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궁에서는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
“어제 우 귀인이 내 욕을 하다가 황후한테 혼났다고?”
화창한데 보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느지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빈둥거리다가, 나는 뒤늦게 예법 책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완전히 밖에 나가려는 건 아니다. 그냥, 벽은 없지만 지붕이 있는 곳에 앉아서, 빗소리를 들으며 다시 빈둥거릴 셈이었다.
그런데 부성이 이런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바삭하게 튀긴 쌀과자를 깨물며 그녀를 쳐다보자, 부성이 통쾌해하며 웃었다.
“네! 짜릿해요. 아주 좋아요. 황후마마께서 소주를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은가봐요.”
“아냐, 그렇지 않은 게 아니야. 황후마마는 다 싫어하는 거 맞아.”
전에 냉궁에 가기 전에 만난 황후가 보내던 그 차가운 눈길이 생생한걸.
절대로 아니라고 손을 저은 후 내가 다시 쌀과자를 집자, 부성이 고개를 기웃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적이 있으니까. 하여튼 내 욕을 하다가 혼난 게 아니라, 내 욕도 하고 다른 무언가도 하다가 혼이 난 거겠지.”
“그럴까요?”
“그럼! 근데 부성아, 넌 우 귀인 혼났다는 데 왜 그렇게 좋아해?”
내 편지를 훔쳐서 황후에게 가져다 주었던 건 염 귀인이고, 내게 이상한 걸 먹이려던 건 안비이고, 날 냉궁에 가두라고 한 건 황후인데.
우 귀인이 날 싫어하면 싫어했지, 내 궁녀들이 그녀를 싫어할 이유가 있나?
부성이 대답하기 전에 원웅이 소쿠리를 들고 지나가면서 먼저 툴툴거렸다.
“우 귀인 때문에 소주가 승냥이 소리를 들었잖아요. 넘어질 때 그냥 곁에 있었던 것뿐인데.”
아아. 그때 일 때문에 그렇구나. 나는 아예 까먹고 있던 일인데.
그래도 부성이 왜 저러는지에 대해서라면 납득이 가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다시 과자를 집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원웅이 한숨을 소쿠리를 끌어안은 채 내 곁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넌 또 왜 그래?”
이상해서 묻자, 원웅이 툴툴거렸다.
“폐하께서 소주를 그간 시침에 부르지 않으셨잖아요. 소주가 아팠으니까요.”
“응. 그렇지.”
아픈데 부르면 그거야말로 진짜 못된 새끼지.
“물론 직접 병문안까지 와 주셨지만…….”
“그게 한숨 쉴 일이야?”
“아니요. 단지, 이러다가 은근슬쩍 다른 후궁이 폐하를 시침들까 봐 그래요.”
승언이?
문득 흑합의 뒤에서 늘 등을 두드려주던 승언이 떠올랐다. 황제의 거시기까지 확인했다는 승언이.
하지만 그 사람은 후궁이 아니니까 일단 입을 다물기로.
아아. 승언이 말고 황제가 신경 쓰는 사람이 하나 더 있구나.
황제는 좋아하는 다른 여자가 있는 눈치였지. 나 말고 청적에서 만났던 다른 여자.
우 귀인이 흉내 내려던 진짜 상대.
그 여자랑은 어떻게 되어가지? 그 여자의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 나를 이용한다고 여겼는데. 이제 슬슬 그 여자한테서는 반응이 오나?
* * *
밤이 되었지만 오늘은 경사방 태감이 날 찾아오지 않았다.
원웅과 부성은 ‘내가 아직 몸이 좋지 않아서 부르지 않으신 것’이라 말하면서도 영 섭섭한 눈치였다.
“그래도 다른 후궁도 부르지 않았으니깐요.”
“암요, 우리 소주께서 쾌차하시면 당장 우리 소주를 부르실 거예요.”
너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가 싶지만…… 굳이 안 그래도 서운해하는 애들 기분을 망치진 말아야지.
나는 그렇다고 무조건 동의해주었다.
하지만 며칠 내내 이불말이 상태로 지내다가 홀로 침상에 누워 있자니, 약간 심심하긴 하였다.
이불말이 상태가 그리운 게 아니라. 그냥, 잠들 때까지 티격태격하던 상대가 옆에 없으니까.
혼자 누워 있자니 천장도 낯설고 방도 낯설고, 날 배신한 개원이 그 새끼가 어떻게 됐는지도 궁금하고…….
결국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피풍의를 걸치고서 밖으로 나왔다.
‘청적에 갈까?’
이 시간에는 청적에 가더라도 떡돌이가 없겠지만. 그냥 심심하니까.
그러나 부실한 사립문 울타리를 열고 나가려다가, 나는 마음을 바꿔서 얌전히 평상에 앉았다.
떡돌이와 장난치면서 놀던 데 혼자 가봤자 뭐. 그것도 별로지.
다리를 끌어앉은 채 무릎에 뺨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있자, 낮에 내린 비 탓에 찹찹하고 촉촉해진 공기가 잘 느껴졌다.
다시 개원이 생각이 났다.
무림사적 중 하나로, 이름 자체가 공포의 대명사처럼 통하게 된 나와 개원은 정확히 정반대의 존재였다.
나는 사파였고 개원이는 정파였으며, 나는 악적이었고 그는 영웅이었다.
내 주위엔 사람이 하나도 없이 외로웠으나 개원의 주위엔 그의 눈길을 받고 싶어하는 이들도 우글거렸지.
남녀노소 모두 개원이를 좋아했고, 그를 추앙했다.
비슷하게 강할 거라 평가를 받았으나, 나와 개원이는 그만큼 다른 세상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개원이가 나와 어울리기 시작했을 때,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내게 물들까 몹시 걱정하고 염려했다.
원래도 그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사람들은, 그가 겉으로만 군자인 척하는 또다른 악적일 거라고 수군거렸지.
개원이는 이런 게 싫었던 걸까?
난 아직도 모르겠다. 그가 처음부터 내 뒤통수를 치기 위해 접근했던 건지, 마음이 변해서 내 뒤통수를 친 건지…….
그런데 멍하니 과거 일을 생각해서 그런가.
습격자가 지붕 위를 까만 제비처럼 뛰어다니는 낯익은 풍경이 보이네.
‘천년비일 때 저런 모습 많이 봤는데.’
그래도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습격자는 내쪽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가고 있단 거고, 나는 그냥 여기서 구경을…… 습격자?
멍하니 지붕 위를 쳐다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 무릎에서 머리를 떼고 벌떡 일어났다.
“습격자!”
밤중에 저렇게 몰래 돌아다니는 사람 치고 꿍꿍이 없는 사람 못 봤다.
그 사이 습격자는 점점 더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부성아! 원웅아! 태감들아!”
나는 평상을 두드리면서 깊이 잠든 내 처소 궁인들을 불렀다.
소란을 피우자 문이 발칵 발칵 열리면서 궁인들이 바삐 나타났다.
“무슨 일이세요, 소주?”
“괜찮으세요, 소주?”
“소주, 왜 그러십니까?”
얼굴에 잠이 덕지덕지 묻은 채 나타난 그들은,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고서 화들짝 놀랐다.
“어, 저거, 저거?”
그러나 그 사이, 이미 침입자는 모습을 감춘 채였다.
나는 얼른 태감 둘에게 지시했다.
“침입자가 나타났다고 얼른 위병에게 알리고 와. 혹시 모르니 둘이 같이 다녀오고!”
태감 둘이 멀어지자 원웅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떨었다.
“뭐였을까요? 어휴 무서워요.”
부성도 얼른 내 팔을 잡아끌었다.
“우리 빨리 들어가요, 소주. 겁이 납니다.”
그냥 수상한 장면을 목격한 것뿐인데, 겁이 날 게 뭔가 있어?
나는 속으로 의아하게 여겼지만, 순순히 둘을 따라 내 방으로 돌아갔다.
한바탕 소란을 겪어서인가. 이번에는 빠르게 잠들 수 있었다.
* * *
다음날에도 나는 느지막하게 일어난 다음, 식사를 하고서 청적에 가 수련이나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부성이 급히 나를 깨우는 바람에 억지로 일어나야 했다.
“왜 그래?”
일어나서 보니 아직 해가 제대로 뜨지도 않은 새벽이었다.
붉은 빛이 창문을 통해 어슴푸레하게 들어오고 있었고, 공기 역시 서늘했다.
“왜 벌써 깨워?”
이불에 다시 엎어지며 묻자, 부성이 소리를 죽여 말했다.
“소주, 우리가 본 게 심각한 일이었나봐요.”
“어? 우리가 뭘 봤…… 밤중에 그거?”
“네. 지금 군부 관리가 찾아와서 소주가 진술을 해야 한대요.”
“진술이라니?”
“수오부 군왕의 시체가 발견되었대요.”
수오부 군왕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왕이란 건 알겠다. 아주 높은 지위의 사람이 죽었다는 것도.
“그럼 내가 본 게 자객이었던 거야?”
“모르겠어요. 찾아온 관리가, 범인이 ‘어느 전각’에 들어갔는지만 확인하면 된다고 소주를 깨워 보내달라고 해요.”
지붕 위를 뛰어다니던 수상한 검은 그림자가 자객이었다니.
심지어 그 그림자가 왕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니. 근데 그걸 본 사람이 하필 나라니.
괜히 귀찮은 일에 얽히는 건 아닐까.
몹시 신경 쓰였지만 일단 밖으로 나갔다. 나오라는데 안 나갈 수는 없으니.
전각 밖으로 나가자, 내 처소 주위의 사립문 울타리가 부실해 보일 정도로 잘 차려입은 군관 몇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개중 가장 앞에 선 사람은 머리색이 하얗고 눈화장이 짙어서 유달리 눈에 띄었는데, 딱 봐도 제일 직급이 높아 보였다. 그냥 분위기가.
내가 전각 계단을 내려가자, 그 제일 직급 높아 보이는 사람이 포권을 한 채 허리를 약간 숙이며 물었다.
“천 귀인이십니까.”
여기서 ‘아닌데요?’라고 하면 다른 사람 찾으러 가려나? 아니겠지?
“맞아요.”
바로 수긍하자 그는 다시 포권을 풀며 자신을 소개했다.
“수사청의 기몽 장군입니다. 두 시진 전 목격하셨다는 일 때문에, 천 귀인의 도움을 구하러 늦은 시간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암요, 양해 해드려야지요.”
게다가 양해 안 해 준다는 선택권이 있기는 한가?
“감사합니다.”
그는 딱딱한 목소리로 인사하고는 자신의 부하에게 나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지시했다.
“뫼시어라.”
* * *
기몽 장군과 부하들은 동영궁 밖 외궁 쪽으로 나갔다.
황궁은, 나도 제대로 돌아본 건 아니지만, 어쨌건 내가 알기로 크게 다섯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중앙에 커다란 구역이 하나 있고, 거기서 대각선 방향으로 동서남북에 구역이 하나씩 있는 형태로.
거기서 황궁 전체를 사각형의 지도로 놓고 볼 때 황후과 후궁들이 지내는 곳은 동쪽 구역인데, 이 동쪽 구역은 다시 황궁 전체를 축소해 놓은 것처럼, 중앙에 대중궁을 중심으로 해서 동서남북 방향으로 네 개의 궁전이 있다.
지금 기몽 장군이 나를 데리고 가는 방향은 황궁 지도에서 표현하자면…… 남쪽? 그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그래서인가. 마음껏 구경할 상황이 아니긴 하지만 여기저기 눈동자가 자꾸 돌아갔다.
천소여의 몸으로 깨어난 후 동쪽 구역을 나온 건 이번이 아예 처음이라서.
황제의 시침을 들러 후궁전을 나오긴 했지만 그건 예외다.
시침을 들러 갈 때와 들고 난 후 돌아올 때, 늘 태감이 이불말이를 해서 들고 다녀 주니까.
“천 귀인께서는 입궁 이후로 이곳은 처음 오시겠군요?”
이런. 두리번거리는 게 너무 티가 났나 봐. 말없이 걸어가던 기몽 장군이 뜬금없이 말을 걸었다.
“아 뭐. 그렇죠?”
나는 대충 수긍했다.
실제로 후궁전 안이 어마어마하게 넓은 데다가 그 안에 생활에 필요한 관청이 다 있어서, 굳이 나갈 일이 없다고 듣기도 했고.
별 의미 없이 던진 질문이었나. 기몽 장군은 “그렇군요.” 하고 건성으로 대답한 뒤 더 말을 잇진 않았다.
그러는 사이, 등불을 들고서 가장 앞서가던 병사가 한 성문 앞에서 멈춰섰다.
성문은 열려 있었는데 안쪽에 불을 다 밝혀 놓아서 몹시 밝았다.
게다가 얇은 갑옷 차림이거나 무관 복장을 한 이들이 여기저기 바삐 돌아다니고 있어서, 새벽인데도 분위기는 낮과 다를 바 없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기몽 장군이 가장 근처에 있는 건물을 가리켰다.
기몽 장군은 그 건물에서도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갔는데, 그 방에는 중앙에 놓인 탁자와 의자 두 개를 제외하면 아무 가구가 없었다.
‘휑하다 휑해.’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기몽 장군이 의자 중 하나를 빼 주고는 내게 앉으라고 권했다.
거기에 앉자, 그는 자신은 맞은편에 앉는 대신 바로 질문했다.
“수상한 자가 지붕 위를 뛰어간단 신고를 하신 게 천 귀인이 맞으십니까?”
“맞아요. 까만 야행복 차림이었어요.”
“좀 더 정확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덩치가 아주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움직임이 날렵했어요. 사용하는 보법이 딱 봐도 정파 새…….”
어휴 주둥이 주둥이. 큰일 날 뻔했네. 정파 새끼라고 표현할 뻔했어.
“정파새?”
내가 말을 하다가 멈추자 기몽 장군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되묻는다.
나는 헤헤 웃고서 손으로 파닥파닥 새 흉내를 냈다.
“새처럼 뛰더라고요. 그 뭐냐, 내가 서 있는 방향에서 이쪽으로 갔는데…… 이쪽이 어느 방향이지?”
“지도를 보여드릴까요?”
“그럼 좋죠.”
기몽 장군이 지도를 가져오라 명령하자, 문 밖에서 대기 중이던 부하가 얼른 커다란 지도를 가져왔다.
꽤 세세하게 그려진 지도였다.
지도를 펼친 장군은, 내가 얹혀 사는 안비의 동영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서 물었다.
“여기가 천 귀인이 있던 장소일 겁니다. 어디로 갔는지 방향이 짐작이 갑니까?”
“아, 네. 이쪽으로 갔어요.”
나는 일직선으로 지도에 한 선을 그었다.
그런데 선을 긋고 나니 이거…… 위치가 좀? 황후가 있는 궁전 쪽을 가리키는 것 같잖아?
슬쩍 기몽 장군의 눈치를 보니 그 역시 같은 생각인가 보다.
나는 결국 그 상태로 계속 주욱 선을 그었다. 지도 끝까지 닿도록.
“이 방향으로 가더라고요.”
이러면 내가 황후를 지적한 것처럼 보이진 않겠지? 실제로 황후를 지적하려고 이 방향을 말한 건 아니었다.
“그 후에는 저도 모르겠어요. 무서워서 얼른 제 방에 들어가서 잤거든요.”
“무서운데 잠이 옵니까?”
“……보통 안 그러나요?”
기몽 장군이 약간 인상을 찡그렸다. 보통은 안 그런가?
괜히 눈치가 보여서 나는 손을 허공에 대고 자연스럽게 저었다.
“어쨌든 여기가 끝이에요. 혹시나 싶어 태감에게 말을 전하라 하긴 했지만, 그 외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기몽 장군은 여기서 끝을 낼 마음이 없나 보다.
그는 알겠다고 말하는 대신, 날카로운 눈으로 날 살피며 요구했다.
“어느 전각으로 갔는지 짚으실 수는 있겠습니까?”
“모르겠는데요.”
황당해서 바로 대답했으나, 그는 거듭 부탁하는 척 명령했다.
“그냥 ‘참고’만 할 셈이니 하나만 짚어 보시지요.”
“진짜 모르겠는데요?”
“그래도 한 군데만 짚어 주시지요. 현재 자객을 목격한 사람이 천 귀인 한 명 뿐이어서 그럽니다.”
문득 궁궐에 입궁하면, 눈이 있어도 안 본 척하고 귀가 있어도 못 들은 척하고, 입이 있어도 말 못 하는 척해야 한단 말을 어디서 들었던 게 떠올랐다.
척추가 찌릿해지면서 등골이 싸늘해졌다.
어째 분위기가…… 내가 여기서 ‘여기’ 하고 딱 짚으면 거기를 위주로 수사가 이루어질 것 같은데?
내 말 한마디에 누군가는 왕을 암살했단 누명을 쓸 수도 있단 건가?
굳어 있자니 기몽 장군이 날 향해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 방향을 짚으시든, 천 귀인.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