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거사가 이루어졌을까
잠자리를 가지자고 불러 놓고 이런 식으로 나오면 몹시 곤란하다.
나는 자발적으로 온 게 아니라, 황제가 불러서 어쩔 수 없이 온 건데.
하지만 황제는 자기가 날 부른 적이 없다는 듯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눈만 보이는데도 그게 티가 났다.
그런데 저 얼굴 면사는 대체 몇 개가 있는 거지? 볼 때마다 입 가렸다, 눈 가렸다, 형태도 바뀌고, 색도 가끔 바뀌고 그러네. 나름 치장인가.
어쨌든 황제의 표정을 보자 나도 덩달아 곤란해졌다.
‘천 귀인’이 날 말고 또 있나? 다른 사람을 불렀는데 내가 왔나? 나 도로 가야 되나?
꼭 잠자리를 가질 필요는 없지만, 다른 사람과 헷갈려서 불려 왔다는 게 민망했다.
“저 잘못 왔습니까? 갈까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묻자 황제는 손을 저었다.
“되었다.”
약간 체념조의 말투였다.
그 말투를 듣는 순간 나는 기분이 좀 더 나빠졌다.
내가 뭐 지원해서 온 것도 아니고. 원치 않는 이불말이를 하고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런데 사람을 저렇게 귀찮아하다니.
그러나 상대는 황제였기에 마구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폐하는 폐하가 폐하란 데 안심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는 게 불만스러워서, 결국 한소리를 뱉었다.
황제는 픽 웃으면서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다.
“내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저건 고도의 계략이었다. 여기서 저 말에 휩쓸리면, 안 하려고 작정한 말을 해버리게 되지 않는가.
그건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난 바보가 아니었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황제는 다시 한 번 코웃음을 치더니 걸치고 있던 흑색 장포를 건성으로 벗었다.
스르륵 소리를 내며 장포가 바닥에 떨어져 흩어졌다.
황제는 안에 입은 옷도 한 손으로 대충 고름을 풀러서 옆으로 던졌다.
흥, 잘난 척 하면서 벗기는! 어차피 벗어 봤자 보이는 건 햇볕을 보지 않아 허여멀겋고 빼빼한 몸일 거면서!
‘어라?’
아니잖아?
그런데 웬걸. 아니꼬운 마음에 힐긋 옆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가 옷을 벗자 드러난 건 깎아놓은 것처럼 반듯한 근육이었다.
황제라면 앉아서 업무를 많이 볼 테니 날씬해도 배가 나왔으리라 여겼는데. 그는 군살 하나 없이 매끈했다.
“와……!”
저절로 감탄사가 나오는구나.
그런데 어째서지? 홀랑홀랑 양파까듯 혼자 잘 벗던 황제가, 갑자기 날 쳐다보더니 마지막에 벗은 옷을 슬그머니 주워서 도로 입었다.
왜 도로 입어? 의아해서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덩달아 인상을 찌푸리고서 날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생각났다.” 하고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뭐가 생각났는데? 의아해서 쳐다보자, 그가 나를 이불째 조금 뒤로 밀어내더니, 침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너는 흑합 장군과 서로 연모한다는 소문이 난 그 귀인이로구나.”
서로 연모하기는. 떡돌이가 날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건데.
하지만 내가 반박할 틈도 없이 황제가 이어서 바로 질문을 던졌다.
“내게 할 말이 없느냐?”
“폐하, 잘하세요?”
할 말을 해보라고 해서 했는데. 황제가 흠칫했다.
“뭐?”
그러고는 자기가 뭘 잘못 들었단 듯 귀를 문지르고서 다시 물었다.
“방금 무어라 했느냐?”
그래서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다시 대답해주었다.
“폐하는 잠자리 기술이 훌륭하신지요?”
면사 위로 드러난 황제의 눈이 얼어붙었다. 그는 자신이 들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
이윽고 그는 짧게 헛웃음을 뱉더니, 침상 위쪽에 등을 기댄 채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내가 훌륭한지 아닌지가 무슨 상관이지?”
“큰 상관이 있지요.”
“어째서?”
“폐하의 기술이 형편없다면 제가 실망할 테니까요.”
“…….”
황제는 좀 기분이 상한 듯했다.
물론 그가 기분이 상하건 말건 나와는 상관 없는 문제였기에, 나는 약간 몸을 옆으로 돌려 그를 쳐다보며 부탁했다.
“폐하, 일단 면사를 좀 벗어 보시겠어요?”
“면사는 왜.”
“얼굴을 보여주셔야지요.”
“얼굴은 또 왜.”
“그럼 몸이라도 보여주세요.”
면사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턱에 힘이 꽉 들어가는 게 보였다.
“몸은 또 왜?”
“몰라서 물으세요?”
“모르니 묻는 게 아니냐.”
“제게도 눈이 있으니까요.”
“!”
“제가 이렇게 곱게 단장하고 왔는데, 폐하는 꽁꽁 싸매고 있으면 전 뭘 보고 즐기란 건가요?”
황제는 잠시 내 눈을 들여다보았고, 나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잠시 쳐다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가 천천히 이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날 꽁꽁 싸매고 있는 이불을 우선 벗겨주려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이제야 몸을 좀 움직일 수 있겠어.
얼마나 태감들이 똘똘 내 몸을 감아두었는지, 아까부터 몸이 갑갑해 죽을 지경이었는데.
‘어?’
그러나 황제는 내 이불을 벗겨주는 대신, 나를 힘 줘 옆으로 굴렸다.
침대 안쪽으로.
“뭐 하세요?”
질문을 던지면서 나는 한 바퀴를 데구르르 굴렀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황제는 나를 더 굴렸다.
두 바퀴를 데굴 구르고 나니 눈앞이 어지러웠다.
“뭐 하시냐니까요?”
다시 물었지만 그는 한 번 더 나를 안쪽으로 굴렸다.
“폐하!”
갑갑해서 외쳤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날 밀어내고 만든 자리에 조용히 누워서 이불을 꼭 덮었다.
뭐야.
“폐하? 거시기는요?”
당황해서 물었지만, 그는 자기 귀를 틀어막고는 확 등을 보이고 돌아누웠다.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기가 막혀서! 제가 불러 놓고서는!
“폐하, 그럼 이불이라도 벗겨 줘요!”
다시 요구했으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예쁜 뒤통수를 쳐다보다가 나는 이를 악물고 씩씩거렸다.
저 나쁜…… 나쁜 황제 같으니라고! 잠자리를 가지자고 불러 놓고서는 사람을 이렇게 버려둬?
하지만 아무리 항의해도 황제는 말 한마디 섞어주지 않았다.
결국 혼자 구시렁거리다가 나는 제풀에 지쳐서 잠들고 말았다.
* * *
이후 눈을 떴을 땐 황제는 이미 보이지 않았고, 태감만이 한 단 아래의 바닥에 서 있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태감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으면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일어나셨군요.”
그리고는 침상 바로 앞까지 와서 허리 굽혀 인사했다.
“폐하의 성은을 얻게 된 걸 축하합니다, 천 소주.”
상당히 들뜬 목소리였다.
나는 태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축하한다고?
이보세요, 지금 내가 아직 이불말이 상태인 거 안 보여요?
딱 봐도 ‘아무 일도 없었어요’ 상태잖아.
“앞으로 천 소주의 앞길이 탄탄해지겠습니다. 폐하께서 천 소주가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태감은 진심으로 보였다.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태감이 이렇게 칭찬해준 진짜 이유는, 이불말이 상태로 다시 내 처소에 옮겨진 다음, 원웅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보통은요, 폐하의 시침을 든 후에 다시 자기 전각으로 돌아와서 자요, 소주.”
“정말?”
“예. 저희도 소주께서 곧 오실 거라 생각하고서 밤새 대기했는걸요.”
“아…….”
“그런데 아침까지도 오지 않으셔서, 둘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원웅은 상기된 얼굴로 날 동여맨 이불을 풀어주며 속삭였다.
“폐하께서 소주를 마음에 품으셨나 봐요.”
* * *
황제는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아니, 아예 내 벗은 몸을 보지도 않았지.
하지만 다른 후궁들은 시침 후 바로 내보내면서, 나는 밤새 옆에 두고 잤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건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해야 하는 건가 ‘특별한 경우’라고 해야 하는 건가.
‘혹시…… 처음에는 그냥 날 엿먹이려고 이불말이 상태로 뒀는데, 나중엔 깜빡하고 진짜 이불이라 착각한 거 아냐?’
어라. 생각하고 나니 꽤 그럴듯한데? 잠결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잖아?
스스로 발휘한 대단한 통찰력에 놀라서, 나는 멍하니 서성이던 걸 멈추었다.
그때였다.
“혼자 뭐 하는 거지?”
떡돌이가 내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늘 그렇듯 손에는 떡을 든 채로.
저놈의 떡은 왜 맨날 들고 다니는 거야?
황당해 쳐다보자 그가 찰떡이라면서 떡 하나를 물려주었다.
받아서 우물우물 먹고 있자니, 떡돌이가 다시 물었다.
“혼자 뭘 하길래 왔다 갔다 반복했어?”
“그걸 봤어? 보고 있었어?”
“안 보고 싶은데 내가 보는 방향에 네가 있었어. 그보다 뭐 하고 있었냐니까?”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
나는 손에 묻은 떡가루를 툭툭 그의 옷에 대고 털면서 대답했다.
떡돌이는 연한 노란색 가루가 묻은 자기 옷을 내려다보다가, 자기 손을 내 어깨에 대고 툭툭 같이 털고서 물었다.
“무슨 생각?”
“황제 거시기 생각.”
툭툭 털던 손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허공을 쳤다.
“왜 그래?”
또 다리에 힘이 풀렸나 싶어 쳐다보자, 그는 자기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서 말했다.
“넌 내가 태어나서 본 모든 사람, 남녀노소 합한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주둥이가 위험해. 알아?”
그런 얘기는 많이 들었지.
무림사적으로 악명을 떨칠 때, 날 쫓아온 무인들 중에는 나와 말을 섞다가 검을 뽑는 이들이 많았다.
내가 입을 우물거리면서 입가에 묻은 가루를 털자, 떡돌이는 한숨을 내쉬면서 내 옆 바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떡 하나를 내게 더 건넨 뒤 무릎 위에 팔과 턱을 괴고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 시늉을 했다.
그러다가 내가 떡을 다 먹고 또 그의 옷에 묻은 가루를 털자, 자기 손도 내 옷에 털면서 물었다.
“넌 내가 널 좋아하는 걸 알면서. 황제에게 안길 때 내 생각이 안 났어?”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정신없어서, 그런 생각은 할 틈이 없었어.”
그보다 떡돌이 얘, 방금 제 입으로 날 좋아하는 걸 인정했어. 본인은 모르나?
히죽히죽 웃으면서 쳐다보자, 떡돌이가 “왜?” 하고 묻는다.
고개를 젓자, 그가 다시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느라 그리 정신 없었는데?”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닌 생각이 뭔데?”
“황제 거시기 생각 했다니까?”
“!”
떡돌이는 입을 꾹 다물더니, 내 등에 뭐가 묻었다면서 텅텅텅텅 두드렸다.
아무리 봐도 고의로 두드리는 모양새라서 그의 발등을 꽉 밟자, 떡돌이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갑자기 제자리에서 세 바퀴를 돌다가 내게 항의하듯 물었다.
“왜 자꾸 황제의 그…… 부분을 생각하는 건데?”
“내가 말하는 거시기는 그 거시기가 아니야, 변태야.”
“너…… 너!”
떡돌이가 대체 혼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다.
그는 갑자기 자기 뒷목을 잡더니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가 손을 내리고서 숨을 색색 고르더니 또 캐물었다.
“그럼 네가 생각했단 그거. 그건 뭔데?”
“두 가지가 있어.”
“두 가지나?”
“말해줄까?”
“말해줘.”
고개를 끄덕인 떡돌이가 다시 얌전히 바위 위에 와서 앉았다.
나는 그를 약간 밀어낸 후, 옆에 나란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내가 이불말이를 당한 채 밤새 생각했던 의혹을 두 가지 중 하나를 알려주었다.
“있지, 내 생각엔 황제가 고자 같아.”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떡돌이가 사레에 걸려 기침을 해댔다.
“왜 그래? 괜찮아?”
놀라서 묻자, 그는 목이 막혀 얼굴이 벌겋게 된 채로 나를 향해 외쳤다.
“아니야!”
그 사이, 떡돌이가 데리고 다니는 호위가 달려와서 떡돌이의 등을 두드려주고 돌아갔다.
떡돌이는 한참만에야 얼굴빛이 원래대로 돌아와서 다시 한 번 말했다.
“누가 그딴 소릴 해? 황제는 절대 고자가 아니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뭐?”
“직접 봤어?”
“뭐? 어?”
“그게 아니면 왜 그렇게 확신해?”
“…….”
떡돌이는 이번에는 기침하지 않았다.
가만히 무릎에 손을 얹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며 “승언아!” 하고 부르기만 할 뿐.
그러자 늘 달려와서 떡돌이의 등을 두드려주는 그 호위가 이번에도 바람같이 나타났다.
“예, 나리.”
그가 떡돌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자, 떡돌이는 승언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얘가 보았다. 얘는 흠. 비번일 땐 나랑 다니지만, 원래는 폐하의 호위라.”
그 말이 끝나자 승언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떡돌이를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단 눈길이었다.
“아닌 모양인데? 표정이 억울해 보이는데?”
내가 그 표정을 눈치채고서 예리하게 짚자, 떡돌이는 고개를 젓고서 승언에게 사과했다.
“네 비밀을 밝혀서 미안하다, 승언아.”
승언은 입을 꾹 다물고서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 상태로 3초를 있던 그는, 결국 턱에 힘을 꽉 쥐고는 괜찮다고 웅얼거렸다.
떡돌이가 손을 젓자 승언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떡돌이는 흐흠 흐흠 헛기침을 하고서 내게 다시 물었다.
“알았지? 황제는 고자가 아니야. 증인도 있고.”
“그럼 남색가야?”
“!”
눈을 홉뜬 채 나를 바라보던 떡돌이는, 자신의 부채를 꺼내 빤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네 입을 세 대만 때리고 싶다.”
그런 짓을 했다간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내가 비록 지금은 무공을 다 찾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찾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 무공을 찾았을 때, 나는 부채로 세 대 얻어맞은 복수를 톡톡히 할 자신이 있었다.
미래의 자신에게 다행스럽게도, 떡돌이는 내 입을 부채로 때리는 대신 도로 부채를 집어넣고서 물었다.
“그래, 생각했던 게 두 개라며. 하나는 그렇다 치고. 다른 하나는 뭔데?”
“내가 알기로 황제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거든? 왜, 너도 그때 같이 있어서 할지? 우 귀인이 그 여자가 나인 줄 알고 따라 하려 했는데 아니었잖아.”
그날 나와 떡돌이가 처음으로 말을 길게 텄으니 당연히 기억하겠지.
떡돌이는 “그 날”이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서, 내가 이불말이 당한 채 밤새 생각한 두 번째 의혹을 뱉었다.
“내 생각엔, 황제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의 질투심을 자극하기 위해서 일부러 나한테 시침을 들라 한 것 같아.”
“아닌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떡돌이가 대번에 대답했다.
하지만 난 내 말이 맞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불조차 안 벗겨줄 거면서 굳이 밤새 데리고 있을 필요가 뭐가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