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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후궁으로 깨어나다-4화 (4/283)

##  4화. 고의로 물을 먹인 건 아니다

“생각해봐요. 청적에서 만난 여자가 내가 아닌 그대란 걸 폐하가 아신다 해서, 지금 폐하께서 내게 보이는 관심이 그대에게 옮겨갈까요?”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옮겨 오길 원하는 건 아니지만 왜 저렇게 확신하는지 모르겠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요.”

내가 팔짱을 끼고서 그녀를 쳐다보자, 우 귀인은 부드럽게 웃고는 고운 손길로 내 어깨를 쓸었다.

“반대도 마찬가지예요. 폐하는 내가 청적에서 만난 사람이 아니란 걸 알면 내게 관심이 식으시겠지요.”

그녀의 손은 버들가지 같아서 신기했다. 어깨에 닿는데도 꼭 구름이 닿는 느낌이었다.

“그대가 폐하께 보인 ‘그 행동’과 내게 느낀 동정심, 이 두 가지가 합쳐져서 폐하의 관심을 받은 거예요. 둘 중 하나라도 깨어지면 폐하의 관심은 사그라져요.”

이윽고 손을 떼더니 살랑살랑 어딘가로 걸어가던 우 귀인은, 갑자기 확 몸을 돌리며 영리하게 웃었다.

“하지만 폐하께선 이미 내 얼굴을 보았으니, 내가 폐하의 관심을 가지겠단 거예요.”

“……저기. 제가 기분 안 나쁘게 들으려고 하고는 있는데요. 안 나쁘게 들리지가 않는데요?”

우 귀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날 도와주고 입을 다문다면 그대에게 보상을 할 거예요.”

“보상을 어떻게 할 건데요?”

“손을 잡자는 거죠. 궁중에선 혼자 살아남을 수 없어요. 그러니 무시 받는 우리 두 사람도 힘을 합쳐야 해요.”

우 귀인은 두 손을 부릅 쥐더니, 며칠 전에 받은 모욕을 떠올리듯 입술을 깨물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보자 알 수 있었다. 일부러 넘어진 거였든 아니었든, 그녀가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는 걸.

확 돌아선 그녀는 내 두 손을 가져다가 꼭 쥐고서 말했다.

“우리는 혜비와 촉비처럼 될 수 있어요. 어때요?”

혜비랑 촉비가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도와주지 뭐.

어차피 난 황제와 엮일 마음도 없다. 내 도움을 받고 우 귀인이 잘되어서 본인 말처럼 날 도와주면 그걸로 된 거고.

잘되고 날 무시하면 뒤에서 욕 한 번 하면 된 거니까.

“알았어요. 알려줄게요.”

“천 귀인!”

감동에 겨워서 눈시울을 반짝이는 우 귀인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인 다음, 나는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잘 봐요.”

그리고 두 손으로 주먹을 쥔 다음 몸을 약간 낮추었다.

“똑바로 봐요.”

우 귀인은 동작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날 진짜로 잘 보는지 한 번 더 확인한 뒤, 난 두 주먹을 차례로 허공에 대고 훅 훅 휘둘렀다.

부성이 싫어하는 거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청적에서 한 독특한 행동은 이거 밖에 없어서.

황제가 어떤 행동을 보고 귀엽다 생각했다면 분명 이거였다.

바람처럼 내 주먹이 허공을 향해 몇 번 내질러졌다 돌아온 후. 나는 주먹을 피고서 짠! 하고 양손을 옆으로 펼쳤다.

“이거예요.”

우 귀인은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진짜 그거 맞아요?”

“이거 말곤 짐작하는 게 없는데요.”

* * *

“원웅, 원웅.”

“네, 소주.”

“혜비랑 촉비가 누구야? 여기 후궁이야?”

“네. 희원궁마마와 청천궁마마예요.”

태감은 빗을 든 채 싸리 울타리 안쪽을 쓸고 있었고, 원웅은 그 곁에서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다가 내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오히려 호칭이 더 어려워졌네. 더 길어졌어. 혜비 촉비가 더 부르기 쉽겠다.

“어쨌든 후궁이란 거지?”

“네. 왜요?”

“우 귀인이 나더러 두 사람 같은 사이가 되자고 하길래.”

그 말에 대한 해석은 찻잎 가루를 들고 나타난 부성이 해주었다.

“혜비마마랑 촉비마마는 절친한 친구세요. 혜비마마가 총애를 받도록 촉비마마께서 도우셨고, 이후 폐하의 총애를 얻은 혜비마마께서 촉비마마를 도우셨지요.”

아아. 그냥 결탁하잔 뜻이었구나.

“우 귀인이 그래요?”

부성이 코웃음을 쳤다.

“응.”

“폐하의 관심을 못 받고 있는 상황은 같다지만, 그래도 우 귀인과 우리 소주는 상황이 다른데. 주제넘네요.”

부성은 우 귀인을 싫어하나? 어쨌든 이후 우 귀인에 대한 화제는 지나갔다.

원웅와 부성이 싫어할 것 같아서, 나는 청적과 황제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

우 귀인에게 황제가 반한 내 행동을 알려주었단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날, 점심 도시락을 싼 다음 일찍 전각을 빠져나와 청적으로 갔다.

우 귀인이 황제에게 진짜로 내가 알려준 그 행동을 할까? 그게 몹시 궁금했다.

아니, 허공으로 주먹질을 하는 게 내 습관이긴 한데. 이게 좀, 억지로 하려고 하면 민망한 습관이긴 하니까.

‘여기쯤이면 되려나?’

어쨌든 풀이 푹신한 곳에 쪼그리고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서도 체감상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우 귀인은 나타났다.

황제와 같이 온 건 아니었다. 홀로 나타난 그녀는, 청적을 자주 드나든 것처럼 이 주위를 산책하며 돌아다녔다.

황제는 이후로도 시간이 좀 지나서야 나타났는데, 여전히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우 귀인은 황제가 오리란 걸 전혀 몰랐던 것처럼 인사를 올렸고, 황제는 고개를 끄덕여 우 귀인의 인사를 받았다.

이후 두 사람은 지지부진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기대한 장면이 나오지 않자 서서히 졸음이 와서 하품을 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몸을 좀 풀어도 될는지요?”

우 귀인이 황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제가 그러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몇 걸음 황제에게서 물러났다.

‘하는구나!’

내가 가르쳐준 그 동작을 하려는 거야!

‘과연 효과가 있을까?’

그 사이, 언제 또 나타난 건지 전의 그 흑색 장포 남자가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나란히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우리가 같이 구경이라도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떡을 한 쪽 내밀었다.

여기서 ‘넌 뭐야! 가!’라고 했다간 다같이 들통날 판이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떡을 받아들고 씹으며 우 귀인을 구경했다.

때마침 그녀는 황제 앞에서 훅훅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날리는 중이었다.

아…….

‘이래서 부성이 나한테 남들 앞에선 하지 말라 했구나.’

내가 할 땐 아무 생각 없었는데. 남이 하는 걸 보니 그리 보기 좋지는 않네.

그래도 황제는 내가 저러는 걸 보고 호감을 가졌다니 괜찮겠지?

나는 속으로 낄낄 웃으면서 우 귀인의 패기에 박수를 친 다음, 기대감을 잔뜩 품고서 황제 쪽을 쳐다보았다.

황제를 본 후에야, 그가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어서 눈 외엔 표정을 볼 수 없단 걸 알아차렸지만.

하지만 그냥 얼핏 보기에도 별로 즐거워하는 내색은 아니었다.

예상대로 황제는 고개를 젓더니 갑자기 뒷짐을 지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잘한다거나 이상하다거나, 한마디 말도 없었다.

“폐하?”

얼굴이 빨개진 채 내가 가르쳐 준 동작을 한 우 귀인은, 당황해서 황제를 쫓아갔다.

황제의 호위들이 단체로 우르르 멀어지는 걸 보다가,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우 귀인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별개로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배를 잡고 얼마나 웃어댔을까. 시선이 느껴져서 배에서 손을 떼자, 웬일로 흑색 장포가 사라지지 않고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쳐다봐?”

도시락을 챙겨 일어나며 묻자, 흑색 장포가 고개를 기웃하더니 빙그레 웃었다.

“방금 그건 네가 꾸민 일인가?”

“나랑 우 귀인이 같이 꾸민 계략이지.”

나는 한 줄로 완벽히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흑색 장포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같이 꾸민 계략?"”

그의 눈동자가 우 귀인이 황제를 쫓아간 방향을 향했다.

둘이 같이 꾸민 계략인데, 나는 구경만 하고 우 귀인은 망신을 당한다는 게 말이 되나,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못 믿으시겠나본데?”

“머리가 있다면 믿기 힘들지.”

“진짜야. 모든 계략이 성공하는 건 아니잖아? 단지 그뿐이야.”

“무슨 소리지?”

“머리 나쁘구나?”

“아닌데.”

“괜찮아. 나도 나빠.”

흑색 장포의 등을 탕탕탕 두드리자, 그는 고기인 줄 알고 풀을 잘못 뜯어먹은 늑대처럼 표정이 희한해졌다.

물론 이 남자가 늑대를 닮았단 뜻으로 비유한 건 아니다. ……아니, 좀 닮았나?

뭐. 어쨌든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들어봐. 있지, 어제 우 귀인이 나한테 와서 그러더라고. 황제가 내 어떤 행동을 보고 반했는데, 그걸 알려달라고.”

“황제가 너한테 반했어?”

“모르지. 근데 우 귀인은 그렇게 알고 있었어.”

“너는?”

“그렇게 말하기에, 나도 그런가보다 했지.”

내가 솔직하게 말하자, 흑색 장포는 배를 잡고 갑자기 웃어댔다.

“왜?”

이게 웃을 일인가 싶어 째려보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푸들거렸다.

“아니.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싶어서.”

“왜. 사람 마음 모르잖아.”

“그거야 그렇지.”

“어쨌든 그렇게 된 거야. 우 귀인은 황제가 나를 자기로 착각하고 있으니, 내가 여기서 자주 했던 행동을 알려달라 했어. 나는 그걸 또 알려 줬고.”

“근데 다 오해였다?”

“그런가봐.”

어깨를 으쓱하고서, 나는 흑색 장포의 손에 있는 떡 하나를 자연스럽게 내 입으로 가져갔다.

“왜 가져가?”

하지만 흑색 장포는 내가 떡을 입 가까이 가져가기도 전에 딱 잘라 민망하게 물었다.

“항상 나 볼 때마다 주기에…….”

게다가 내가 방금 얘기도 많이 해줬고. 주춤주춤 변명하자, 그가 달래는 투로 말했다.

“안 돼. 줄 때까지 기다려야지.”

“알았어. 돌려줄게.”

남의 음식을 함부로 먹는 사람이 된 기분이어서, 나는 얼른 흑색 장포의 입안에 떡을 그대로 넣어주었다.

그러자 흑색 장포는 얼결인지 입을 벌려 떡을 받아 먹고는, 우물우물 잘 씹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맛있게 잘 먹네. 치우라 할 줄 알고 내민 건데.

괜히 손이 민망해져서, 나는 얼른 다른 화제를 꺼냈다.

“있지. 그렇지 않아도 나도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어.”

흑색 장포는 떡을 반쯤 삼킨 후 남은 반은 손에 들면서 되물었다.

“나한테?”

“응.”

“뭐지?”

“나 좋아해?”

남은 떡도 먹으려는 듯 입에 물었던 흑색 장포는, 내 질문을 듣자마자 사레에 걸려 기침했다. 누가 봐도 딱 정곡을 찔린 행동이었다.

“좋아하는구나. 내가 정곡을 짚어버렸어?”

그 모습을 보며 내가 혀를 차는 사이.

흑색 장포가 데리고 다니는 호위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얼른 다가와 흑색 장포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나는 턱을 괴고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호위는 흑색 장포가 기침을 멈추자 다시 모습을 감추고 물러났다.

흑색 장포는 자기 가슴을 자기 손으로 직접 두드리며 말했다.

“그거 알아? 넌 방금 역사에 이름을 남길 뻔했다.”

“난 이미 역사에 이름을 남겼어.”

희대의 악한으로.

아직도 속이 더부룩한가. 흑색 장포는 자기 가슴을 계속 두드리다가, 영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기웃하며 물었다.

“이해가 잘 안 가는데. 대체 왜 내가 널 좋아한다 생각한 거지? 우리가 몇 번 봤다고?”

“나한테 먹을 걸 줬잖아.”

“뭐?”

“내 궁녀가 그러던데, 먹을 걸 주는 건 좋아한단 표시래.”

“짐승이냐…….”

“사람도 따지자면 짐승이지.”

당연한 말을 하느냐고 되물으려다 보니, 뒤늦게 흑색 장포의 말이 좀 이상하단 걸 깨달았다.

그는 마치 자기가 나를 안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나 안 좋아해?”

그 태도가 이상해서 묻자, 흑색 장포는 바로 대답을 하려다가 멈추더니 미묘하게 웃고서 물었다.

“글쎄. 어떤 거 같은데?”

나도 대답하는 시늉을 하다가 입을 다물고 말을 돌려버렸다.

“근데 이름이 뭐야, 그쪽?”

중요한 대답을 앞두고 말을 돌린 게 얄미워서 한 거지만, 흑색 장포는 애초에 내 대답엔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바로 자기 이름을 밝혔다.

“흑합.”

그러고는 내게 어떤 반응을 기대하듯 입술을 다문 채 날 힐긋거렸다.

쪼그리고 앉아 몸을 건들건들하는 게, ‘내게 할 말 없어?’라고 온몸으로 묻는 듯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할 말이 있었다. 그는 이름이 정말 이상했다.

어느 정도로 이상했냐면, 부모님과 탯줄을 두고 싸우기라도 한 탓에 저런 이름을 얻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상했다.

하지만 남의 이름을 가지고서 이상하다 대놓고 말하는 건 실례다.

나는 무림사적이지만, 남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진 않는다.

그래서 멀뚱히 같이 쳐다보다가 “난 천소여.”라고 같이 통성명만 해주었다.

탕 궁의를 통해 약을 보낸 걸 보면 내가 누군지 아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데 뭐야. 흑합은 내 이름 따위는 전혀 관심 없지만, 내가 자기 이름을 모른다는 건 무척 신경쓰인단 것처럼 물었다.

“반응이 약한데? 너 나 몰라?”

“알아야 돼?”

알아야 하나 보다. 흑합이 기막히단 얼굴로 중얼거리는 걸 들으니.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최소한 이 나라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중얼거림 속에는 자기 이름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칠 정도로 가득해서, 나는 흑합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하나 해주었다.

“명성…… 후우. 그거 다 헛것이다?”

그런데 뭐야. 조언을 해준 건데도 흑색 장포, 아니, 흑합이 빵 터지더니 또 배를 잡고 웃어댔다.

정말 잘 웃는 사람이네. 왜 저렇게 시시때때로 웃는 걸까?

“진짜야.”

어쨌든 내가 한 말은 잘난척 하거나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진지한 충고지.

실제로 난 이 나라 정도가 아니라 전 세계에 악명을 떨쳤지. 공포의 존재로 군림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잖아?

물론 애초에 나는 별거 한 것도 없이 공포의 존재가 되어버렸던 거긴 하지만…….

“어쨌든 이걸로 확실해졌네.”

“내가 그쪽을 좋아하는 게?”

“황제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게.”

흑색 장포의 표정에 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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