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황제가 말하는 사람, 나 같은데
황제는 다른 후궁들이 괴롭혀서 저 후궁이 넘어진 거라고 오해한 게 분명했다.
아, 오해는 아니구나. 괴롭히고 있던 건 맞으니까.
“오셨습니까, 폐하.”
그러나 난데없이 황제가 나타나 다른 후궁들은 당황한 반면, 황후는 자애롭게 미소를 지으며 황제에게 인사했다.
이 와중에도 저렇게 웃을 수 있단 게 대단했다.
황제는 그렇게 안 여겨지는 모양이지만.
“다른 후궁들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황후는 후궁 한 명을 함께 괴롭히면 안 되지 않을까.”
황제가 대놓고 빈정거리자 황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폐하.”
황제가 한 걸음을 더 걸어갔다.
나는 이참에 고개를 슬쩍 들어서 황제의 모습을 살폈다.
황제의 모습을 살피는 건 중요하다. 특히 나처럼, 조용하게 뒷방 후궁으로 지낼 가짜 후궁에게는 더욱더.
왜냐. 혹시라도 멀리서 만나면 달아나야 할 테니까.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황제는 얼굴을 까만 면포로 가리고 있었다.
키가 크고, 드러난 얼굴선이 조각 같다는 외엔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이, 황제가 넘어졌던 후궁에게 물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지?”
“우 씨 일려, 귀인입니다.”
우 귀인. 나랑 직급은 비슷하구나.
비슷한 직급을 가진 애가 그렇게 괴롭힘 당하고 있었단 생각을 하니 참…… 앞으로의 일들이 걱정된다.
우 귀인이 괴롭힘 당할 수 있단 건 같은 직급인 나도 괴롭힘 당할 수 있단 거 아닐까?
“우 귀인.”
어쨌든 우 귀인의 가엾어 보이는 모습이 황제의 동정심을 자극한 모양이다.
황제는 우 귀인의 이름을, 굳이 남들이 다 듣도록 입 안에서 한 번 굴려서 발음했다.
그 소리를 듣자 주위의 후궁들이 고개를 더욱 깊숙하게 숙였다.
“혹시 네가 밤중에 혼자 청적에 드나들던 후궁인가?”
그런데 황제가 갑자기 뜬금없고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우 귀인이 “예?” 하고 희미한 목소리로 묻자, 황제가 “아닌가?” 하고 거듭 물었다.
청적이 어딘진 모르겠지만, 우 귀인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맞습니다.”
그 대답이 황제에게 또 좋은 인상을 준 모양이다.
황제가 쓴 검은 면포가 어깨와 함께 잘게 흔들렸다. 소리 없이 웃는 것처럼.
“그래, 그게 너였군.”
다시 중얼거린 황제는 이번에는 우 귀인을 향해 돌연 손을 뻗었다.
우 귀인이 머뭇거리자, 그가 “잡거라.” 하고 대놓고 지시했다.
우 귀인이 그의 손을 잡자, 황제는 고개를 돌리더니 찬찬히 후궁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말했다.
“승냥이들 사이에 있을 필요 없다.”
그 말을 듣자 후궁들이 술렁였다. 싫어서인 듯한데…….
솔직히 나는 좀 감동받았다. 승냥이라니. 황제가 말한 ‘승냥이들’ 사이엔 나도 포함되겠지?
지금까지 내게 퍼부어진 기본 지칭이 쓰레기, 악적, 무림사적, 흉악한 괴물 등등이었다.
그런 말을 듣다가 도도하신 황제 나으리가 ‘승냥이!’ 하고 말하자, 참 하찮게 여겨졌다. 기분이 안 나빠. 이런 욕은 들어도 타격이 없어!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그 사이 황제는 우 귀인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사방이 완전히 고요해졌다.
나는 가까스로 웃음을 통제했다. 이 와중에 웃으면 미친사람 되기 딱이니까.
대신 고개를 들어 다른 후궁들을 살폈다.
하지만 후궁들은 고귀하게 자라서인가. 승냥이란 단어만으로도 모두 쥐털을 입에 문 표정이었다.
후궁들에겐 승냥이 소리가 큰 모욕인 듯했다.
그러다 노란색 옷을 입은 한 후궁이 주먹을 꽉 쥐며 황후에게 말했다.
“너무 억울한 일입니다, 황후마마! 우 귀인 그 여우 같은 것, 분명 처음엔 일부러 넘어졌다고요!”
“맞아요. 두 번째는 염 귀인이 밀쳤지만, 첫 번째는 그냥 혼자 고꾸라졌는데.”
“마치 우리가 자길 괴롭힌 것처럼!”
“폐하께서는 거기에 또 홀랑 넘어가고!”
노란색 옷을 입은 후궁을 시작으로, 거친 반박과 변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직접 공격하지 않을 뿐 충분히 괴롭힌 게 맞으면서. 다들 자신들이 승냥이로 몰린 게 억울한 눈치였다.
왜, 승냥이 어때서. 승냥이 귀엽잖아.
* * *
“소주, 소주.”
황후에게 문안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원웅과 부성이 초조하게 날 기다리고 있다가 얼른 다가와 물었다.
“문안은 무사히 하셨나요?”
“중간에 황제 폐하께서 나타나시지 않으셨어요?”
“전 소주가 무사히 나오시길 기다리고 있다가, 폐하가 들어가시는 걸 보고 정말 기절할 뻔했어요!”
나는 원웅과 부성에게 우 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 귀인이란 후궁이 다른 후궁들이 괴롭혀서 넘어졌거든. 그때 황제가…….”
“소주!”
“황제 폐하가 나타나서 우 귀인더러 승냥이 사이에 있지 말라 하고는 챙겨 갔어.”
원웅이 울상을 지었다.
“소주더러 승냥이라 하셨다고요?”
“어. 귀엽지?”
히죽 웃으면서 되묻자, 원웅은 그게 뭐가 귀엽냐고 울상을 지었다.
나는 그런 원웅을 놀려대며 낄낄 웃다가 덧붙였다.
“어쨌든 염려 안 해도 될 것 같아. 난 완전히 후궁들 관심 밖이던데?”
황제의 관심 밖이기도 했고.
게다가 직접 겪어보니, 천소여는 뭐라고 해야 하나. 좀 이상한 위치 같았다.
우 귀인처럼 후궁들이 괴롭히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막 챙기지도 않고.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부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좋은 게 아니에요, 소주.”
* * *
어쨌든 나의 첫 문안은 그렇게 지나갔고, 그날 나는 따뜻한 물을 채운 욕조에서 몸의 피로를 풀면서 남은 하루를 흘려보냈다.
그날은 별거 안 했는데도 피곤해서, 비밀 수련장에도 찾아가지 않았다.
내가 다시 비밀 수련장으로 간 건 다음날 밤이었다.
“여기서 기다려줘.”
나는 비밀 수련장에서 좀 떨어져 있는 곳에 원웅을 둔 후, 방 안을 뒤져서 찾아낸 작은 은색 검을 챙겨 수련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오늘도 몸을 푸는 수련만 할 거지만, 그래도 검 비슷한 게 손 안에 있단 것만으로도 좋으니 뭐.
그런데 막 수련장에 도착해서 몸을 푸느라 팔다리를 휘젓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바삭 바삭 풀을 밟는 소리가 났다. 게다가 가까워지고 있어. 누가 이쪽으로 오나?
‘누구지?’
발소리가 노골적인 걸 보니, 예전에 지척까지 기척을 죽이고 다가온 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싶어서 움직이길 멈추고 찾아보니, 뜻밖에도…….
“우 귀인?”
우 귀인이었다.
“천 귀인이 여긴 왜……?”
우 귀인도 여기서 날 본 게 나만큼 놀라운지 입을 벌리고서 더듬거렸다.
왜긴 왜야.
“원래 자주 오던 곳인데요.”
그래봐야 며칠 뿐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최대한 덤덤하고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먼저 여기에 자주 왔으니,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면 선착순으로 따져야 할 거란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뭐 하면 안 될 말이라도 한 건가. 우 귀인은 내 말에 낯빛이 파래지더니 눈동자를 사정없이 떨었다.
동공을 콕 집어서 고정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말 떨림이 심했다.
“괜찮아요?”
놀라서 묻는데, 다시 바스락 바스락 풀 밟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번에 나타난 건 황제였다. 검은 면포로 얼굴을 가린 그 황제.
황제는 또 여기에 왜 나타난 거래? 저절로 인상이 구겨지려는데, 갑자기 황제가 우 귀인에게 물었던 게 떠올랐다.
‘밤에 혼자 청적에서 놀았냐’고 했지. 혹시 여기를 청적이라 부르나?
어? 혹시 그렇게 되면, 황제가 애초에 여기서 만난 사람은 우 귀인이 아니라 나 아닌가?
하지만 황제가 며칠 전 여기서 봤다는 사람이 나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황제가 나와 우 귀인을 헷갈릴 일도 없을 테니까.
게다가 내가 이전에 여기서 만난 건 까만 장포 차림의 남자인데, 그 장포 차림 남자는 탕 궁의를 통해 미친 데 좋다는 약을 내 처소로 제대로 전해 줬는걸.
그 까만 장포가 황제라면, 우 귀인을 두고서 ‘너가 걔냐?’고 물을 리가 없지.
결국 고민 끝에, 황제가 만난 사람은 우 귀인이 맞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설령 우 귀인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아닐 거란 결론도 내렸다.
내가 만난 사람이 황제고, 그 황제가 사람들 앞에서 날 찾았고, 그런데 내 얼굴을 못 알아보고서 엉뚱한 여자와 말을 섞었단 것보다는, 애초에 만난 적도 없었을 거란 게 더욱 말이 되니까.
결정을 내리자마자 나는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서 머리를 푹 숙이는 자세를 취했다.
어제 후궁들이 황제 앞에서 하던 자세였다.
그러자 면포로 얼굴을 가린 황제가 나와 우 귀인 사이 즈음으로 다가오더니 물었다.
“너도 후궁인가.”
누구한테 묻는 거야? 질문이 애매하다.
그래서 슬쩍 고개를 들어 보니 황제는 날 보고 있었다. 아. 나한테 하는 질문이구나.
하긴. 우 귀인하고 여기에 같이 왔으니, 나한테 한 질문일 수밖에 없겠네.
아니, 그래도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이 황제는 자기 후궁 얼굴을 아예 모르나? 척하면 척이어야지!
황제의 질문은 황당했으나,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예.”
“왜 여기 있는 거지, 후궁이?”
황제가 다시 물었다.
아까 ‘너도 후궁이냐’고 물을 때는 목소리가 차갑더니. 이번 질문은 좀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자기도 자기 후궁의 얼굴조차 몰라보는 스스로가 참 한심스러운가 보다.
“원래 자주 놀러오던 곳입니다.”
어쨌든 묻기에 솔직히 대답해주자, 황제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마치 아주 재밌는 대답을 들었다는 것처럼.
왜 저러나 싶어서 멀뚱히 보고 있자니, 황제가 얼굴에 매단 검은 면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가 고개를 저은 것이었다.
“머리가 좋군.”
그러고는 뜬금없이 내게 칭찬을 해준다.
난 욕을 하도 많이 먹고 살아서, 누가 날 칭찬해주면 몹시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칭찬도 칭찬 나름이어야지. 이렇게 뜬금없는 칭찬은 기분이 좋기는 커녕 듣고 나면 찝찝하기만 했다.
그렇잖아. 갑자기 내 머리 얘기가 왜 나와?
뒷말이 더 있을 것 같은데. 황제는 볼일이 끝났는지, 우 귀인을 데리고 홀랑 어딘가로 가버렸다.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슬그머니 뒤따라가 보니, 황제가 우 귀인과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겁먹지 마라.”
이런 위로를 하면서.
“그 여자가 널 따라했단 건 알고 있다. 하나 그게 네게 어떤 지장을 주진 않을 거다.”
“폐하…….”
“난 널 여기서 만난 걸 마음에 두는 게 아니라, 네가 여기서 하는 행동을 보고 귀엽게 여긴 거니 신경쓰지 마라.”
저기서 황제가 말하는 ‘그 여자’가 혹시 나인가?
그러니까 지금 황제가, 내가 우 귀인을 따라하기 위해서 청적에 왔지만 자긴 그걸 다 파악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가?
내 귀엔 그렇게 들리는데?
황당해서 저절로 ‘쯔쯔’ 혀 차는 소리가 나올 뻔했다. 여보세요, 지나가는 황제님. 내가 걜 따라한 게 아니라 걔가 날 따라한 거잖아요.
따라하니 뭐니 하는 소리를 누가 누구한테 하는 거야?
그런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자니, 누군가 옆에서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반사적으로 받아들다가 나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뒤로 뺐다.
이건 또 뭐야? 언제 옆에 왔어? 전혀 온 줄 몰랐는데.
어쩐지 낯설지 않은 남자가 내 옆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잘 보니 이 남자는 아는 얼굴이었다. 전에 여기서 만난 그 흑색 장포다.
날 보면서 ‘저게 미쳤나?’ 하는 눈으로 쳐다보던 그 사람.
그러나 그 흑색 장포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누구냐.”
황제가 서늘한 목소리로 돌아보며 물었다.
아까 놀래서 몸을 뒤로 빼다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 게 분명했다. 황제는 그걸 들은 거고.
이럴 때 대답하면 몰래 따라온 게 들통나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 근처를 빙빙 돌면서 혹시 추적당할 경우를 대비한 후, 아무도 날 쫓아오지 않는단 확신이 선 후에야 내 전각을 찾아 들어와 숨을 골랐다.
‘어후 깜짝이야.’
놀란 마음이 가시자 그제야 무언가 손바닥에 느껴졌다.
아. 그러고보니 아까 흑색 장포 남자가 나한테 뭘 줬지. 놀라서 그게 뭔지 확인도 못 했지만.
뭘 준 걸까? 좀 늦긴 했지만 나는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나타난 건 푹신한 떡이었다. 내 손 안에서 완전히 찌그러져 버린 떡.
* * *
흑색 장포는 왜 내게 떡을 준 걸까.
다음날, 나는 평상에 앉아 떡을 뜯어 먹으면서 흑색 장포의 행동을 분석하려 시도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공짜로 음식을 얻어먹은 적이 많이 없었다.
원래 몸에 있을 적, 사람들은 날 무서워하고, 나를 보면 달아나기 바빴다.
음식을 주고서 달아나는 사람이 있을 수가 없지.
아, 독 든 음식은 몇 번 받아 봤구나. 그나마 내게 독 없는 음식을 준 놈은…… 내 뒤통수를 때렸지.
그러다보니 떡 한 덩이지만 자꾸 분석에 분석을 거듭하게 되었다.
“원웅아.”
“네, 소주.”
“누가 너한테 음식을 준다는 건 무슨 뜻 같아?”
나중에는 혼자서 답을 찾기 어려워 아예 원웅의 도움을 청했다. 나보단 원웅이 대인관계가 더 좋으니까.
끙끙 앓았던 나와 달리, 원웅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호의지요.”
“좋아한단 거야?”
“안에 독이 들어 있지 않다면 호의겠지요.”
“독은 없었어.”
내 말에 원웅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왜요? 누가 소주께 뭘 주던가요? 준 사람이 남자였나요 여자였나요?”
“남자였어. 잘생긴 남자.”
“호의입니다. 분명 소주께 반한 거예요!”
“그래?”
“그럼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원웅은 누군가 내게 음식을 주었다는 게 굉장히 기쁜 듯 눈까지 반짝이며 물었다.
“모르겠어.”
난 고개를 저었다.
“이름은 모르는 남자야.”
원웅은 입을 벌리고서 자기 가슴을 퍽퍽 두드리더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분명 소주를 보자마자 반한 겁니다. 그래서 소주께 이름도 안 밝히고 먹을 걸 준 거예요.”
그런가? 그럼 흑색 장포가 처음 날 만났을 때 지었던 그 표정은 ‘저거 미쳤나?’가 아니라 ‘세상에 저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쪽이었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탕 궁의를 시켜서 미친 데 먹는 약도 보냈잖아.
원웅의 말을 바로 믿어도 될지 모르겠다.
그런데 한참 원웅과 ‘먹을 것과 애정’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토론하는 도중이었다.
우 귀인이 양옆에 자기 측근궁녀 두 명을 끼고서 내쪽으로 다가왔다.
평상 위에 있었기에, 세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바로 볼 수 있었다.
우 귀인과 나는 친분이 전혀 없기에, 나는 우 귀인이 다른 쪽으로 지나갈 거라 여기고서 걸어가는 걸 빤히 구경했다.
그런데 우 귀인은 의외로 내 전각 앞으로 와서는, 사립문 너머로 원웅에게 지시했다.
“너희 소주께 내가 왔다고 알리거라.”
저기요? 원웅이 옆에 내가 같이 있는 거 안 보이나요?
황당해서 손을 휘휘 저었지만, 우 귀인은 우아한 태도로 끝까지 절차를 따르려 들었다.
그녀는 원웅이 내게 “소주, 우 귀인이 찾아왔습니다.”라고 말을 하자, 그제야 사립문을 밀고서 내앞으로 다가왔다.
어제 만나고 오늘도 만났으니 인사를 해야 하나?
떨떠름하게 쳐다보자, 우 귀인은 빙그레 날 향해 웃었다. 얼결에 따라 웃자, 그녀는 내게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래요.”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우 귀인과 둘이서 내가 침실로 사용하는 전각에 들어갔다.
문을 닫고서 좁은 방 안에 둘만 남자 우 귀인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천 귀인, 날 좀 도와줘요.”
“예?”
“시치미 떼지 말아요. 천 귀인도 알잖아요, 폐하께서 청적에서 만났단 사람이 내가 아니라 천 귀인이란 걸.”
“아 그거야…….”
어제 황제가 하던 말을 듣고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은 해봤지.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닌데.
아니, 그보다 그쪽. 어제 황제 앞에서는 이런 말 안 했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폐하께선 천 귀인의 어떤 행동을 보고 마음에 드셨대요. 그게 뭔지 내게 알려줘요.”
아, 이래서 황제 앞에선 가만히 있었구나. 황제 오해를 풀 마음이 아예 없어서.
뭐. 사실 나야 황제에게 총애 받을 생각이 없으니 가르쳐주어도 상관없긴 한데.
“내가 왜요?”
우리 친분도 없는 사이인데?
떨떠름해 묻자, 우 귀인은 진중한 태도로 몸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