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떡이나 먹어!
자기가 아주 유명한 사람이라던 흑합의 말은 정말이었다.
“흑합이 누구야?”
나는 내 처소로 가자마자 측근 궁녀인 부성을 불러다 물었는데, 질문을 던진 지 1초도 안 되어 대답이 튀어나왔다.
“장군님이요.”
“유명해?”
왠지 밀리는 느낌이 들어서 물었지만, 부성은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단 투로 대답했다.
“그럼요. 아주 유명한 분이세요.”
이 나라에 자기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엄청 뻐기더니. 정말 유명하긴 하구나.
“왜요? 그분에 대한 기억은 좀 떠오르시나요?”
애초에 없는 기억이 떠오를 리가.
하지만…… 그래. 그러고보니 문안을 갔을 때, 후궁들이 흑합이란 장군에 대해 소곤거리던 건 기억난다.
얼굴도 잘생겼고 몸매도 좋고 가문도 뛰어난데다 능력도 있고 신분까지 높은데, 정혼하는 족족 깨진다며 성격에 문제 있는 게 아니냐고 수군거렸지.
아아. 맞아. 그 남자구나.
늘 떡을 쥐여주어서 좀 허당처럼 보였지만, 잘 생각해보니 내가 만난 흑합도 아주 잘난 얼굴이었다.
눈썹이 짙고 눈매도 깊은 데다 콧대가 수려하고, 그 아래로 떨어진 입술마저 예뻤지.
“소주?”
내가 갑자기 혼자 심각해지자, 부성이 눈을 빛내며 날 불렀다.
“왜 그러시는데요? 정말로 기억이 좀 돌아왔나요?”
“그 남자야.”
“네?”
“흑합 장군이, 볼 때마다 나한테 음식을 주던 그 남자라고.”
“네에?”
부성이 입을 가리고 펄쩍 뛰었다.
어디 있다가 듣고 온 건지, 원웅도 신발 한 짝이 벗겨질 정도로 바삐 뛰어와서는 같이 펄쩍 뛰었다.
“정말인가요, 소주?”
“흑합 장군과 얘기를 해 보셨어요?”
“응. 아까.”
원웅과 부성은 ‘꺄꺄’ 소리를 내더니 제자리뛰기를 빠르게 하다가, 자기들끼리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다.
그러고는 눈을 반짝이며 확신에 찬 어조로 번갈아 내게 외쳤다.
“장군이 소주를 좋아하는 거예요!”
“그 장군은 장점이 한가득한데, 정혼하는 족족 다 깨지나봐요. 왜 그러나 했더니, 소주를 마음에 둬서 그런 거였어요!”
“기억 잃기 전엔 왜 이런 말씀을 안 해 주신 거지, 소주는?”
“소주, 더 얘기해주세요. 네?”
원웅과 부성이 저렇게 재촉하니 더 얘기해주고 싶긴 하네. 별거 없기도 하고.
하지만 더 얘기를 해주려면 우 귀인이 황제 앞에서 허공에 주먹질을 했단 걸 알려야 하는데.
그건 꽤 재밌는 장면이었지만 남들에게 소문낼 장면은 아니었다.
“더 얘기할 거리는 없어.”
결국, 나는 우 귀인의 체면을 위해서 입을 다물고 그냥 거기까지만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 * *
천년비는 거기에서 딱 잘랐지만, 궁 안에서는 소문이 쉽게 퍼지는 법이었다.
흑합 장군이 천 귀인을 사모한다더란 이야기는 궁녀들 사이에서 쉬쉬 퍼지다가, 결국 후궁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후궁들은 황제의 여인들이었으나, 흑합 장군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기에 다들 이 일에 관심을 가졌다.
“천 귀인? 천 귀인이 누구였나요?”
“왜, 동영궁에 얹혀사는…….”
“아아. 하하, 있는지 없는지 티도 안 나는 그 여자?”
“생각났어. 연비의 동생이 아니었던가?”
“정말인가요? 연비마마의 동생이라고요? 연비마마의 동생은 영빈 아니었나요?”
“어쨌든 흑합 장군이 그 여자에게 관심이 있다니, 흥미롭군요.”
“성격 나쁜 장군과 존재감 없는 우울한 후궁이라니.”
대부분의 후궁들은 스쳐 지나가는 화젯거리로 그 소문에 대해 떠들었다.
며칠 후 다른 소문이 터지면, 금세 잊어버릴 그 정도의 소문으로만 취급하면서.
하지만 염 귀인은 그 소문을 몹시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흑합 장군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다.
그렇다보니 이 소문을 그저 흘려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소문을 듣자마자 바로 흑합 장군을 찾아가 대놓고 물었다.
“장군. 궁중에서 도는 소문에 대해 들었나요?”
흑합은 친우와 바둑을 두기 위해서 막 연무장에서 돌아온 터였다.
그는 친우에게 다른 방에서 기다리라고 한 뒤, 염 귀인의 질문에 대답했다.
“무슨 소문입니까?”
“그대가 천 귀인을 연모하고 있단 소문이에요.”
염 귀인은 혹시 소문이 진실일까 두려워, 두 손을 꼭 쥐고 흑합을 바라보았다. 파르르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가 몹시 가여워 보였다.
흑합은 미간을 살풋 찡그리고서 즉시 대답했다.
“전 천 귀인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정말인가요?”
“예.”
염 귀인은 가슴에 손을 대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기억을 잃었으니 새로이 궁중 예법을 익혀야 한다고 해서, 책을 끌어안고 평상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였다.
“화나! 짜증 나! 나쁜 것들!”
원웅이 벌컥 화를 내고 발을 탕탕 구르면서 정원으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안 졸았어.”
나는 얼결에 눈을 부릅뜨고 변명하다가, 들어온 이가 원웅이란 걸 발견하고서 다시 눈에 힘을 풀었다.
“소주우!”
그러나 원웅은 우는 소리를 내며 내 앞으로 와서는 들고 있는 바구니를 끌어안고 울상을 지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어쩔 수 없이 상대해야겠구나, 싶어서 나는 책을 덮고 물었다. 아직 좀 졸렸지만.
“있었어요.”
원웅은 얼굴까지 빨개져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데?”
내가 묻자마자, 원웅은 미리 말할 준비라도 해둔 것처럼 울분을 토해냈다.
“찻잎을 가지러 갔는데, 소주방 잡것들이 자기들끼리 막 낄낄거리잖아요!”
잡것이래. 궁중 사람들은 다 얌전한 단어만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보다.
“뭐라고 낄낄거리던데?”
“어떤 후궁이 직접 흑합 장군에게 소주를 좋아하는지 물어봤는데, 흑합 장군은 소주를 본 적도 없다 그랬대요!”
“뭐? 진짜?”
“네!”
원웅은 바구니를 옆에 놔두고는 허공을 다리로 차면서 온몸을 털어댔다.
“너무 속상해요! 그 잡것들이, 소주가 일부러 관심을 끌려고 거짓말을 한 거라 수군거린다고요!”
“진짜 나쁘네! 그런데 흑합 장군이 날 연모한단 얘긴 어쩌다 걔네한테까지 퍼진 거야?”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소주방 궁인들 뿐만 아니라, 태감들도 막 자기들끼리 비질하다 수군거리구…….”
원웅은 시무룩해져서 시선을 떨구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그냥 잠깐 스치듯 한 이야기가 바로 퍼지다니.
무림인들 사이에서 ‘궁궐에서는 벽에도 귀가 있다’는 말이 돌았는데. 딱 맞는 말이지 않나.
게다가…….
“괘씸한데?”
“그렇죠? 흑합 장군처럼 잘난 사람이 소주를 좋아한다니까, 다들 괜히 부러워서 그래요!”
“아니, 흑합 장군 말이야.”
자기 입으로 자기 이름을 밝혔으면서. 다른 사람한테는 날 본 적도 없다 했다고?
그 길로 나는 곧장 청적으로 달려갔다.
거기에 간다 한들 흑합, 아니, 흑합이 뭐야? 그놈은 이제 떡돌이다.
그쪽으로 간다 한들 떡돌이를 만난단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얌전히 전각에 틀어박혀 있자니 분이 차서 견딜 길이 없었다.
혹시라도 청적에서 흑합을 만난다면 아주 단단히 따져야지.
‘어라, 저기 있구만.’
다행히 이 분노가 하늘에 닿았나. 떡돌이는 청적에 있었다.
커다란 바위에 그림처럼 앉은 채 풀피리를 만들어서 불었다 뗐다 하고 있다.
‘어디서 수묵화인 척이야!’
나는 씩씩거리면서 달려가서, 손을 허리에 짚고 그의 앞에서 호통쳤다.
“흑합이 아니라고요?”
떡돌이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나와?
심지어 그는 눈웃음까지 지었다. 그러고는 재밌다는 투로 물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았어?”
이제 자기가 누군지 알겠냐고? 기가 막혀서! 저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내게 자기 이름을 알려줘 놓고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날 본 적도 없다고 거짓말하고.
그래놓고는, 이중적인 태도가 들통났는데도 저렇게 당당하게 굴다니. 의도가 아주 시커멨다.
아는 척하지 말란 거지.
자기는 유명한 장군이지만 나는 저기 남의 궁에서 곁방살이하는 말단 후궁일 뿐이란 거지.
알고 지내기엔 내가 딸리니, 남들 없는 데서만 아는 척하잔 거지.
“암요!”
내가 다시 외치자, 떡돌이가 시험하듯 물었다.
“누군데?”
누구긴 누구야!
“잘나신 떡돌장군 아니신가!”
호통을 치고서 홱 돌아섰다. 내가 화가 났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다른 데 가진 않았다. 내가 화가 났다는 걸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하지만 떡돌이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왜 없지?’
반응을 기다리다 지쳐서 곁눈질해 보니, 그는 소리를 죽인 채 어깨를 떨며 웃고 있었다.
“왜 웃어요?”
도끼눈을 뜨고 묻자, 그는 입을 막은 채 고개를 저으며 허공에 손까지 저었다.
“배가…… 숨이…… 웃겨서 숨을 못 쉬겠어…….”
“웃는 얼굴엔 가래를 뱉지 못한다고 하죠. 지금 그걸 염두에 두고서 내게 이러는 건가요?”
“살려줘…….”
떡돌이는 배를 잡고서 계속 헐떡거렸다. 일부러 웃는 게 아니라 진짜로 웃음이 멈추지 않아 힘겨워 보였다.
의아해서 보고 있자니, 전에 그가 떡을 먹다 사레에 걸렸을 때 등을 두드려 준 그 호위가 다시 나타나서 떡돌이의 등을 또 두드려주었다.
떡돌이가 가까스로 진정되자, 호위가 나를 향해서 경고의 손짓을 날린 후 뒤로 물러났다.
주인이나 호위나 진짜 웃기는 쌍잎식물들이었다. 날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간 건 떡돌이인데, 왜 나한테 경고를 해?
“천 귀인.”
“…….”
“이봐, 천 귀인.”
“…….”
“대답하지 않을 거야?”
“먼저 날 모른 척했잖아요.”
“내가? 내가 언제?”
“와. 모른 척하는 거 봐. 바로 몇 초 전만 해도 다 알아들었으면서!”
떡돌이는 큼큼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허리를 폈다.
“아니, 정말로 몰라서 그래. 제대로 설명해봐.”
또 수묵화 흉내 내기는! 얼굴만 잘나면 다인가! 아니다. 사람은 얼굴 외에도 중요한 게 여러 가지 많다.
그중 하나가 날 놀려먹지 않는 거고.
“소원대로 아는 척하지 않을 테니, 이젠 오다가다 마주쳐도 막 떡 주고받고 그러지 맙시다.”
난 차갑고 단호하게 말한 후 홱 몸을 돌려서 얼른 청적을 빠져나와 내 전각으로 돌아갔다.
평상에 앉아 책을 탁 펼치고서 팔짱을 껴고 씩씩거리자, 그제야 속이 좀 가라앉았다.
먼저 통성명을 해놓고는 무시하는 사람이라니. 참으로 비열하다.
무림에만 이상한 놈들이 많은 줄 알았는데. 궁궐도 다를 바 하나도 없구만!
* * *
바람처럼 나타났던 천 귀인이 바람처럼 가버렸다.
월요는 천 귀인이 다녀간 사이 얼결에 떨어트렸던 풀피리를, 발 옆에서 다시 주웠다.
“승언.”
그가 나지막이 부하의 이름을 부르자, 비밀리에서 호위를 서는 승언이 나타나 옆에 부복했다.
“예, 폐하.”
“천 귀인이 방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하겠나?”
“흑합 장군이 천 귀인을 사모한다는 소문이 잠시 돌았습니다.”
“그래?”
“예.”
월요는 입은 웃고 눈썹은 찌푸렸다. 사정을 다 듣지 않아도 대충 어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흑합이 소문을 듣고서 천 귀인을 모른다고 했나보군.”
“예.”
월요는 흑합이 참 고지식하다고 중얼거렸다. 남의 이름을 멋대로 도용한 사람이 할 법한 말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승언은 월요의 부하이지 흑합의 부하가 아니기에, 이번에도 “예.” 하고 수긍했다.
승언은 머뭇거리다 물었다.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폐하? 흑합 장군이 많이 당황했을 겁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정체를 숨기고 계신다지만, 천 귀인은 이미 폐하께 너무 많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어쩔까, 중얼거린 월요가 풀피리를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월요는 그럴수록 풀피리에서 풀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이 풀냄새는 아까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간 천 귀인과 흡사한 냄새이기도 했다.
숨을 크게 쉬었다 내뱉으며 풀냄새를 한껏 들이켠 월요는, 그후에도 좀 더 고민해보다가 지시했다.
* * *
아무리 봐도 거기서 거기로만 보이는 궁중 예절책을 베개 삼아 낮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이건 단순한 낮잠이 아니었다. 낮잠을 자면서 떡돌이에 대한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시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문 밖에서 기뻐하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궁금해서 문을 빼꼼 열자, 마당, 그러니까 내 방과 싸리 울타리 사이의 그 좁은 공간에 커다란 꽃화분이 놓여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 꽃화분이 보통 꽃화분이 아니었다. 얼핏 보기에도 어마어마하게 값비싸 보이는 화분이었다.
게다가 그 위로 왕관이라도 쓴 마냥 대범하게 솟아나온 저 난초라니!
아니, 세상에? 저기에 흙 위를 장식하듯 뿌려져 있는 색깔 있는 돌멩이는 뭐고? 보석도 아닌데. 색을 칠한 건가? 신기해라.
“이게 다 뭐야?”
놀라서 원웅에게 묻자, 원웅이 펄쩍펄쩍 뛰면서 외쳤다.
“흑합 장군이 보내온 선물이랍니다, 소주!”
흑합 장군…… 떡돌이가?
“진짜야?”
“그럼요, 소주.”
화분을 들고 온 일꾼 하나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정말입니다, 소주.” 하고 원웅의 말에 보탬을 주었다.
내가 팔짱을 끼자 원웅은 허공, 아마도 소주방이 있는 방향을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거봐 우리 소주 말이 맞잖아! 모르는 사이는 무슨! 거짓말쟁이들은 자기면서!”
나는 뿌듯하게 화분을 바라보다가 내 방으로 들어가 책을 펼쳤다.
그 남자, 나한테 선물까지 보낸 걸 보면 계속 알고 지내고 싶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