들어서 그렇지.

어쨌든 위의 두 문제점은, 세 번째 문제점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세 번째 문제점이란…….

“소주, 들으셨어요? 북궁 안쪽 어딘가에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물이 초록빛이래요. 근데요, 그 초록색 우물물을 마시면 대번에 아이를 임신할 수 있대요!”

“누가 그래?”

“승빈마마의 상궁이, 전에 금의로 옷 만드는 걸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알려주었어요.”

“그게 진짜면 승빈이가 먼저 임신을 했겠지…….”

“저도 그 생각은 했는데요.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태감을 보내서 한 번 찾아보라 할까요?”

“아니 괜찮아.”

그리고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뭐 임신할 일도 없는데 임신이 혼자 되나.

물론 할 수 있다 한들 임신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난 세상이 무림사적 천년비를 잊을 때까지만 유유자적하게 지낼 거라고.

나중에 무공을 되찾고 나면 평화롭게 지내다가, 심심할 즈음 다시 나갈 거야. 그래야 개원 그 개자식한테 복수하지.

“소주는 욕심이 너무 없으세요.”

부성이 걱정스럽게 말하면서 찻잔을 내민다. 나는 찻잔을 받고서 향을 맡다가 쿨럭쿨럭 기침하는 척 찻잔을 쏟았다.

“소주, 괜찮으세요?”

“찻잔에 ‘또’ 이상한 게 들어 있어…….”

“또요?”

이거다. 이게 바로 제일 심각한 세 번째 문제다.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공격들.

젠장. 나야 이 독 저 독 당하다 보니 독에 대해 박식해졌다지만. 이런 걸 모르는 보통 후궁들은 대체 어떻게 견디는 거야?

그러고보니 황제. 진짜로 사랑하는 다른 여자가 있었지?

혹시…… 그 여자가 이런 견제를 받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한테 시선을 몰아뒀다거나, 뭐 이런 거 아니야?

* * *

“폐하. 혹시 절 이용하십니까?”

궁금한 건 물어야 한다.

또 다시 황제의 침실에 불려갔을 때. 나는 그냥 대놓고 물어버렸다.

아니, 솔직히 그렇지 않나? 황제의 시침을 든 후로 온갖 공격을 다 받고 있잖아.

하지만 황제가 날 사랑해서 부르는 건 아니야. 의심할 만하지.

“무슨 엉뚱한 소리지?”

“폐하께서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잖아요.”

“짐이? 그게 누군데?”

뭘 시치미야. 다 알고 있는데.

“알고 있으니 안 숨기셔도 돼요. 있잖아요.”

“없어.”

“거짓말. 어쨌든 폐하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그러면서도 시침은 그 여자가 아니라 절 부르시죠.”

“…….”

“덕택에 온갖 이들이 절 주목하고 있고요. 합리적으로 의심이 가네요. 폐하, 혹시 절 이용하세요?”

“무슨 책을 본 거야?”

“제가 방패 역할인가요? 좋아하는 여자를 지키고 싶어서 절 앞에 내세우는 거예요?”

“헛소리.”

황제는 단호하게 내 말을 끊고는 날 옆으로 밀어냈다. 이젠 아주 자연스럽게 옆에 와 눕는다.

오늘은 웬일로 서책 한 권까지 손에 꼭 쥐고 왔다.

하지만 책은 멋내기용인가. 손에 들기만 한 채 책장을 넘기지 않는다. 한 장도.

대신 책을 꼭 붙들고서 정면만 응시하는데…… 정면에 뭐가 있어서? 내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폐하. 제가 너무 진실을 꿰뚫어 보았나요?”

혹시 내 말에 찔려서 저러나? 너무 두근거려서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아?

“네 말이 너무 진실과 멀어져 있어서, 대체 어찌하면 그런 말이 나오나 궁금해서 그런다.”

“그럼 아니란 말씀이세요?”

“하나부터 열까지 틀렸다.”

황제는 손을 뻗더니 내 정수리에 손을 얹고서 열이 날 만큼 빠르게 휘저었다.

“도대체 이 머리엔 뭐가 들어 있나 모르겠군.”

뭐가 들어 있긴! 무림사적의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지. 알면 기겁해서 넘어갈 거다.

내 이름 들으면 어린애도 울다 그쳤다고. 최소한 무림 명문가 어린애는.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틀린 말만 하기도 참 힘들 텐데.”

“그럼 좋아하는 여자가 없단 말씀이세요?”

“없다.”

“거짓말.”

황제는 책을 자기 가슴에 내려놓았다. 황당하단 시선이 면사를 뚫고 넘어왔다.

“짐이 아니라는데 네가 왜 거짓이라 주장하지?”

“청적에서 본 어떤 여자가 있다면서요. 우 귀인이 그게 저라 생각해서 절 흉내 냈는데, 폐하께서 보곤 아니라 했잖아요.”

“그건 내가 아니라…….”

“아니라 뭔데요?”

“…….”

“폐하?”

“우 귀인이 거짓말하는 게 눈에 보여서 그런 거지. 어쨌든 아니다.”

거짓말. 우 귀인이 내 흉내를 내기 전에는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는걸?

한숨이 나온다.

“폐하.”

“왜.”

“사랑하기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에요.”

황제는 아예 책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눕자, 면사가 약간 옆으로 내려가며 평소보다 입이 잘 보였다. 입도 잘생겼네.

“폐하. 질투 유발 작전을 위해 절 이용하려는 것도, 다른 사람의 눈길을 가리기 위해 절 이용하려는 것도, 둘 다 하수예요. 폐하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면 이러면 안 돼요.”

황제는 입술을 달싹였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다는 듯.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그 상태로 잠시 있다가, 황제는 아까와 다른 입 모양으로 말을 꺼냈다.

“내 방법이 하수라면, 중수는 뭐지? 고수는 뭐고?”

“그걸 알면 제가 이러고 있겠어요?”

“넌 황제인 짐을 잡았잖나. 그러니 대단한 수가 있겠지.”

말은 똑바로 하자. 내가 널 잡은 거냐? 그쪽이 날 계란말이 상태로 옆에 둔 거지? 난 몸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잖아.

내가 잡고 싶은 사람은 개원이었지. 그러나 개원이는 날 버렸어. ……연애에 있어서 난, 하수도 못 되었다.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았다. 에이, 말해 뭐 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

그러나 뜨끈한 게 낸 눈두덩이를 눌러서, 억지로 눈을 떠야 했다.

왜? 가자미눈을 하고 째려보자, 황제가 얼굴을 내게 가까이 붙였다.

그래 봐야 면사로 가로막혀 있지만, 평소보다는 분명히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왜 이렇게 가까이 와?

“좀 부담스러운 거린데요, 폐하.”

“천 귀인.”

“전 뒤로 갈 수 없으니 폐하께서 뒤로 가셨음 좋겠어요.”

“천 귀인.”

연거푸 날 부른 황제가 또 엄지를 들더니 내 눈썹 사이를 문질렀다. 왜 이래?

툴툴대며 그 손을 올려다보자, 황제가 이번엔 나지막하게 웃었다. 내 눈알이 몰렸나 봐.

“계란말이. 내 관심을 받아서 싫어?”

“얘기가 왜 그쪽으로 가요?”

“내 생각엔, 네가 핑계를 대고서 나한테서 빠져나가려는 것 같아서.”

“우리가 되게 진득하게 얽힌 사이처럼 표현하시네요. 빠져나가다니.”

“달라? 내 관심을 받는 게 싫은가?”

“솔직하게 대답해도 돼요?”

“말해봐.”

“좋진 않아요.”

황제가 손을 내리더니 더욱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폐하의 시침을 든 후로 여기저기서 공격을 너무 많이 받잖아요.”

“궁 안은 비정해, 계란말이. 여기서는 높이 올라갈수록 많은 공격을 받지. 내가 널 더욱 총애하면 공격은 더욱 거세질걸.”

여기저기서 공격받는 삶은 지쳤다. 내가 이곳에서 원하는 건 평화였다. 조용하고 안락한 생활.

“공격받으면서까지 폐하 사랑을 받고 싶진 않아요.”

아니, 애초에 그쪽은 날 사랑해서 부른 것도 아니잖아.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내 머리카락만 지분거릴 뿐.

* * *

또 찻잎에 이상한 게 섞여 있다. 나는 차를 마시려다가 찻잔을 내려놓고서 물었다.

“찻잎을 배급해주는 데가 어디야?”

“소주방에서 운영이란 궁녀가 배급해주는데…… 또 안에서 냄새가 나나요, 소주?”

“응.”

나는 그 길로 소주방을 찾아갔다. 원웅은 찻잔을 치우려다가 놀라서 나를 따라나섰다.

황제가 보내준 무공 익힌 태감도 바늘 가는 데 따라오는 실처럼 날 따라붙었고.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천 귀인.”

내가 찾아가서 따지자, 찻잎을 배급하는 궁녀 운영은 딱 잘라 이렇게 말했다.

“그래?”

하지만 찻잎을 받아 바로 입에 넣고 씹자, 운영은 놀라서 내 손목을 잡고 말렸다.

“진짜 아무것도 몰라?”

내가 찻잎을 퉤 뱉고서 되묻자, 운영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누가 시킨 짓이지?”

“말씀드리면 전 죽습니다, 천 귀인.”

“공식적으로 항의하지 않을 테니 말해. 아니면 여기서 이 찻잎을 입에 물고서 비명을 지를 거야.”

이 자리에서 찻잎 씹고 바로 쓰러진다면, 운영이 모든 죄를 덮어쓰겠지. 진범이 특히 그렇게 몰아갈 거다.

영리한 궁녀는 대번에 상황을 파악하고서 작은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승빈마마께서…….”

나는 운영에게 이 일을 묻어주는 대가로, 상한 찻잎을 한 주머니 얻었다.

그녀는 불안해하는 얼굴로 노란 주머니에 찻잎을 싸 내밀었다. 내가 이걸로 뭘 하려는지는 차마 묻지도 못했다.

“그걸로 뭘 하실 건가요, 소주?”

원웅은 물었지만.

“나중에 알려줄게.”

나는 대답하는 대신 주머니를 잘 챙겨 처소로 돌아왔다.

사실, 별 계획은 아니다. 무공 실력이 높아지면 기회를 엿봐서 승빈에게 이걸 똑같이 먹일 생각이지.

무공 모르는 사람을 죽이긴 좀 찝찝하고, 그냥 넘어가긴 짜증 나니까.

그리고 오늘 황제가 날 부르면 내 찻잎에 장난질을 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냈다고 큰소리를 쳐야지.

그러나 오늘 밤 황제는 날 부르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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