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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2화 (12/283)

##  12화. 얼굴은 모르지만 사모한다

내가 누굴 짚든 그 사람이 범인이 될 거라고?

얼핏 듣기에는 꿀 같은 조언이었다. 여기서 내가 싫어하는 후궁 한 명만 짚으면 그 사람이 엿 된다는 거 아닌가.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이건 꿀 같은 조언이 아니라, 꿀을 발라 덮어둔 함정이란 걸.

‘현재’는 목격자가 한 명이 맞지. 이후 다른 목격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의 말처럼 내 진술만으로도 사람 한명 엿 될 수도 있지.

그런데 목격자가 한 명 더 나온다면? 그 목격자가 나와 전혀 다른 진술을 한다면?

그럼 내가 엿 되는 거였다.

일이 더 나빠지면, 왕 암살 건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해코지하려 했단 누명을 쓸 수도 있지.

다른 목격자도 처지가 마찬가지일 테니, 어쩌면 이 사건이 갑자기 나와 그 목격자 사이의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고.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어느 방향을 가리키건, 설령 진짜로 내가 목격한 대로 말한다 해도, 그 방향에서 지내는 후궁이나 황후는 대번에 내 적이 되는 것이었다.

“왜 말씀이 없으신지.”

내가 침만 꼴깍꼴깜 삼키자 기몽 장군이 은근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생각이 잘 안 나서…….”

나는 시치미를 떼고서 고개를 기웃거렸다.

기몽 장군은 그런 날 빤히 바라보다가 “조언을 하나 해 드릴까요?”라고 또 말을 꺼냈다.

하지 마! 조언 하지 마! 네가 입 열 때마다 더 흠칫흠칫하게 되잖아!

“아니요.”

“괜히 연비마마 편을 들 필요 없습니다.”

조언 하지 말라니까! 게다가 뜬금없이 연비는 왜? 이 남자 연비랑 사이 나쁜가?

대체 연비가 이 와중에 무슨 상관…… 아아. 지도를 다시 살피니 이해가 간다.

연비의 오월궁이 내가 가리킨 방향에 있구나. 제일 처음 있는 건 대중궁이지만, 그 뒤쪽으로 이어지는 지점엔 오월궁이 있어.

즉 기몽은 둘 중 골라야 한다면 연비를 고르는 게 낫다고 조언해주는 건가?

근데 저게 조언이 맞긴 해?

젠장. 머리싸움에는 자신이 없는데…… 어쩌지?

* * *

“계란말이가 옆에 없으니 좀 허하군.”

자다가 눈을 뜬 황제는 빈 옆자리를 쳐다보고 쓸쓸히 중얼거렸다.

황제가 고자가 아님을 증명하려다 되레 이름이 팔려버린 승언은,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지금까지 잘만 주무셨으면서 무슨.

황제의 거시기를 본 호위로 격하된 후 그의 탄탄하고 굳센 충정심에는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또다른 호위 하나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황제에게 보고했다.

“폐하. 천 귀인이 수사청에 잡혀갔습니다.”

물을 따라 마시던 황제가 깜짝 놀라 그릇을 내려놓았다.

“수사청에는 또 왜?”

“경식이 군왕전하을 암살하고 도망치는데, 그 장면을 목격한 모양이었습니다.”

“아니, 그 아이는 그걸 또 왜 보느냐?”

수오부 군왕을 암살한 건 황제가 보낸 그림자였다.

수오부 군왕은 무림의 강하고 사특한 이들과 손을 잡은 후 내내 황제의 자리를 탐내는 언동을 보여왔다.

몇 번의 경고를 해도 무시하는 건 물론 점차 발을 넓히려는 분위기여서, 황제가 결국 군왕이 다른 일로 궁에 며칠 머물게 되자 그림자를 보내 암살케 한 것이다.

그런데 그 광경을 천 귀인이 보았다고? 황제는 기가 막혀 혀를 찼다.

“전에는 갑자기 냉궁에 가 있지를 않나, 이번엔 군부에 잡혀가지를 않나. 왜 이리 사고를 많이 치는 게냐?”

둘 다 원인이 자신이라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뻔뻔스러운 말에, 승언이 입술을 오무렸다.

그는 천 귀인을 좋아하진 않았으나, 황제의 저 발언은 꼭 전해주고 싶었다.

혀를 찬 황제가 침상에서 지시했다.

“흑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이름으로 천 귀인을 빼내라 해라.”

“예, 폐하.”

* * *

- 천 귀인이 수사청의 기몽 장군에게 잡혀 있다. 그대 이름으로 빼내주어라.

흑합은 자다가 황제의 밀명을 받고서 급히 복장을 갖추어 입었다.

옷고름을 묶으며 흑합은 속으로 한탄했다. 또 천 귀인이란 여자인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황제는 자신의 후궁을 만나면서 그가 흑합장군인 척 사칭을 했다.

이를 모른 채 아니라고 소문을 부정했다가 황제에게 혼난 후. 흑합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기 이름을 바쳐야 했다.

궁궐 사람들은 흑합 장군이 황제의 여인을 사모한다고 수군거렸다.

더욱 기가 막히는 건, 그는 천 귀인의 얼굴조차 모른단 점이었다.

그럼에도 황제의 명령으로 귀한 꽃 화분까지 몇 개나 바쳐야 했는데, 이제는 수사청에 빼내러 가야 한다니.

흑합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으나, 꾹꾹 눌러 참고서 밖으로 나가 곧장 수사청으로 달려가 기몽 장군을 찾았다.

기몽 장군은 그의 부름을 무시할 처지가 아니기에, 느릿하게 수사청에서 빠져나와 흑합을 맞이했다.

“무슨 일인가.”

흑합은 자존심을 잠시 한켠에 밀어두고 무뚝뚝한 얼굴로 황제의 지시를 수행했다.

“천 귀인이 여기에 잡혀 있다고 들었는데.”

기몽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자네에게 전했나? 자네 혹시, 내 부하들 사이에 간자라도 심어 놨나?”

“설마.”

“아닌데 이 시간에 어떻게 알고 자다가 달려왔지?”

흑합은 기몽의 도발에 넘어가는 대신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천 귀인을 빼내 줬으면 하네.”

“이유는?”

“…….”

흑합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기몽이 빈정거렸다.

“천 귀인은 수오부 군왕 암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라, 지금 당장은 돌려보내기 어렵겠군. 혹시 그 암살자가 천 귀인이 목격자란 소문을 듣고서, 이번엔 천 귀인 쪽으로 올 수도 있으니. 내가 보호해야겠네.”

“군왕이 암살당했다고?”

“모르고 왔나?”

“…….”

흑합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기몽이 그런 흑합을 비웃었다.

“자네가 천 귀인은 흠모한단 소문이 사실은 사실인가 보군.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헐레벌떡 달려와 빼내려 하다니. 참으로 추한 꼴 아닌가.”

흑합은 억울했으나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기몽은, 무표정 사이로 드러나는 흑합의 감정 변화를 꿰뚫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푸하하 크게 웃고서 흑합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사적인 감정에 휩쓸려서 범죄 사건에 연루된 사람을 무작정 빼내려 하다니. 자네는 군을 통솔할 자질이 하나도 없군?”

그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기몽의 부관이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

“장군님, 방금 폐하께서 태감을 보내어 천 귀인을 풀어주라 명령하셨습니다.”

숨을 헐떡이는 부관을 기몽과 흑합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기몽이 슬쩍 흑합의 눈치를 살폈다.

흑합이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한 채 물었다.

“폐하께서도 군을 통솔할 자질이 없다고 생각하나?”

기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황제폐하와 흑합장군이 한 여인을 구하려 한다……. 재밌는 일이군요.”

흑합 장군이 찾아왔단 소리에 잠시 밖으로 나간 기몽이,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뱉은 말이다.

그의 한마디로 나는 아까의 상황을 모조리 파악할 수 있었다. 떡돌이랑 황제가 날 위해 나서주었구나!

안 그래도 난처한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나 전전긍긍하던 참이었는데. 참으로 잘되었다.

여기서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마지못해서 황후나 연비 둘 중 한 명을 짚어야 할 상황이었는데!

“그럼 이제 난 가도 되나요?”

나는 얼른 일어서며 물었다. 물론 당연히 되겠지만.

같은 생각인지 기몽 장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내가 문을 열고 나가는 걸 막진 못했다.

그러나 이대로 보내자니 열이 올랐나? 수사청의 문을 열고 나가기 전.

기몽 장군이 두꺼운 진흙을 밟듯 터벅터벅 지척으로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머리통을 칠 수 있을 거리까지 다가온 그는, 까만 눈으로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짙게 눈화장을 한 눈매가 덜 휜 반달처럼 가늘어졌다. 그렇게 입가에는 미소를 띤 채 그는 칼 같은 혀를 놀렸다.

“앞으로 지켜보겠습니다, 천 귀인.”

아니, 내가 뭐 어쨌다고요. 왜 갑자기 '천 귀인이 범인인데 황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놓아준다'는 분위기가 된 거야?

“그러세요.”

어쨌든 지켜볼 테면 얼마든지 지켜보라고 하자.

어차피 나는 동영궁 한 귀퉁이 전각에서 늘 먹고 자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 * *

이게 얼마 만에 느끼는 자유의 바람이냐!

수사청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두 팔을 크게 벌려 쭈욱 기지개를 켰다.

오그라들었던 근육이 늘어나면서 몹시 시원해졌다.

어쩌면 수사청 밖으로 나오기 전 보았던 기몽의 표정 때문에 시원한 걸지도 모르고.

아이고, 웃음이 감당이 되지 않게 튀어나오네.

옆으로 해죽 벌어지는 입술을 두 손으로 감추고서, 나는 떡돌이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황제는 여기에 직접 온 것 같지 않았어.

하지만 떡돌이는 분명 이쪽으로 친히 찾아왔다고 했지. 그를 찾아서 고맙단 말을 하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떡돌이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수사청으로 돌아가서, 그곳 입구를 지키는 병사에게 물었다.

“흑합 장군이 여기 오지 않았는가?”

“네, 오셨습니다. 하지만 장군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바로?”

“예.”

“어느 방향으로 갔는데?”

“저쪽…….”

병사가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키자마자, 나는 돌아서서 그 방향으로 달려갔다.

어휴 떡돌이 이 자식, 왔으면 좀 기다렸다가 얼굴이나 보구 가지!

그러나 기몽 장군이 떡돌이가 다녀간 직후 날 바로 풀어준 게 아닌 모양이다.

병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열심히 뛰었지만 떡돌이는 커녕 장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마지못해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자니, 순찰을 위해 돌아다니던 태감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길을 잃어버리셨습니까?”

아니, 라고 대답을 하려고 보니 맞았다. 무작정 병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오느라…….

“맞네.”

“어디로 가셔야 하는지요?”

“동영궁에 가야 하는데, 후궁전 안까지만 데려다주면 이후로는 내가 찾아갈 수 있네.”

“그러면 동영궁 앞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이름 모를 태감의 도움으로 동영궁 앞으로 오자, 내 측근궁녀인 원웅과 부성이 이미 초조하게 그 앞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손을 호호 불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가, 내가 나타나자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달려왔다.

“소주! 무사하셨네요!”

“혹시라도 소주께 불똥이 튈까 두려워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불똥. 튈 뻔했지. 그 생각을 하자 다시 한번 떡돌이와 황제에게 고마워진다. 의리 있는 자식들.

하지만 황제는 내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니, 떡돌이한테라도 확실하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어.

* * *

오늘부로 나는 은혜 갚는 토끼가 될 거다.

달 속에 사는 토끼처럼 열심히 떡을 찧어서 떡돌이에게 그 은혜를 떡으로 갚아야지.

떡돌이의 친절에 보답할 길은 사랑과 떡 둘 중 하나뿐인데, 그에게 사랑을 줄 수는 없으니 떡이라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새벽같이 수사청에 불려 갔다가 온 바로 그날.

나는 여섯 시간을 내리 잔 다음 일어나서 소주방을 찾아갔다.

“귀인께서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요리를 하고 싶은데, 공간을 좀 주게. 재료도.”

“예?”

요리를 맡은 태감과 궁녀는 당황하면서도 내게 구석 자리를 마련해주었고 재료도 주었다.

나는 그들이 준 재료를 이용해 조물조물 떡을 만든 다음 먹기 좋게 쪄서, 희고 얇은 천으로 싸 떡돌이가 지낸다는 건물로 가져갔다.

남궁 바깥쪽으로는 작은 저택 여러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자주 당직을 서는 관리들이나 황궁에서 며칠씩 머물러야 하는 관리들에게 배정된다고 들었다.

떡돌이 역시 그 건물 중 한 곳을 얻어 지낸다고 했지.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중 떡돌이가 머문다는 저택 앞으로 간 후, 나는 저택 앞에서 선 호위병에게 물었다.

“흑합 장군이 안에 있어? 천 귀인이 줄 게 있어 왔다고 전해줘.”

호위병은 알겠다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나오는 그의 낯빛이 몹시 어두웠다.

“집에 없어?”

표정을 살피고서 묻자, 호위병은 당황한 기색으로 쩔쩔매며 말했다.

“천 귀인님. 장군님께서 말씀하시길, 마음은 고맙지만 가져온 건 도로 가져가라 하십니다.”

“그럼 고맙단 인사를 할 테니까 잠깐 얼굴 좀 보자고 전해줘.”

호위병은 다시 들어갔다. 이후 약 일각 정도가 지나 나오는 호위병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욱 어두웠다.

“천 귀인님. 장군님께서 말씀하시길. 인사는 받은 거로 할 테니 그만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전에 떡돌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가 답서를 주지 않았던 일이 떠오른다.

설마.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했으면서. 그새 또 마음이 바뀌어서 날 무시하기로 한 건가? 바로 새벽에 날 구하러 수사청까지 왔으면서?

기가 막혔으나, 안 나오겠다는데 안으로 들어가 끄집어낼 수는 없었다.

“알았어. 고마워.”

나는 시무룩해서 인사를 한 다음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떡돌이의 저택을 떠났다.

‘어림없지.’

정확히는, 떠나는 척했다.

하지만 실제로 떠나진 않았고. 그냥 정문에서 볼 수 없는 사각지대까지 걸어간 다음, 몸을 숨기고서 다시 정문 근처로 잠입했다.

기다렸다가 그에게 선물을 전한 다음, 왜 자꾸 사람들 앞에서는 날 모른 척하냐고 물어볼 셈이었다.

서로 간에 아무 감정도 없고 눈치 보일 것도 없는데, 그런 식으로 피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해 보인다고.

그리고 또…… 그래. 내가 만든 떡을 일단 먹게 한 다음, 맛있다고 하면 도로 압수해야지. 괘씸하니까.

그런데 이를 갈면서 눈에 힘을 주고 정문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드디어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문밖으로 나온 건 새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대충 긴 줄로 묶어 늘어뜨린 남자였다.

동그란 이마가 대나무 같고 잘생겼지만, 우수와 시름에 잠긴 듯한 분위기가 꼭 검은 목련 같은 남자.

‘누구지? 떡돌이 친구인가?’

의아해하는 사이. 그 검은 목련 같은 남자를 따라 나온 남자가, 그 목련을 향해 말했다.

“흑합 대인. 염 귀인께 이 일에 대해 말씀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흑합 대인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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