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 신문(神門).
사마의성은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라고 말하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또한 쓸데없는 신변잡기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해요. 미리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요. 아시겠지만 지금이 가장 한가한 시간이기도 하고요.”
고개를 숙이는 모용희수의 모습에 사마의성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녀가 반호진의 의형제라지만 모용희수는 무상문의 가모였다.
또한 반호진의 하나뿐인 반려자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사마의성은 정말 괜찮다는 듯이 옅게 웃었다.
“바쁘실 테니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게요. 괜찮죠?”
“네.”
“조금 주제넘을지도 모르지만 저도 연관이 있으니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에 오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을 고민하기도 했고요.”
사마의성이 느릿하게 눈을 껌뻑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사마의성은 어중간하게 대답하기보다는 일단 가만히 듣기로 했다.
“요즘 고민 많으시죠? 독립에 대해서.”
“맞아요.”
사마의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만큼 사마세가의 규모도 비례해서 커졌다.
십대세가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무상문에 얹혀살기에는 지나치게 컸기에 안 그래도 사마의성 역시 고민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가주님께 들어오는 혼담이 더 많아졌죠?”
“네.”
조심스럽게 묻는 모용희수의 말에 사마의성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그저 그런 명문세가에서 그녀를 탐냈다면 지금은 소위 말하는 십대세가, 오대세가의 가문에서 사마세가를 원했다.
그것도 상당히 노골적으로 말이다.
지금이야 무상문의 그늘 아래에 있기에 대놓고 수작질을 벌이지 못하지만 독립한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염두에 둔 곳이 있으신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아니요. 없어요.”
“그럼 가가는 어떠세요?”
“네에?!”
사마의성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상상도 못 한 말에 대경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내인 모용희수가 말했기에 사마의성은 더더욱 놀랐다.
“말씀드렸잖아요. 저도 연관이 있다고요.”
“……진심이세요?”
“바쁜 가주님을 붙잡고 농담할 정도로 제가 실없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리고 좋아하시잖아요?”
사마의성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표정을 관리하지 못한 것이었다.
“가주님을 탓하려고 이 말을 꺼낸 게 아니에요. 또 사람 마음이라는 게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사실 저보다 가가를 먼저 만난 건 가주님이시기도 하고요.”
“진심이시군요.”
이어지는 말에 사마의성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의문이 들었다.
모용희수가 굳이 양보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맞아요.”
“모용 소저께서 솔직하게 말씀하셨으니 저도 솔직하게 물을게요. 왜죠? 저에게 굳이 이런 제안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상식적으로 말이죠.”
“지금까지 말은 못 했지만 저는 가주님께 약간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유를 말하자면 가가를 마음에 품은 순간부터 각오했어요. 혼자서 가가를 독차지하지는 못할 거라고요. 그런데 놀랍게도 가가께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돌린 적이 없어요. 뭇 여성들이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사마의성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마지막에 달려들었던 뭇 여성 중에는 그녀도 포함되어 있어서였다.
물론 다른 여인들처럼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렇다고 포기하고 떠난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저에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남녀사이라는 게 한쪽의 마음만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포기하시게요? 만약 이대로 나가시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예요. 후사는 어쩌시게요? 당장은 가주님께서 사마세가를 이끄시겠지만 대를 이을 후계자가 없다면 사마세가의 정통성은 무너져요. 방계가 이어받는 방법도 있지만 과연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까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죠? 솔직히 모용 소저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아무리 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 과해요.”
사마의성이 모용희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속내를 꿰뚫어 보겠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사마의성의 날카로운 눈빛을 모용희수는 담담히 받아 냈다.
숨기는 게 없기에 찔릴 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상관이 있어요. 저는 사마세가가 다시 융성해지길 원해요. 그래야 오대세가의 균열이 더욱 커질 테니까요. 또 다른 여인은 몰라도 가주님은 괜찮아요. 가가와 맺어지더라도 가주님은 사마세가의 가주가 되셔야 하니까요. 즉 정실 자리를 위협받을 일이 없다는 거죠. 거기다 가주님이라면 큰 어려움 없이 치근덕거리는 여인들을 튕겨 낼 수 있고요.”
“으음!”
사마의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확실히 서로에게 나쁘지 않아서였다.
거기에 모용희수는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더욱이 후사를 위해서도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요? 가가의 피를 이은 아이가 사마세가의 후계자가 되는 거예요. 첫째 아들에게만 사마의 성을 물려주는 것 정도는 가가에게 있어 어렵지 않을 테니까요.”
꿀꺽!
사마의성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안 그래도 그녀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 상상했던 때가 있었다.
만약 반호진이 받아 준다면, 그리고 아들을 낳는다면 첫 번째 아들에게 사마 가문의 성을 물려주어 사마세가를 잇게 하고 싶었다.
‘진짜 그렇게만 된다면 문무겸전의 재능을 타고날 게 분명해.’
태생적으로 무골이 부족한 가문이 사마세가였다.
경쟁 가문인 제갈세가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러나 반호진의 피를 이어받는다면 더는 무재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에게 충분히 이득이 된다고 생각해요. 가주님께서도 정실 자리는 부담스러우실 테니까요.”
“맞아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만약 가주님께서 제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전력으로 협력할게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볼게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무상문에도 나쁘지 않은 일이니까요. 대신 정실 자리는 양보할 수 없어요.”
스윽.
사마의성이 손을 내밀어 모용희수의 양손을 붙잡았다.
말 대신 행동으로 대답한 것이었다.
이윽고 두 여인이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
***
똑똑똑.
“형님! 접니다!”
“들어와.”
“예!”
“아침부터 힘이 넘치는구나. 역시 연인이 생기면 활력이 도는 모양이야.”
흠칫!
시원스러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에 들어오던 서조운이 움찔거렸다.
연인이라는 두 글자에 자기도 모르게 반응하고 만 것이었다.
“여, 연인이라니요?”
“유화.”
“헉!”
잡아떼려던 서조운이 화들짝 놀랐다.
확신이 담긴 목소리에 반호진이 정말로 알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서조운은 울상을 지었다.
“사귀는 게 어때서? 한창 혈기왕성한 시절인데. 너도 그렇고, 유화도 그렇고.”
“어떻게 아셨어요?”
“눈치로?”
“티를 전혀 내지 않았는데…….”
“난 기혼자잖아. 이런 쪽은 빠삭하지.”
조금 미덥지 않았지만 서조운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혼자가 보지 못하는 걸 기혼자는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유경험자와 미경험자의 차이가 얼마나 극심한지도 잘 알았기에 서조운은 이내 수긍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어요.”
“잘해 줘. 착한 아이야.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만.”
몰래 엿들은 건 절대 비밀이기에 반호진은 어물쩍 넘어갔다.
제삼자로서 딱 이 정도가 적당하기도 했고.
“사실 잘 모르겠어요. 여자라기보다는 여동생이라는 느낌이 강해서요.”
“그럼 이런 상상을 해 봐. 유화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어, 그건 좀 싫은데요?”
“걱정이 아니라?”
“……호감은 있는 거 같아요.”
반호진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화가 치솟았다.
그런데 그게 질투인지 아니면 오빠로서의 걱정인지는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어느 쪽이든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계륵이면 놓아주고. 너의 시간도 중요하지만 유화도 마찬가지야. 흘러간 시간은 절대 되돌아오지 않아. 사람 가지고 노는 것만큼 나쁜 짓도 없고.”
“그렇지는 않아요.”
“참견은 여기까지. 남녀사이는 두 사람이 알아서 하는 게 가장 좋으니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아, 형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앉아.”
빠르게 신색을 가다듬는 서조운을 보며 반호진이 자리를 권했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삼매진화로 차를 데워서 찻잔에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하려는 말이 뭔데?”
“결정을 내렸어요.”
“무슨 결정?”
생뚱맞은 말에 반호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앞뒤 다 자르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상문의 가신이 되겠습니다. 정확하게는 가신 가문을 일으키고 싶습니다.”
“서가장은?”
“저는 삼남이잖아요. 장주직은 머지않아 큰형이 물려받을 거고요. 그리고 제가 익힌 양강기공은 아무나 익힐 수가 없는 무공이잖아요. 개량한 본가의 무공은 얼마 전에 완성해서 넘겼고요.”
“아쉽지 않아?”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반호진이 말했다.
선택지가 없다면 모를까 본가가 건재한 상황에서 굳이 가신이 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전혀요. 서가장은 강호의 무림세가이지만 무상문은 중원의 수호문파이지 않습니까. 그런 문파의 가신 가문이 되는 거예요. 어쩌면 서가장보다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명성을 위해서라면 독립하면 되잖아.”
“그러기에는 제 무공이 좀 특이하지 않습니까. 순양지기를 가진 체질이 아니면 시작조차 못 하는 무공이니까요. 유화가 익힌 무공도 그렇고요. 그리고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무상문을 신문(神門)으로 만들겠다는 꿈이요.”
“신문이라니.”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아무리 꿈이 원대할수록 좋다지만 너무 간 것 같아서였다.
“이미 반쯤 신문이나 마찬가지지만요. 많은 이들이 경외하고 우러러보는 곳이 바로 형님의 무상문입니다. 무상(無上)과 신문(神門). 너무나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별로.”
“어…….”
서조운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도 반호진이 명예욕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무관심할 줄은 몰랐기에 서조운은 당황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근데 마음은 고맙네. 어쨌든 서가장보다 본문을 더 생각해 준다는 거니까.”
“무상문은 저에게 있어 제이의 고향입니다, 형님.”
“소림이 아니라?”
“저에게는 소림사보다 형님이 더 중요합니다.”
강건한 어조로 서조운이 말했다.
그를 살려 주고 염왕(炎王)으로 만들어 준 게 바로 반호진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부모님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였다.
“낯간지러운 말은 그만하고.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었잖아? 어쨌든 해 봐. 하고 싶으면 해야지.”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네가 하고 싶다면 해야지. 나로서는 나쁠 게 없고. 다만 쉽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근데 중원이 아니라 새외무림, 세상 전체를 두고 보면 크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서조운이 씨익 웃었다.
중원만 놓고 보면 반호진 말대로 어려울 테지만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조운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난 좀 더 쉬고 있을 테니. 아직 휴식이 부족해. 이제야 좀 마음 편히 쉬는 것 같고.”
“형님은 그러셔도 되죠. 지금껏 해 놓으신 일들이 있는데요.”
서조운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지금까지 반호진이 이룬 업적을 생각하면 이건 당연했다.
그리고 서조운은 이걸 일종의 시험이라 생각했다.
혼자서 해낼 수 있는지 없는지를.
“맞아. 내 꿈이 설렁설렁 사는 건데. 나도 꿈을 이루어야지.”
“그럼요.”
“그러니 뒤를 부탁하마.”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자연스럽게 인계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서조운은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맡겨만 주세요!”
“오냐. 믿으마.”
똑똑똑.
그러나 반호진의 미소는 얼마 가지 못했다.
말도 없이 찾아온 모용희수와 사마의성의 기척에 반호진은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어 두 눈을 감았다.
더불어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했다.
잠시 후 반호진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맺혔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