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각자의 길. -02
“당한 만큼 갚아 준다라.”
“운이 따르기도 했고. 방이와 동생들이 연달아 벽을 넘었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시기가 좀 더 뒤였을 거야.”
“그 말은 마음은 계속 품고 있었다는 뜻이네?”
난희주는 물론이고 백설도 눈을 반짝였다.
이런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기에 백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내 성격 알잖아. 당한 건 갚아 줘야 하는 거.”
“잘 알지. 그렇게 당한 곳이 많으니까. 근데 어떻게 보면 그게 당연한 거지. 은원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다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서 대부분은 타협하고 사는 거지.”
“맞아. 나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천운이 따랐지.”
“천운인 거 맞아?”
난희주가 반호진을 지그시 바라봤다.
지금까지 반호진이 보여 준 행보를 생각하면 운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치밀하게 설계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였다.
“아무리 나라도 초월경의 벽을 넘게 해 줄 수는 없어. 내가 아무리 조언해도 결국 벽을 넘는 건 당사자니까.”
“흐음.”
난희주가 미심쩍은 눈으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분명 반호진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오죽했으면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게 초월경의 벽이었다.
절세신공을 가진 명문대파에서조차도 쉽게 나오지 않는 게 초월경의 고수였기에 난희주는 살짝 의심하면서도 끝내는 수긍했다.
“재능과 좋은 무공, 노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어. 거기에 내 조언이 조금은 도움이 됐겠지.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과정을 피했으니까.”
“결국 재능인 건가.”
“재능만 있어서는 안 돼. 좋은 무공과 노력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해. 하나 더 추가한다면 좋은 스승까지. 그럼 벽을 넘을 가능성이 확 높아지지.”
“우리는 불가능하겠네.”
난희주의 입가에 씁쓸한 기색이 서렸다.
그리고 그건 잠자코 듣고 있던 백설도 마찬가지였다.
반호진이 말한 세 가지 중 그 어떤 것도 하오문은 가지지 못해서였다.
“지금은 불가능하겠지. 근데 나중에는 또 모르지.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도 처음부터 대문파, 명문세가이지는 않았어. 힘과 명성을 차곡차곡 쌓아서 지금의 위치에 도달했지. 하오문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어.”
“우리에게도 가능성은 있겠지?”
“중요한 건 일관성이지.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계속 노력할 수 있는. 중간에 엎어지지 않고.”
“…….”
난희주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무엇을 말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렸기에 난희주는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일단 지금까지는 잘해 왔잖아? 십 년 전의 하오문과 지금의 하오문은 완전히 다르니까.”
“나 혼자 이룩한 건 아니야. 사부님께서 초석을 잘 다지셨고, 난 그 위에 기둥을 세운 것밖에 안 했으니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잘되었잖아?”
“현재까지는 그렇지.”
반호진의 말에도 난희주는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현재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미래도 중요해서였다.
“지금처럼만 하면 돼. 넌 잘하고 있어. 너무 욕심을 내는 것도 좋지 않아. 아마 지금도 견제를 꽤 많이 받고 있지 않아?”
“어떻게 알았어?”
“사람은 기본적으로 질투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까. 더욱이 자기보다 못났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성공해서 나타나면 시기하는 게 사람이잖아. 순수하게 축하해 주는 경우는 드물지.”
“맞아. 그래서 고민이야. 전력이 강해지는 건 좋은데 그만큼 견제도 많이 들어와서. 우리에게도 절대고수로 성장할 인재가 뚝 하고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동정심을 유발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난희주가 반호진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봤다.
혹시나 그런 인재가 있으면 소개시켜 달라는 눈빛이었다.
실제로 점찍어 둔 인물들이 있기도 했고.
“눈빛이 심히 불순한데?”
“알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스슥!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호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난희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반혜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와 반호진의 사이를 가로막아서였다.
“안 돼요!”
“응?”
“우리 아빠는 안 돼요!”
“어머. 얘 좀 봐라?”
난희주가 재미있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어째서 반혜미가 중간에 끼어들었는지 알았기에 난희주는 오히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빠는 우리 엄마 거예요!”
“하하하.”
당찬 반혜미의 일갈에 반호진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뒤늦게 맏딸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혜미가 보기에는 아빠를 나한테 뺏길 거 같니?”
“아니요!”
“근데 왜 그렇게 걱정을 할까?”
“만약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예요!”
“오빠 딸 진짜 똑똑하다. 이제 네 살이라고 들었는데.”
네 살배기 아이가 사용하기에는 제법 어려운 어휘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모습에 난희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조숙하다는 건 진즉에 눈치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난희주는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미소를 지으며 반호진을 바라봤다.
“어릴 때는 여자애의 성장이 좀 더 빠르니까.”
“아, 아빠?”
“걱정할 거 없어. 혜미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저 이모가 장난친 거야.”
반호진이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반혜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나 아빠의 말에도 반혜미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모라니.”
“틀린 말은 아니지. 혜미와 혜성이는 너한테 조카니까.”
“그렇게 말하면 너무 나이 들어 보이잖아.”
“아직도 젊으면서 뭘.”
투덜거리는 난희주를 보며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여자에게 있어 나이는 언제나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걸 반호진도 잘 알았다.
하지만 벌써부터 그럴 나이는 아니었다.
“아직도라는 말이 더 씁쓸하게 들리네. 이제는 나이가 찰 만큼 찼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아서.”
“이제는 어린 나이는 아니지. 근데 그래서 별 탈 없이 하오문주가 된 것이기도 하잖아. 네가 스무 살도 안 되었어 봐. 아무리 능력을 증명했어도 쉽지 않을걸.”
“뭐, 그렇긴 하지.”
“자.”
스윽.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는 반혜미를 품에 안고서 반호진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작은 상자를 무형지기로 들어 올려 난희주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난희주가 두 눈을 껌뻑이며 반호진을 쳐다봤다.
“이건 뭐야?”
“뭐긴 뭐야. 선물이지. 알면서 모른 척하긴.”
“진짜 몰랐거든. 내가 눈치가 빠르긴 해도 오빠처럼 모든 걸 꿰뚫어 보지는 못해.”
“그건 나도 불가능하거든.”
“근데 갑자기 웬 선물?”
자신의 앞에 놓인 자그마한 상자를 보며 난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일도 아닌데 뜬금없이 선물을 주자 의아한 것이었다.
“취임식에 못 갔잖아. 그 대신에 주는 선물이야.”
“호오.”
“초대장까지 보내 줬는데 못 가서 미안해.”
“괜찮다니까 그러네. 마교정벌이면 당연히 내가 밀릴 만하지. 암.”
“열어 봐.”
안 그런 척해도 잔뜩 기대한 눈빛인 난희주를 보며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이윽고 난희주가 눈을 반짝이며 조심스럽게 낮고 넓적한 상자의 뚜껑을 들어 올렸다.
“무엇일까나. 어?”
입매를 씰룩거리며 딱딱한 종이 상자의 덮개를 연 난희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곱게 개여 있는 옷을 보는 순간 어떤 물건인지 단번에 파악한 것이었다.
그래서 난희주는 확인하려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어 반호진을 강렬하게 쳐다봤다.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천잠보의야.”
“지, 진짜 천잠보의라고?”
“응. 마교에서 털어 왔어.”
“허어.”
출처가 마교라는 말에 의심은 한순간에 증발했다.
마교라면 천잠보의가 충분히 있고도 남아서였다.
“영약도 있긴 했는데 하오문에도 영약은 충분할 거 같아서. 써먹지 못하는 게 많기도 했고.”
“하긴. 대부분 마기 증진에 효과가 있는 영약이나 영단들이었을 테니까. 근데 이런 걸 나에게 줘도 돼? 많이 과한 거 같은데?”
언행불일치한 모습으로 난희주가 입을 열었다.
한 손으로 천잠보의를 꽉 움켜쥔 채로 말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백설이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너에게 가장 필요할 것 같아서. 좀 과하다 생각하면 나중에 우리 애들한테 선물이나 좀 줘. 백 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근접한 산삼이라든지.”
“그 정도는 충분히 해 줄 수 있지. 오빠 말대로 나에게는 조카나 마찬가지인데. 그 정돈 안 아깝지.”
“그러니까 편히 받아.”
“고마워.”
뒤늦게 자신이 천잠보의를 움켜쥐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난희주가 양 볼을 살짝 붉혔다.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난희주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천잠보의를 꽉 쥐었다.
“한번 펼쳐 봐. 입어 보는 건 좀 그렇고.”
“나는 괜찮은데 오빠가 부담스럽겠지?”
“당연하지.”
“자, 그럼 어디 한번 볼까. 나도 천잠보의는 처음 봐. 아래 등급의 보의는 몇 개 보기는 했는데.”
난희주는 잔뜩 기대한 얼굴로 천잠보의를 펼쳤다.
그러자 보드라운 느낌과 함께 때 하나 묻지 않은 순백의 천잠보의가 활짝 펼쳐졌다.
“크기는 입으면 어느 정도 조절이 될 거야. 덩치가 큰 사람이 입어도 생각보다 조이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정말 고마워. 잘 입을게.”
“늦었지만 문주가 된 거 축하해.”
“고마워.”
진심이 담긴 반호진의 축하에 난희주는 환하게 웃었다.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던 천잠보의를 품에 가득 안으면서 말이다.
“전대 문주님은 잘 지내시고?”
“정정하셔. 내 후계자를 고르신다고 두문불출 중이야. 문주직을 내려놓았으면 좀 쉬셔도 되는데.”
“너무 할 일이 없는 것도 안 좋아. 소일거리는 있어야지. 그래야 건강해.”
“나도 알아서 일단은 지켜보는 중이야. 후계 선정은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 나도 자식을 낳았으면 좀 쉬웠으려나.”
“후계 다툼도 생각해야지. 자식이라고 해서 네 뜻대로 살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식이 있다고 해서 꼭 고민이 해결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새로운 고민이 끊임없이 생겼다.
“그렇긴 하겠다. 근데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아서 부탁을 못하겠네. 은근슬쩍 오빠한테 부탁할 게 있었는데.”
“넣어 둬.”
“뭔지는 알고 그러는 거야?”
“대충은. 현재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까 생각하면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다니까.”
난희주가 눈을 흘겼으나 반호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또한 도와줄 마음도 없었다.
다른 이의 결정에 이래라저래라할 권한이 그에게는 없어서였다.
사람을 얻고 싶으면 당사자가 직접 그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그래도 방해는 하지 않잖아?”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내 자신이 처량하다.”
“약한 척할 거면 그만 가. 일이 많을 텐데.”
“이제는 달래 주지도 않네?”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다 보니.”
오늘도 어김없이 얄미운 한마디를 날리는 반호진을 난희주가 새치름하게 쳐다봤다.
그런데 그 말에 반혜미의 얼굴이 밝아졌다.
칼같이 쳐 내는 모습을 보자 아주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반면에 반혜성은 다른 사람들이 떠들거나 말거나 간식으로 가져온 다과를 흡입했다.
“여전히 한마디도 안 지네. 더구나 이제는 자식들까지 합세하니 도무지 이길 방도가 없어.”
“부러우면 너도 결혼 해. 막말로 넌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잖아.”
“결혼은 뭐 나 혼자 하나. 됐어, 그 얘기는 그만할래. 마교를 습격했던 이야기나 해 줘. 십만대산에 대해서.”
난희주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십만대산에 대한 정보라도 알아가겠다는 듯이 그녀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집에 온 것뿐인데요.”
“그 집을 몇 년 만에 온 건 알고 있지?”
가주전에서 모용척을 맞이한 모용궁이 고개를 삐뚜름하게 꺾으며 대답했다.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결코 그렇지 않아서였다.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꼬박꼬박 찾아왔습니다만.”
“찾아만 왔지, 찾아만. 하루 머물고 곧장 떠나지 않았더냐.”
모용궁이 서운함이 가득 담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모용척은 당당했다.
“대신 절대고수가 되어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