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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9화 (9/283)

##  9화.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고

황제가 또다시 날 밤에 불렀다.

“세상에, 연달아 이틀이나 시침을 들게 되시다니……!”

태감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내게 오자, 부성은 입을 가리고서 비명을 뱉었다.

원웅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태감과 궁녀들이 나를 굉장한 사람처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저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룻밤만에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다니! 저 사람은 거시기의 신이야!

어깨를 쭉 펼치고서 턱을 치켜올렸다. 정말로 황제가 내 손아귀에 있는 것처럼.

굳이 난 어젯밤 내내 이불말이 상태였단 걸 고백하진 않았다.

황제도 말 안 하는데 내가 할 필요 없지.

하지만…… 궁금하긴 궁금하다.

황제는 자기 얼굴에 쓴 면사조차 안 벗을 거면서 왜 날 또 부른 거지?

* * *

“폐하. 왜 절 또 부르셨어요?”

그래서 밤에 만났을 때 대놓고 물었다.

그러나 방 안으로 들어온 황제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겉옷 두 겹을 벗어서 아무렇게나 놓았다.

그러고는 나를 옆으로 세 바퀴 굴려서 침상 위에 자기 자리를 만들고 거기에 누웠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내가 두른 이불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주제에.

“폐하. 왜 절 또 부르셨나요?”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한 번 더 질문했다.

정말로 궁금했다. 내가 가진 의혹처럼, 그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에 날 이용해 그 여자의 질투심을 사려고 이러는지, 아니면…….

“천 귀인.”

더 생각할 게 있는데. 황제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상념을 끊었다.

대답해주려는구나! 나는 얼른 대답했다.

“네, 폐하.”

“그러고 있으니 너 꼭 계란말이 같구나.”

그러나 황제가 한 말은 대답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내가 황당해서 이불 안에서 꿈틀거리자, 그가 완전히 눕다 말고 상체를 일으켜고서 물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너희들에게 중요한 건, 짐이 어떤 이유로 누구를 옆에 두는지가 아닐 텐데? 중요한 건 짐이 널 두 번이나 불렀단 거 아닌가?”

어쩐지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래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폐하가 절 두 번이나 부르면 승언이 섭섭해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이 말을 하는 순간.

벽 너머에 숨어 있는 황제의 호위가 벽을 탕 탕 두드렸다.

‘아. 혹시 승언인가? 근데 저래도 돼?’

나는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는데. 막상 황제는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입술을 꽉 깨물고서 이불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가고 어깨는 부들부들 떨렸다. 그게 다 옆에서 보였다.

의아해하고 있자니, 황제는 한참만에야 턱에서 힘을 빼고서 고개를 젓고서 내 머리카락을 마구 문질렀다.

“자라, 계란말이.”

* * *

“소주, 그거 아세요? 궁인들이 다들 소주에 대해 수군거려요.”

황제의 시침을 두 번이나 받게 된 다음날이었다.

기본 체력을 기르기 위해 제자리뛰기를 하고 있자니, 원웅이 바느질거리를 들고 평상으로 걸어가며 흐뭇하게 말했다.

표정을 보니 욕을 하는 건 아닌 듯하고.

“뭐라고 하는데?”

“폐하께서 소주를 총애하신다고요. 연달아 폐하의 시침을 든 사람도, 폐하의 침전에서 밤새 주무시고 온 사람도, 소주가 처음이잖아요.”

“그래?”

“그럼요.”

원웅은 뿌듯한 얼굴로 바느질거리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곧 소주의 세상이 올 거예요. 빨리 직책도 올라가시고, 소주의 개인 궁도 받으시고……!”

원웅은 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났는데. 다가온 사람이 부성이 아닌 모양이었다. 부성이라면 저렇게 놀랄 이유가 없지.

나는 운동하던 걸 멈추고. 원웅과 같은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궁녀가 서 있었다. 막 도착한 듯했는데…… 원웅이 왜 저렇게 놀라는 거지?

의아해서 원웅을 보자, 그녀가 빠르게 말해 알려주었다.

“소주. 안비마마의 상궁녀세요.”

안비가 누구인지는 나도 알았다. 나, 그러니까 천소여가 얹혀 사는 동영궁의 진짜 주인이지.

게다가 비의 위치에 있으니 귀인인 천소여와는 그 위치가 꽤 다른 편이고.

하지만 그런 안비의 상궁녀가 왜 날 찾아왔지?

모든 후궁들이 마찬가지였지만, 안비 역시 내가 죽었다 깨어났는데도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았잖아?

의아했지만 안비가 보낸 사람을 내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녀를 향해 들어와도 좋다고 말했다.

안비의 상궁녀는 울타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내게 인사를 올렸다.

“무슨 일이야?”

인사를 마치길 기다렸다가 묻자, 안비의 상궁녀가 친밀하게 웃으며 권했다.

“천 소주, 안비마마께서 천 소주와 함께 차를 마시고 싶으니 바쁜 일이 없다면 불러 오라 하셨습니다.”

“바쁜 일은 없는데.”

“그러면 안비마마께 가시지요, 천 소주. 마침 나흥에서 올라온 맛 좋은 감주도 있습니다.”

원웅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죽었다 깨어났을 때는 얼굴도 안 비쳤으면서, 황제의 총애를 받자마자 부르는 게 기분 상한 거겠지.

“알았어.”

하지만 난 그냥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천년비로서의 삶은 전투적이었고 치열했고 거칠었다. 사방이 적이었지.

이제 난 평화를 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단 이유만으로 세 번째 손가락을 날리고서 ‘날 보고 싶으면 그쪽이 오라고 해!’라고 외치고 싶진 않았다.

절대로, 지금 몸으로는 그렇게까지 할 힘이 없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난 평화주의자다. 그러니까……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지 않으면 나도 시비를 걸진 않을 거야.

오라고 하면 가면 되지. 오라고 해놓고 때리면 죽여버리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어.

* * *

안비의 전각은 문짝이 없는 아치문 너머에 있었다.

안비가 사용하는 건물의 반은 기둥과 천장만 있지 벽은 없는 탁 트인 형태였고, 남은 방은 벽에 둘러싸여 있었다.

안비로 추정되는 여자는 기둥 뿐인 방 안에 앉아 정원의 사각형 모양 연못을 구경하는 중이었는데, 그 옆에는 빈 의자가 있었고, 의자 사이에는 작고 길쭉한 상이 있었다.

상 위에는 소꿉놀이에 사용할 법한 아담하고 화려한 찻잔들이 놓여 있는데…… 나랑 마시려고 준비해 둔 건가?

내가 다가가자 안비로 추정되는 여자가 우아하게 웃으며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왔는가, 천 귀인.”

“안비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내가 예법에 맞게 인사를 올리자, 안비는 우아하게 웃고서 자기 옆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얼른 그곳으로 가 앉았다.

“천 귀인은 나날이 아름다워지는군.”

내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안비는 한 호흡을 쉰 후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칭찬을 하며 웃었다.

안비의 칭찬이 진심인지 모르겠다는 건, 내가 꼬아서 듣는 게 절대 아니다.

다만, 안비는 원래 천소여의 얼굴과 이름도 관심이 없었잖아?

그런데 더 아름다워졌는지 아닌지 알긴 할까…… 뭐 이런 합리적인 추측이지.

어쨌든 칭찬을 하니까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대답했다.

안비는 내 대답을 듣자 희미하게 웃으며 또 중얼거렸다.

“사랑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지.”

글쎄. 개원이는 내 사랑을 받고서 쓰레기가 되었는데.

어쨌든 직급 높은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 그런 걸로.

“그럼요, 그럼요.”

나는 일단 무조건 안비의 말이 옳다고 맞장구쳤다.

안비는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러고는 직접 주전자를 들어서 그 소꿉놀이용 같은 작은 잔에 쪼르르 차를 따르고는 내게 내밀었다.

“한 잔 마시거라.”

나는 얼른 두 손을 내밀어 잔을 넙죽 받았다.

그리고 잔을 입가로 가져갔는데…….

‘안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차가 상했을 리는 없으니, 무언가를 탄 거겠지?

몸에 좋은 약을 타진 않았을 거다. 상식적으로, 그런 걸 몰래 타서 주진 않으니까.

그렇다면 안 좋은 무언가를 탔단 건데.

내가 찻잔 바닥을 바라보기만 하고 마시지 않자 안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마시지 않지?”

“차를 안 좋아해서요.”

내가 대답하자마자 옆에 서 있던 안비의 상궁녀가 얼른 말했다.

“그건 아주 귀한 차이니, 싫어하더라도 한 번 마셔보세요.”

너나 마시라고 차를 입에 부어주고 싶은 대사네.

하하 어색한 미소를 띠고서 나는 차를 식히는 척 후후 물었다.

“뜨거울 것 같으니 일단 좀 식히고요.”

그러나 머리를 여전히 빠른 속도로 굴려댔다.

안 마시면 안비가 ‘날 의심하는 거냐’면서 불쾌해하겠지?

같은 직책인 염 귀인도 나쁜 마음을 먹자 내게 피해를 끼쳤는데.

직급이 몇 단계는 높은 안비라면, 날 불쾌해하는 순간부터 무자비하게 공격해오기 시작할 거야.

뭐 이딴 걸 차에 타서 주는 것부터가 이미 공격이지만…….

최소한 독은 아니겠지. 내가 여기서 차를 마시고 즉사하면 누가 봐도 안비가 범인이니.

그렇지만 분명 몸에 나쁜 게 들어있단 걸 알면서도 마실 수는 없었다.

“차를 오래 식히는구나.”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옆에서 안비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좋아. 결정을 내렸다.

약간 아프긴 하지만 지금은 이 수가 최선이겠어.

“마셔야지요.”

나는 안비를 향해 웃어 보이고서, 얼른 찻잔을 입술에 대고 위로 넘겼다.

잔이 너무 작아서, 한 모금 마시자 내용물이 모조리 입 안에 들어왔다.

안비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순간.

나는 재빨리 목 부근의 기혈에 충격이 가도록 했다. 다행히 이 정도는 내공이 없어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러자 목 안의 생살을 꼬집는 불쾌한 느낌과 함께 무언가 울컥 치솟았다.

찝찝한 향과 약간의 쇠맛이 섞인 피였다. 진짜 내 피.

“크허어어억.”

나는 그 피를 머금고 있던 찻물과 섞어서 얼른 죄다 뱉어버렸다.

“까악!”

이를 지켜보던 안비의 상궁녀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가슴에 한 손을 대고서 ‘흐억 흐억’ 소리를 내면서 눈을 부릅뜨고 안비를 보았다.

“마마…… 가슴이…… 목이……!”

그러고서 다시 피를 뱉자, 안비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외쳤다.

“궁의! 궁의를 데려오라!”

태감들이 우왕좌왕 뛰어 다녔다.

나는 그들을 향해 입으로 피를 ‘푸우우웃’ 사방으로 뿜어주었다.

에라이 몹쓸 것들! 너희 다 한패잖아!

내 피가 닿은 이들은 극독이라도 묻은 양 깍깍 거리며 펄쩍 뛰었다.

안비 역시 몸을 피하긴 마찬가지.

속으로 낄낄 웃으면서 나는 괴로운 표정으로 색색거렸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태감들이 궁의를 데리고 달려왔다.

그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혼절한 천 귀인을 보더니, 펄쩍 뛰고서 안비의 처소에서 데리고 나갔다.

“어, 어쩌지요 안비마마?”

멀어지는 관복을 보며 상궁녀가 겁먹은 얼굴로 덜덜 떨었다.

“갑자기 피를 저렇게 토해내다니…….”

안비는 눈을 꼭 감았다.

“내가 당했구나.”

안비의 태감도 안색이 파래져서 물었다.

“누가 한 짓일까요?”

“모르지. 하지만…… 누군지 몰라도 참으로 악독하고 머리가 좋아. 나와 천 귀인을 동시에 보내려 하다니.”

측근궁녀는 아예 훌쩍이면서 연신 쏟아지는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안비는 이를 갈았다. 물론, 그녀도 떳떳한 입장은 아니었다. 차에 좋지 못한 걸 섞어서 마시라고 주었으니.

하지만 그녀가 섞은 건 피임 효과가 있는 약초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각혈을 하면서 쓰러지다니. 이 일이 어떤 식으로 튀어나갈지 몰라 두려워졌다.

“골치 아프게 되었어.”

안비는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의자에 앉아 이마를 짚었다.

황제에겐 수많은 후궁이 있었으나 그들 중 아이를 가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딸이든 아들이든 첫째 아이를 낳는다면, 그 사람은 한순간에 직책에 상관없이 가장 존귀한 몸이 될 수 있었다.

당연히 후궁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관리들 모두 눈에 불을 켜고서, 다른 후궁이 먼저 회임하지 못하게 막고 막았다.

안비는 자신이 나쁜 짓을 시도했단 건 알았으나, 그게 큰 문제라 여기지 않았다.

그녀들에게 있어 황손을 본단 건, 황제의 사랑이니 뭐니 하는 유치한 문제가 아니니까.

“정말 곤란해졌다.”

다시 중얼거린 안비는, 사람들이 몰려오는 발소리를 듣고 이마에서 손을 뗐다.

“마마를 잡으러 오나봐요!”

측근궁녀가 덜덜 떨며 외쳤다. 가까워지는 발소리는 정말로 두렵게 들렸다.

안비도 얼굴이 창백해졌으나, 상궁녀에게 차분하게 지시했다.

“이 일로 난 냉궁에 갇히거나 더 큰 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움직임이 제한되겠지. 그러니 너희가 누가 내게 이런 짓을 했는지 꼭 밝히도록 하여라.”

잠시 후 아치문을 지나 한 무리의 덩치 큰 태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안비에게 다가와 팔을 거칠게 붙잡고 끌어내자, 궁녀와 태감들이 흐느끼면서 “마마! 마마!” 불러댔다.

안비는 덤덤하게 그들을 따라갔다.

태감들은 안비를 대중궁으로 끌고 가 팽개치듯 놓았다.

안비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황후가 다가와 일갈했다.

“폐하의 후궁을 독살하려 하다니. 안비, 네가 미쳤구나!”

서슬 퍼런 호통이었으나 진짜로 화가 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안비는 이걸 눈치챘지만, 굳이 내색하는 대신 손을 털고 제대로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황후마마.”

“네가 한 게 아니면? 네 궁 네 처소 네 정원에서 네가 준 찻잔으로 네가 준 차를 마시고, 네가 옆에 있었으며 주위엔 온통 네 사람들 뿐이었는데. 그럼 누가 이런 짓을 한단 말이냐!”

“하지만 저는 정말로 아닙니다, 황후마마.”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럴듯하게 하라, 안비.”

딱 잘라 말한 황후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차갑게 명령했다.

“차를 끓인 궁녀는 내가 직접 심문하겠다. 또한 이 일과 별개로 너는 삼 개월 간 근신하라. 이후 처벌을 더할지 덜할지는 궁녀를 심문한 후에 알리마.”

안비와 함께 잡혀 온 궁녀들 중, 차를 끓였던 궁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태감들이 그녀를 어딘가로 끌고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안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한 짓이든, 이 일은 꼭 복수할 거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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