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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10화 (10/283)

##  10화. 날 때리면 목을 꺾어버리겠어

멀쩡히 나갔던 내가 피투성이가 되어 실려오자 측근 궁녀들은 난리가 났다.

“소주, 정신 차려보세요!”

“우리 소주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소주! 소주!”

기절한 척 눈을 감고 있었지만 원웅과 부성이 난리를 부리는 모습이 선했다.

궁의가 데려온 태감은 나를 내 방 침상 위에 내려주었고, 궁의는 내 팔목을 진맥했다.

그 사이 원웅과 부성은 바쁘게 방을 오가면서 따뜻한 물을 가져오고, 수건에 물을 묻혀 내 이마며 목덜미를 닦아주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이 모든 행동이 느껴졌다.

“기혈이 뒤틀렸군. 대체 무얼 먹었는지 모르겠어.”

“그, 그럼 우리 소주는 어떻게 되시나요? 우리 소주, 위험한 건가요?”

“그 정도는 아니네. 하지만 당분간은 무리해서 행동하지 말고, 드시는 것도 죽 같은 거 위주로. 탕약은 처방해서 보내겠네.”

궁의가 나가자 원웅과 부성은 훌쩍거리면서 안비를 욕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던가, 갑자기 불러서 이상했다던가, 뭐 그런 내용들이었다.

많이 놀란 모양인데…… 일어나서 ‘나 괜찮아’라고 말을 해줄까?

잠시 고민하다가, 나는 이왕 기절한 척한 김에 그냥 한숨 자버리기로 하고서 계속 누워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나.

“소주. 소주.”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날 깨웠다.

바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원웅? 원웅 목소리인가?

그런데 왜 이렇게 소곤소곤 말을 해? 게다가 겁먹은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상하단 생각을 하는 순간.

“가만 두어라.”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낯설지도 낯익지도 않은 목소리.

그러니까 이 목소리가, 떡돌이? 황제? 헷갈리는데. 하여튼 이 둘 중 하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겠어.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목소리가 좀 비슷하구나.

황제는 그윽한 저음이고, 떡돌이는 밝고 높은 목소리라 비슷하단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예, 폐하.”

대답은 부성이 대신해주었다. 황제로구나.

“나가 있어라.”

조요한 발소리와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문이 드르륵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도 들렸다.

이후로는 완전한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이제야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 상황을 파악했다.

기절한 척했다가 진짜 잠들었나 봐! 그 사이에 황제가 날 보러 찾아왔고!

‘아이구야 이를 어째?’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그냥 적당히 기절한 척하다가 일어나서 밥 먹고, 찡얼거리다 쉬려고 했는데.

내가 대체 몇 시간을 잔 거야? 아니, 황제는 왜 굳이 내 방까지 찾아왔어?

내가 피를 너무 심하게 토했나?

속으로 걱정하고 있는데 이마 위에 뜨끈하고 커다란 게 올라왔다.

‘분명 손일 거야.’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했다.

황제는 내가 시침을 드는 내내 내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손가락이 뭐야. 내 몸을 똘똘 감싼 이불조차 거둬주지 않았지.

그런데 갑자기 이마에 손을 올리자 괜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저절로 발가락이 오그라드는 걸 참느라 나는 호흡을 일부러 느리게 조절했다.

다행히 호흡을 조절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호흡은 모든 무공의 기본 토대이니까.

이마에 내려앉았던 손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그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아니, 거두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떨어졌던 손은 자연스럽게 이마 부근에 튀어나온 잔머리 등을 뒤로 넘겨주었다.

그 손길을 받자, 시침을 들 때 그가 딱 한 번 내게 손을 댔단 게 떠올랐다.

그때도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조심스럽게는 아니었지만.

내가 여기서 눈을 부릅뜨고서 ‘뭐해요?’라고 물으면…… 황제가 어떻게 반응하려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그가 완전히 손을 거두어들였다.

‘이제 나가려나?’

심장이 콩콩 뛰어서 혹시 내가 깨어 있단 걸 들키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내가 깨어 있단 걸 눈치채지 못했다.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어딘가에서 의자를 끌어다가 침상 가에 놓고는 거기에 앉았다.

빳빳한 옷과 옷이 스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어색하게 시간만 흘려보냈다.

* * *

“독 먹고 쓰러졌다더니. 멀쩡하네?”

산책을 핑계로 청적에 올라와 수련을 조금 하다가, 바람이 하도 좋기에 잠시 쪼그리고 앉아 있을 때였다.

떡돌이가 놀리듯 물어보면서 내쪽으로 다가왔다. 웬일로 손에는 떡이 없었다.

“네 본체는 어디 가고 혼자 와?”

그걸 보고 내가 묻자 떡돌이가 흠칫해서 되물었다.

“본체라니?”

“떡 말이야 떡. 넌 떡에 영혼이 담겨 있잖아.”

“누가 그래?”

“승언이가 그랬어.”

내 말에, 모습을 감춘 채 숨어 있던 승언이 일부러 멀쩡한 나무를 흔들어 그런 적 없다고 항의했다.

떡돌이는 승언이 쪽과 내 쪽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기웃하다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런데 진짜 몸은 괜찮아? 크게 다치진 않았단 말은 듣긴 했는데.”

“피를 한사발 토했는데 괜찮겠어? 몸이 아주 부실해졌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깨어났을 때 실제로 좀 피가 부족해서 어지러웠으니까.

떡돌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게 걱정할 정도로 안 좋은 건 아닌데.

“그래서 심각한 표정으로 있던 건가?”

너무 뻥을 과하게 쳤나 싶어서 입술을 우물거리고 있자, 떡돌이가 다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방금 조용히 있던 건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안비 생각을 하는 거야?”

“안비?”

“너한테 독을 먹인 안비.”

“아.”

오늘 아침에 원웅에게 듣기로는 3개월 간 근신을 명령받았다지.

차를 끓인 안비의 궁녀는 황후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을 거라 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비가 내게 뭘 먹인 건지는 황후가 심문을 끝내면 알게 되겠지.

하지만 떡돌이가 나타나기 전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건 그게 아니었다.

“그럼?”

떡돌이가 다시 물었다.

나는 그의 무릎을 찰싹 내리쳤다.

“왜 이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너 정말 채신머리 없구나?”

“.......”

떡돌이는 입을 다물고서 자기 다리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내 손을, 이어서 내 눈동자를 보더니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왜 갑자기 웃어? 의아해서 쳐다보자, 그가 중얼거렸다.

“널 걱정한 내가 바보같군. 아주 멀쩡하잖아.”

“날 걱정했어?”

“독을 먹고 피를 토했다는데 걱정하지.”

“그래?”

“넌? 내가 그랬다고 하면 걱정 안 하겠어?”

“어휴, 장군씩이나 돼서 독에 당할 정도면 장군직 반납하구 집에 가야지.”

“…….”

농담인데. 떡돌이가 섭섭한가 보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주섬주섬 뭘 꺼내서 내 입에 꾸역꾸역 갖다댔다.

얼결에 입에 물고서 냄새를 맡아 보니 약떡이었다.

뭐야. 이 자식, 나는 이거나 물고 닥치고 있으란 거야?

“잠결에 느꼈는데. 황제가 내 머리를 만지다 간 것 같아.”

어쨌든 먹으라고 준 떡이니, 다 먹은 후. 나는 그가 오기 전에 내내 생각하던 일을 털어놓았다.

떡돌이는 부스럭거리면서 약떡을 하나 더 꺼내다가 깜짝 놀라 꺼내던 떡을 떨어트렸다.

아니, 이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야?

의아해서 쳐다보자, 떡돌이는 황급히 떡을 도로 들어올리며 물었다.

“잠결이었다며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실은 안 자고 있었거든.”

“잠결이라며?”

“왜, 잠들랑 말랑 걸치고 있는 상태 있잖아. 정신은 있는데 반쯤 멍한 그런 상태.”

“…….”

떡돌이는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떨어트린 떡을 자기 입에 가져가다가 황급히 도로 내렸다.

그러고는 다시 큼큼큼 헛기침을 하고서 물었다.

“그래서. 황제가 네게 뭘 어떻게 하던데?”

“세상에서 나같이 예쁜 선녀는 처음 봤대.”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떡돌이가 황당하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거짓말쟁이가 있나…….”

“지금 황제폐하한테 거짓말쟁이라 한 거야?”

내가 눈을 부릅뜨고 되묻자, 그는 기가 막힌 얼굴로 “너. 너 말이다. 너.” 하고 딱 잘라 말했다.

사실이었다. 황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내 머리맡에 앉아 있다가 갔다. 아주 오래도록 조용히 앉아 있었지.

하지만 이런 말을 하긴 좀 부끄럽잖아.

“진짜야.”

“기가 막히는구나. 사람 안목을 어디까지 끌고 내려가는 건지 모르겠군.”

“너 자꾸 폐하 안목을 무시할래?”

떡돌이가 자기 뒷목을 잡더니 끙끙 소리를 냈다.

채신머리, 채신머리! 나는 다시 떡돌이의 무릎을 타타타탁 두드렸다.

떡돌이는 그제야 뒷목에서 손을 뗐다. 여전히 표정은 썩어 들어갔지만.

“그래, 선녀같이 예쁜 천 귀인. 황제한테 칭찬 들어서 좋겠다. 좋겠어.”

“질투해?”

“천만에.”

“걱정마. 난 황제보다 떡돌이 네가 좋아.”

“…….”

떡돌이는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괜히 안 그런 척 자기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서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좋으면서. 일부러 저러는 거다.

코웃음을 치다가 나는 예전에 냉궁에 갇힐 즈음에 그에게 질문하고 싶었던 게 이제야 기억나 물었다.

“맞다, 편지!”

“편지 왜?”

“내가 편지를 제대로 보냈는데 네가 답서를 안 줬잖아.”

“음. 미안해. 내 생각엔 착오가 생겨서 내쪽에 안 온 모양이야.”

“그럼 내가 떡돌이, 널 부르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돼? 편지를 보내면 네가 씹거나, 아님 또 붙잡혀서 냉궁에 갈지도 모르잖아.”

“안 보낸단 선택지는 없어?”

“난 여기에 친구가 너 밖에 없어.”

천년비보다는 천소여가 덜 외롭긴 하다. 천소여에게는 측근 궁녀인 원웅도 있고 부성도 있으니.

하지만 천소여 역시 외톨이와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원웅과 부성이 섭섭하려나?

하지만 그 둘은 친구라고 하기엔, 윗사람이라 잘 대해주는 건지 아닌지 아직 구분하기 어려웠다.

직급을 떠나서 나와 편하게 말을 주고 받아주는 건 떡돌이 뿐인걸.

떡돌이는 내 말에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겨 있더니, 우리가 앉아 있는 바위를 툭툭 두드렸다.

“이 밑에 놔두면 내가 찾아갈게.”

“또 읽고 무시하면-.”

“무시하지 않을게.”

“좋아. 약속?”

“약속.”

떡돌이와 헤어진 후.

나는 그가 제대로 약속을 지키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 얼른 내 처소로 돌아간 다음 짧은 편지 한 장을 적어 청적을 돌아왔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 그 편지를 끼워 넣고서 다시 처소로 돌아갔다.

* * *

우 귀인은 천 귀인이 싫었다.

원래 그녀는 천 귀인에게 별 감정이 없었다.

천 귀인은 경쟁 상대로도 부족했고 친분을 나누기에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적 사건 이후, 우 귀인은 천 귀인이 몹시 싫어졌다.

후궁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모습을 보여서 가까스로 얻은 황제의 관심은, 천 귀인의 계략으로 모조리 사라졌다.

사실은 계략도 뭣도 아니었으며 둘 다 똑같이 오해를 했을 뿐이지만, 우 귀인의 입장에선 천 귀인이 자신에게 일부러 교묘한 술수를 부린 것으로만 여겨졌다.

이후 천 귀인이 황제의 시침을 연달아 들으며 총희로 비상했기에, 그런 오해는 더욱 깊어졌다.

우 귀인이 천 귀인에게 복수를 다짐한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하지만 안비처럼 천 귀인에게 오라가라 할 만큼의 권한은 없기에, 우 귀인은 몸을 웅크린 채 늘 복수할 기회를 엿보았다.

천 귀인이 자주 오가는 청적을 몰래몰래 살피는 것도 복수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찌해도 천 귀인과 마주칠 일이 적었고, 비웃음을 당한 후로는 황제와 부딪칠 일도 없었다.

그곳에 갈 때마다 이름 모를 무사들이 막아서서 제대로 들어가지조차 못했다.

예전에는 분명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도.

그런데 드디어 꼬리를 잡아냈다.

우 귀인은 커다란 바위 아래에 숨겨놓은 서신을 꺼내고서 소리 없이 웃었다.

이 서신은 분명 천 귀인이 가져다 둔 것이다.

아까 그녀가 들뜬 얼굴로 이 서신을 움켜쥐고서 달려가는 걸 보았으니까!

우 귀인은 서신을 챙겨서 얼른 대중궁을 찾아갔다.

대중궁에서는 황후가 야외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나와 있었다.

곁에는 황후와 사이가 가까운 촉비가 함께 있었다.

“황후마마.”

우 귀인이 찾아오자, 황후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로 날 찾아왔지?”

볼일 없이도 황후를 찾아가 아양을 떠는 후궁들은 많았으나, 그들 모두가 황후의 총애를 얻는 건 아니었다.

우 귀인은 황제에게 총애를 받지 못했으나, 황후에게도 총애를 받지 못했다.

문안을 올릴 때 정도만 얼굴을 보는 사이인데. 우 귀인이 찾아와 보여드릴 게 있다고 하자 궁금한 모양이었다.

우 귀인은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를 숨기며, 자신이 들고 온 편지를 보였다.

“이걸 보십시오. 냉궁에 갇혀 있다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천 귀인이 또다시 사내에게 서신을 씁니다.”

천 귀인을 냉궁에 가둔 지 하루만에 황제의 명령으로 풀어준 전적이 있는지라, 황후의 표정에 짜증이 어렸다.

편지, 천 귀인, 이 두 단어만으로도 불쾌한 듯했다.

“무슨 내용이지?”

황후가 묻자, 우 귀인이 공손히 말했다.

“남의 서신을 제가 펼치기는 어려워 직접 가져왔으니, 마마께서 살펴보시지요.”

공손한 말이었으나, 만약을 대비해 한 발을 빼는 발언이기도 했다.

이를 눈치챈 황후는 코웃음을 짓고서 명령했다.

“네가 가져왔으니 네가 읽어보거라.”

“예. 황후마마.”

슬쩍 한 발을 빼두려 시도하긴 하였으나, 이 서신은 분명 천 귀인이 쓴 게 맞다.

확신을 가진 우 귀인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서신을 펼치고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떡! 떡떡떡! 떡! 떡떡떡! 쑥떡이 약떡이고…….”

그녀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우 귀인을 지켜보던 촉비가 풋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돌렸다.

황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본후에게 장난을 거느냐?”

우 귀인은 안색이 파래졌다.

“아, 아닙니다, 분명 서신에……!”

우 귀인은 황급히 꿇어앉았다.

천 귀인이 쓴 게 확실한데. 누가 보아도 은밀한 연애편지로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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