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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3화 (13/283)

##  13화. 속고 속이는 사이

지금까지 내가 흑합 장군이라 알고 있던 남자가 흑합 장군이 아니었어?

흑합 장군은 저기 검은 목련 같은 남자고, 그럼…… 그럼 떡돌이는 누구야?

아니. 아니야. 동명이인일지도 모르잖아. 흑합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이나 된다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애써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유지한 채, 나는 떡돌이 쪽을 계속 주시했다.

그래. 내가 이름을 잘못 들었을 수도 있잖아. 어쩌면 저 검은 목련 이름은 흑함이라던가 흑한일 수도 있어.

“염 귀인에게는 왜?”

“그야 염 귀인께서는…… 아닙니다, 장군.”

“헛소리하지 말라.”

“예, 장군.”

젠장. 이름을 자세히 들으려고 했더니 왜 갑자기 이름 빼고 ‘장군 장군’ 불러대는 거야?

괜히 초조해져서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 내가 주먹 쥐고서 어딜 내려친 것도 아닌데, 흑합 장군이 고개를 휙 돌려 내쪽을 보았다. 정확히 내쪽이었다.

“누구냐.”

다행히 몸을 숨긴 채여서 내 얼굴은 못 본 모양이지만. 나는 나서는 대신 얼른 그 자리를 냅다 벗어났다.

굳이 쫓아올 정도로 확실한 소리를 들은 건 아닌지 검은 목련은 날 쫓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남이 엿들어도 상관없는 대화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쨌든 의혹이 싹을 틔웠다. 제대로 자라났어.

“어? 소주, 떡을 그대로 가지고 오셨네요?”

내가 처소로 돌아가자, 항아리 안에 뭘 넣고 휘적휘적 젓던 부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 너 먹어.”

나는 떡 주머니를 부성에게 건네고서 평상으로 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부성은 고개를 기웃거리면서도 내가 준 떡 주머니에서 떡 하나를 꺼내 먹었다.

그녀가 떡 두 개를 먹길 기다렸다가, 나는 일부러 가벼운 질문을 던지는 투로 물었다.

“부성아. 혹시 ‘흑합’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장군이 두 명 있어?”

“네? 아니요. 한 명뿐이에요.”

젠장.

“그럼 흑합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문관이라던가?”

“제가 알기로는 없어요, 소주.”

젠장.

“왜 그러세요?”

“흑합 비슷한 이름은 없어? 흠함이라던가 흑함이라던가, 흥합이라던가.”

부성이 ‘어라 수상한데’ 하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내가 자기보다 직급이 낮았더라면 당장 무슨 일인지 캐묻고 싶단 표정이었다.

“떡 먹어, 떡 먹어.”

나는 손을 휘휘 저어 부성의 호기심을 떨치고서, 얼른 내 방으로 들어가 부채를 꺼내 파닥파닥 부쳤다.

분노가 타오른다 분노가 타올라!

떡돌이가 날 속이다니. 떡돌이가! 그렇게 수묵화 같은 얼굴을 해가지고서는!

그가 장군이 아니어서 화가 나는 게 아니다. 난 떡돌이가 노비였어도 상관없다.

상관없지. 난 무림사적이었는걸! 만인의 악당이었다고!

내가 화가 나는 부분은 그가 날 계속 속이고 속이고 속이고 속였단 점이었다.

내게 진실을 털어놓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쭉 속였다.

설령 내가 처음에 오해했다 한들, 나중에 알아서…… 아니야, 애초에 흑합 장군이라 거짓말한 것도 자기잖아!

* * *

각혈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데다 수사청에 다녀오기도 했으니, 당연히 오늘도 황제가 날 부르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경사방 태감이 와서 오늘도 내가 황제의 시침을 들게 되었다 전했다.

처음에 날 찾아왔을 때는 좀 거만하던 경사방 태감은, 몇 번이나 나와 얼굴을 마주해서인가.

요즘은 아주 혓바닥을 꿀에 절인 마냥 살갑게 굴었다.

“손가락 하나, 아니, 손톱 하나조차 아름다운 천 귀인이시니 폐하께서 이리 아끼시는 거지요. 천 귀인은 지금까지 세상에 태어난 모든 미남미녀와는 상대도 안 되는 분이 아니십니까.”

내가 황제의 총애를 확실하게 얻었다 싶으니 잘 보이려나 보다.

진심이든 아니든 나쁜 말보단 좋은 말이 듣기 좋았기에, 나는 그러려니 넘어갔다.

어쨌든 결론은 오늘도 내가 이불말이 한 상태로 황제에게 옮겨졌단 거지.

“왔구나 계란말이.”

황제는 매번 그렇듯 얼굴에 면사를 쓴 채로 날 맞이했고, 이제는 익숙하게 날 세 바퀴 굴려 옆으로 치운 다음 내 옆에 누웠다.

“역시. 이게 편해. 듬직하고.”

혼자서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면서.

뭐라는 거야? 설마 듬직하단 대상이 이불말이 상태의 나는 아니겠지?

잠시 황제를 흘겨보았으나, 오늘은 그에게 예의를 지켜가며 잔소리를 퍼부을 마음이 아니었다.

소모적인 말다툼을 하는 대신,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계란말이.”

그게 이상했나. 평소에는 나보다 먼저 잠들던 황제가 내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슬쩍 잡아당기며 불렀다.

물론 이곳에 계란말이 따위는 없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계란말이.”

“…….”

“천 귀인.”

황제가 이름을 불렀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 했지만.

“네, 폐하.”

어쩔 수 없잖아. 상대는 황제인데.

“왜 부르세요?”

“오늘은 평소보다 시무룩해 보이는구나.”

“일이 좀 있어서요.”

“수사청에 잡혀간 일 말이냐.”

“뭐. 그렇죠.”

“그러고 보니 넌 내게 할 말 없느냐?”

내가 황제에게 해야 할 말이…… 아.

“빼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못하다간 이상한 덤터기를 쓸 뻔했거든요.”

“궁에서는 때론 아는 게 독이 되기도 하지.”

“그렇더라고요.”

궁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지만. 무림도 똑같았다. 난 무림인들이 두려워하는 걸 많이 알았고, 결국 그게 독이 되어 돌아왔으니.

“그 일 뿐만이 아닌 모양인데?”

하지만 생각보다 황제는 더 예리했다.

적당히 그의 말에 맞장구 치며 감사 인사를 했는데도, 황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그의 강렬한 눈빛이 면사를 뚫고 튀어나왔다. 그가 내 표정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왜. 수사청 말고도 안 좋은 일이 있었느냐?”

나는 고민하다가 좀 둘러둘러 털어놓았다.

“폐하.”

“그래.”

“만약 누군가 폐하를 속이고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드시겠습니까?“

“모르겠군. 날 속이는 이는 이미 너무나 많아서.”

“폐하를 속이는 사람이 많다고요?”

그렇게 간이 큰 사람 숫자가 그리 많진 않을 건데?

내 질문에 황제가 비웃는 소리를 냈다. 많단 건가? 궁금했지만 그는 그와 관련해서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정말로 황제를 속이는 사람이 많나?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대체 간이 얼마나 큰 거지?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해소할 사이도 없이 황제가 화제를 돌렸다.

“누가 널 속이는데?”

다시 내가 중심이었다. 자기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건가.

“알아서 뭐 하시려구요.”

그래서 나도 하지 않았다. 원래 이런 정보 교환은 맞교환이 기본이지.

황제도 양심을 내다 판 건 아닌지 더 캐묻진 않았다.

“말하기 싫으면 말아라. 누가 궁금해한다고.”

자존심은 뾰족하게 내세운 채 꺾지 않았지만.

누가 궁금해하긴, 이 황제야. 네가 궁금해서 물었잖아. 네가.

“하지만 계란말이야.”

“왜요.”

“상대에게도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니? 누군가를 속이는 건 잘못이지만, 그 이면도 생각해 주는 게 어떠하냐.”

“싫어요. 그 사정이 속인 사람 사정이지 제 사정은 아니잖아요.”

“……매정한 것. 저리 돌아누워라.”

아 왜 자기가 짜증이야?

* * *

다음날 처소로 돌아오니 원웅이 시원한 동치미와 구운 송이버섯을 주었다.

“이게 웬 거야?”

“어전 궁녀가 새벽에 버섯을 들고 왔더라구요. 폐하께서 소주께 하사하셨답니다.”

“와. 너희 건? 따로 챙겼어?”

“어휴 소주 드셔야지, 저희가 뭘요.”

“어휴 이런 건 같이 먹어야 해, 너희도 먹어.”

원웅이 나간 후. 나는 구운 버섯을 씹고 동치미 국물을 마시면서, 어젯밤 황제가 한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황제는 날 속인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 개소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분명 떡돌이에게도 이상한 점은 있었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두 개나 되는걸.

일단 하나. 떡돌이는 분명 흑합 장군이 아닌데.

막상 내가 수사청에 붙잡혀 있을 때, 실제로 흑합 장군이 찾아와서 날 놓아주라 했고, 덕택에 나는 곤란한 처지에서 벗어났다.

두 번째 이상한 점. 흑합 장군 이름으로 내게 꽃 화분이 온 거.

후궁전 여기저기에 소문이 난 모양인데. 흑합 장군은 자기가 보낸 게 아니란 반박을 하지 않았다.

흑합 장군이 그런 데 관심이 없어서 반박을 하지 않은 건 절대 아닐 거다.

처음 흑합 장군과 나 사이에 소문이 났을 때, 그때는 바로 반박했잖아.

그렇다면 결론은, 흑합 장군이 떡돌이에 대해 알고 눈감아준단 건데…….

왜? 그러면 왜 눈감아주지? 친구인가? 친구라 해도 자기 이름을 걸고 짝사랑을 하는데 눈감아 준다고?

난 내 친구가 그딴 짓을 하는 즉시 머리카락을 다 밀어버릴 거다. 물론 난 친구가 없지만.

‘어? 혹시 이래서 나한테 친구가 없나?’

그런데 한참 동안 떡돌이의 정체에 대해 추측해보는 도중이었다.

침실 밖에서 부성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소주.” 하고 불렀다.

“왜?”

부성은 안으로 들어오더니, 문을 꼭꼭 닫아걸고서 내게 작은 목소리로 알렸다.

“소주, 지금 밖에 연얼 군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게 누군데?”

“수오부 군왕 전하의 동생이요.”

부성의 목소리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수오부 군왕이란 말에 나 역시 당혹스러워졌다. 수오부 군왕이라면, 그 사람이잖아. 그제 암살당했다는 그 사람.

그런데 그 사람의 동생이 날 찾아왔다고? 그리 좋은 예감은 들지 않는데.

“알았어. 나갈게.”

떨떠름했지만 거절할 수도 없는지라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자 대번에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내 초라한 사립문 울타리를 더욱더 초라하게 만드는 위풍당당한 태도로 서 있었다.

“인사드립니다, 천 귀인.”

내가 나가자 그녀는 제법 정중하게 인사를 했고, 나도 예절에 맞게 인사했다.

인사를 나누자 그녀가 사립문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면서 내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날 관찰한다기보다는 내 반응을 샅샅이 눈에 담아두려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을 보자 예감이 확신으로 변했다. 어…… 좋지 않아. 역시 이건 절대로 놀러 온 사람 눈빛이 아니야.

하긴. 모르는 사람 집에 친오빠가 암살당한 지 이틀 후에 놀러 가는 게 더 이상하긴 하구나.

분명 내가 그 사건의 목격자인 걸 알아내고서 온 걸 거야.

“돌리지 않고 묻겠습니다, 천 귀인. 천 귀인이 내 오라비를 죽인 자객의 유일한 목격자라 들었습니다.”

역시나.

“처음에는 기몽 장군에게 가보았으나, 기몽 장군은 그와 관련해 천 귀인에게 알아낸 대답이 없다 하였습니다.”

연얼 군주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얼른 손을 저었다.

“알아낸 대답이 없는 게 아니라, 대답할 말이 없어서 하지 못한 거예요.”

혹시라도 그녀가 내게 범인에 대해 알려달라고 할까 봐 미리 약을 친 것이었다.

“목격자인 데다 직접 신고까지 하였는데, 본 게 없다고요?”

그러나 연얼 군주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모양이다. 얼굴 굳어진 거 좀 봐.

“미안합니다, 군주. 내가 본 건 지붕 위를 제비처럼 뛰어다니던 검은 무복뿐이었어요. 그것도 뒷모습인 데다 아주 거리가 멀었지요. 대답할 게 없으니 기몽 장군도 대답을 듣지 못한 거랍니다.”

솔직하게 다시 말했으나 연얼 군주는 딱딱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어쩌면 내 말을 믿지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부정하는 건지도 모르고.

“그렇군요.”

표정이 어두워진 걸 보니 좀 미안하네.

그렇지만 목격자라고 해 봐야, 정말로 밤중에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수상한 복면인을 본 게 전부인걸.

“실례했습니다, 천 귀인.”

그나마 다행이라면 연얼 군주가 곤란하게 더 조르는 대신 순순히 밖으로 나갔단 점이다.

그녀가 인사를 하고 멀리 걸어가자, 초조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던 부성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랐어요.”

“나도.”

빗자루를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붙들고 있던 원웅도 황급히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소주, 이 일 때문에 더 곤란해지진 않겠지요?”

“그렇겠지. 본 게 없는데 뭘 어떻게 하겠어. 연얼 군주가 조사관도 아니잖아.”

* * *

“정말일까요?”

궁궐 밖으로 나가는 길. 군주를 따라 입궁했던 호위가 옆에서 조심히 물었다.

그는 연얼 군주가 천 귀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싸리문 울타리 밖에 내내 서 있던 호위였다.

당연히 그 역시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 사립문 울타리는 허리께밖에 오지 않기 때문이다.

연얼 군주는 슬픔에 잠긴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만일 그렇더라도 무엇이든 본 게 하나는 있겠지.”

“한데 왜 말을 하지 않는 걸까요?”

“얽히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겠지. 황궁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모두 이기적이니.”

고통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린 연얼 군주는 궐 밖에 세워둔 마차에 올랐다.

마부가 핑 채찍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마차가 달그락달그락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궁궐 문을 바라보다가, 연얼 군주는 참지 못하고 마차를 세운 뒤 호위를 불러 지시했다.

“역시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다. 다시 한번 물어야겠어. 천 귀인을 궁궐 외진 곳으로 납치해 오거라. 겁에 질리면 아는 걸 전부 다 털어놓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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