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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림-467화 (467/468)

외전. 7. 각자의 길. -04

일을 조금 더 할까 아니면 이쯤에서 마무리 지을까 고민하던 서조운이 퍼뜩 놀랐다.

야심한 시각에 예유화가 말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자 당황한 것이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어, 들어와.”

안에서 대답이 없자 예유화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서조운이 황급히 입을 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안 놀라는 게 이상한 거 아냐? 이 시간에 갑자기 찾아왔는데.”

“뭐, 어때요. 저희가 서먹서먹한 사이도 아니고.”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지. 너도 이제는 더 이상 어리지 않은데.”

“제가 여자로 보여요?”

예유화가 눈을 반짝였다.

어리지 않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어른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다 큰 여인은 여자라는 말과도 같았다.

“네가 여자지 그럼 남자야?”

“애 취급하셨잖아요.”

“워낙에 어릴 때 봐서 그렇지.”

“그땐 오빠도 어렸어요.”

“지금은 다르지.”

언제 당황했냐는 듯이 서조운이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차호를 들어 예유화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이제는 적은 나이가 아니죠.”

“그러게. 벌써 내가 스물다섯 살이 될 줄이야.”

“그렇다고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요.”

“젊은 나이이기는 하지. 아직은 이십 대니까.”

서조운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유화를 비롯해서 아이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것이지 일반적으로는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창 젊다고 해야 맞았다.

“저도 이십 대고요.”

“그 삐쩍 말랐던 꼬마아이가 벌써 약관이 되었다니.”

서조운이 감회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여전히 그의 뇌리에는 예유화와의 첫 만남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예유화는 딱히 좋지 않은 모양인지 눈썹을 치켜올렸다.

“과거는 잊어 주시죠?”

“어떻게 지워? 원래 첫인상은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야. 무릇 처음이 다 그렇지.”

“지워 주세요.”

예유화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특유의 차가운 표정 때문인지 더욱 서늘하게 다가오는 음성이었으나 서조운은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거렸다.

기억이라는 게 지우고 싶다고 해서 지울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떠올리지 않으면 되죠.”

“그럼 말을 꺼내면 안 되지. 지금처럼 이 주제로 대화를 해도 안 되고.”

“오빠가 사경을 헤매던 때를 봤어야 했는데.”

“안 됐지만 내 최악의 모습을 본 건 이곳에서 형님뿐이야.”

서조운이 얄밉게 웃었다.

그 모습에 예유화의 전신에서 냉기가 풀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내를 서서히 잠식해 가는 극음지기에도 서조운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얄미워.”

“지금 반말한 거야?”

“혼잣말이에요.”

“그나저나 이 늦은 시각에 무슨 일이야? 이제는 너도 다 커서 야밤이 무작정 찾아오면 안 돼. 혼사 막힌다.”

“지금 저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예유화가 눈을 흘겼다.

병 주고 약 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한데 이상하게도 냉기가 누그러졌다.

“걱정이 안 될 수가 있나. 노처녀가 되면 어떡해?”

“뭐라고요?”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람 인생이라는 게 혹시 모르니까. 나처럼 잘 풀린 경우도 있지만, 완전 꼬이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으니까. 결혼이라는 게 시기가 있다고도 하고.”

“오빠는요? 오빠도 적령기잖아요. 약간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기도 하고.”

예유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편한 사이일수록 선을 잘 지켜야 했다.

그렇기에 예유화는 서조운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형님이나 방이 형에 비하면 늦기는 했지. 근데 척이 형도 아직 안 갔잖아? 유 호법님도 마찬가지시고.”

“아직은 생각이 없으신 거예요?”

“없다기보다는,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이 맞을 듯? 지금까지는 열심히 수련만 했으니까.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이제는 목표를 이루셨잖아요.”

“일차적인 목표는 이루었지.”

예유화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일차적인 목표였다는 말은 이차, 삼차의 목표도 있다는 걸 뜻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목표에 대해서 들은 기억이 없었다.

“이차적인 목표도 있어요?”

“물론이지.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야망이 없어서는 안 되지. 목표가 없으면 정신적으로 해이해지기도 하고.”

“그 말은 마음에 둔 사람이 없다는 뜻이네요?”

“왜 말이 그렇게 흘러가지?”

이번에는 서조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게 흐르는 것 같아서였다.

“물어보셨잖아요. 이 늦은 시각에 왜 찾아왔냐고요. 이게 궁금해서 찾아왔어요. 오빠한테 물어보려고요.”

“…….”

서조운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수 있는 때가 없잖아요. 이런 대화를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게 왜 궁금해?”

“진짜 모르겠어요?”

예유화가 반문했다.

지그시 서조운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런 그녀의 투명한 눈망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서조운의 얼굴이 비쳤다.

“모르겠는데?”

“하아.”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서조운의 모습에 예유화가 단전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한숨을 쉬었다.

서운함도 있었지만 답답함이 더 컸다.

시치미를 떼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모르는 듯했기에 예유화는 두 눈을 잠시 감고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게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못할 대화인가? 아닌 거 같은데.”

“무공수련의 폐해가 이런 것일 줄이야.”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말해. 속 시원하게.”

“오빠는 여전히 삼처사첩이 목표예요?”

“아직 야망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

의아해하면서도 서조운은 일단 대답했다.

그러나 여전히 예유화의 저의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꼭 삼처사첩이 필요해요? 한 명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오빠가 그렇게 존경하는 문주님께서도 뭇 여성들의 애정공세를 다 튕겨 내고 희수 언니만 받아들이셨잖아요. 그럼 오빠도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

평소의 냉랭한 얼굴과 달리 예유화의 얼굴은 홍시처럼 붉어져 있었다.

등잔불이 비춰서가 아니라 격렬한 감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끄러워하면서도 예유화는 서조운과 눈을 마주했다.

지금 자신의 감정을 서조운에게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어중간한 여자들보다는 압도적인 미녀 한 명이 낫지 않을까요?”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그러니까 네 말은…….”

“좋아해요, 오빠. 오래전부터 오빠를 좋아했어요.”

“…….”

서조운이 입을 쩍 벌렸다.

상상도 못한 말에 당황한 것이었다.

“오빠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요. 지금 얼마나 당황했을지도 알고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줘요. 당장 대답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 거니까요.”

말문이 막힌 서조운의 모습에도 예유화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 예상했기에 그녀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진짜야?”

“제가 언제 농담하는 거 봤어요?”

“없었지. 근데 진짜 상상도 못 한 일이라.”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로 서조운이 대답했다.

장난이 아니란 걸 알기에 충격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제가 싫으세요?”

그런 서조운의 모습에 예유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통 남자들은 미녀가 호감을 보이면 좋아한다고 하는데 서조운은 달라서였다.

너무 적극적으로 고백해서 오히려 역효과가 난 건 아닐까 싶어 예유화는 조마조마했다.

“싫을 리가.”

“저 예쁘지 않아요?”

“흐음. 객관적으로 미인이기는 하지. 근데 여자라기보다는 여동생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가족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예유화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안 그래도 바로 이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거의 같이 있다시피 했기에 여자이기 이전에 여동생이라는 느낌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칠음절맥을 앓고 있어 볼품없는 모습이기도 했고.

지금이야 과거 삼봉 못지않은 미모로 유명하다지만 처음 무상문을 찾아왔을 때는 아니었다.

그때는 피골이 상접해 소녀인지 소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었기에 예유화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근데 왜 나야? 나 말고도 잘생긴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오빠니까요.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해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는 없어요. 싫어하는 이유야 수십, 수백 가지지만요.”

“절맥을 낫게 해 줘서 그런 거면 안 그래도 돼. 형님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넌 너의 삶을 살아도 돼. 약속했던 기간만큼만 나를 도와준 후에.”

“어쨌든 싫지는 않다는 거죠?”

“그렇지.”

예유화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녀는 물러나기보다 한 발 더 내딛기로 결심했다.

예부터 용기 있는 자가 미녀를 얻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용기 있는 여자가 미남을 얻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였다.

“제가 싫지 않다면 저랑 한번 만나 봐요. 정식으로 교제해 보는 거예요.”

“어?”

“싫지는 않다면서요. 그럼 한번 만나 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솔직히 저만큼 예쁘면서도 무공 실력도 뛰어난 여인은 없잖아요? 얼굴이 더 예쁘거나 혹은 무공이 더 뛰어난 여자는 있을 수 있겠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춘 여성은 없을 거예요.”

예유화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앞에 있는 서조운을 비롯해서 선우방, 모용척, 정이륭이 비상식적인 거지 그녀만 하더라도 천재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약관의 나이에 최절정 끝에 다다르는 건 오대세가의 자제들이라고 해도 쉽지 않았다.

“뭐라고?”

“오늘부터 정식으로 교제해 보자고요. 물론 비밀로요. 그래야 사귀다가 헤어져도 서로에게 피해가 안 갈 거 아니에요? 그게 싫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해요. 그럼 저도 더는 이거 가지고 말하지 않을게요.”

예유화는 강하게 나갔다.

여기까지 온 이상 오로지 정면돌파였다.

실패해도 결과가 확실하게 나오는 것이기에 적어도 손해는 아니었다.

그래서 예유화는 독촉하듯 강렬한 눈빛으로 서조운을 직시했다.

“너무 갑작스러운데.”

“싫어요, 좋아요? 딱 한 가지만 골라요. 어서요.”

우물쭈물하는 서조운의 모습에 예유화가 다시 한번 강한 어조로 말했다.

어서 양자택일을 하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건 고도로 계산된 행동이었다.

일부러 서조운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너무 강압조인 거 아냐?”

“전 제 인생을 걸었어요. 여자로서 이렇게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아시죠?”

“끄응!”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서조운은 앓는 소리를 냈다.

한데 신기한 건 싫다는 말이 바로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여자로서 생각한 적은 없으나 막상 이렇게 고백을 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동시에 이유는 알 수 없으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결정해요. 절 만날 건지, 말 건지를.”

“……어느 정도 고민할 시간을 줘야 하는 거 아냐?”

“전 이 자리에서 듣고 싶어요. 언제 또 이런 자리가 만들어질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흔들림 없는 예유화의 모습에 서조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미약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 만나 보자.”

예유화의 동공이 서서히 커졌다.

원했던 대답이 서조운의 입에서 나오자 기쁨을 금치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몰랐다.

방문 너머에서 반호진이 둘의 대화를 우연찮게 듣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좋을 때로군.’

서조운에게 할 말이 있어 찾아왔다가 생각지도 못한 비밀을 듣게 된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안 그래도 삼처사첩을 만들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서조운이 좀처럼 여자를 만나지 않아 내심 걱정했는데 역시 괜한 걱정인 듯싶었다.

‘조운이와 예화라. 선남선녀의 만남이네. 조운이에게도 나쁘지 않고.’

할 말이 있었으나 굳이 지금 할 필요는 없었기에 반호진은 슬쩍 웃으며 왔던 것처럼 소리 없이 처소로 되돌아갔다.

또르륵.

갑작스러운 모용희수의 방문에 사마의성은 의아한 기색을 감추고서 차를 따라 주었다.

반호진이 마시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곳에서 직접 재배한 차였는데 다도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그런지 차향이 진했다.

“제가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죠?”

“조금은요.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신 적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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