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각자의 길. -01
봉구의 손이 책상 위를 쓸었다.
특기를 살리기 위해 천영각에 자원했으나 솔직히 이렇게 빨리 진급할 줄은 몰랐다.
더욱이 그는 엄밀히 따지면 순혈이 아니었다.
남창 출신도 아니고 하오문 출신이었기에 차별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반호진은 차별은커녕 그의 능력을 인정해 부각주로 임명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그래서 존경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만약 자신이 반호진이었다면 결코 이런 인사를 단행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아무리 충성을 맹세했다고 하나 사람을 믿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당장 그만 하더라도 부각주가 되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다.
한데 반호진은 하오문 출신임에도 그를 굳게 믿어 주었다.
“그러니까 절대 실망시켜 드려서는 안 돼.”
봉구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믿어 주는 만큼 그 믿음에 보답해야 하는 게 도리였다.
당장은 무림 정세가 평화롭지만 이 평화가 언제까지고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제이의 천사맹과 마도련이 등장할 수도 있었기에 평화로울 때 더욱 예의주시해야 했다.
“지금이야 연이은 전쟁으로 인해 소실된 전력을 복구하느라 다들 여념이 없지만 힘이 어느 정도 복구되면 슬슬 딴생각을 하겠지.”
힘이 있다면 쓰고 싶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반호진이 괴짜라고 할 수 있었다.
강호를 마음대로 호령해도 되건만 반호진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세상 다 산 은거고수처럼 남창에 칩거한 듯이 살았다.
“역사는 늘 반복되었으니까. 게다가 백도무림의 세력 구도가 새롭게 개편되는 중이기도 하고.”
봉구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오대세가의 위상이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그게 봉구의 눈에는 보였다.
시작은 선우세가였는데 뒤이어 모용세가도 무섭게 치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언제나 오대세가의 수좌에 꼽혔던 남궁세가나 사천당가는 크게 흔들리지 않지만 나머지 세 가문은 달랐다.
특히 오대세가 중 말석이라 할 수 있는 황보세가와 제갈세가가 큰 위협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동안 너무 해 먹었어. 이제는 좀 바뀔 때도 되었지.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니까.”
성장을 위해서는 경쟁이 필수였다.
더욱이 향후 선우세가와 모용세가의 수장이 될 선우방과 모용척은 반호진과도 각별한 사이였기에 자연스레 봉구도 두 가문을 응원하는 쪽이었다.
예전부터 내심 바뀌길 바라기도 했고.
또 오대세가라 거들먹거리던 가문이 몰락하는 모습을 한 번 정도는 보고 싶었다.
“원래 싸움 구경이랑 불구경이 가장 재미있는 거니까. 흐흐흐!”
봉구가 음흉하게 웃으며 키득거렸다.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구경이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그가 놀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천영각의 부각주로서 해야 할 일은 확실하게 처리했다.
“어떻게 보면 이 또한 내가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강호정세를 파악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봉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지금이야 딱히 지저분한 일을 할 필요가 없지만 나중에는 몰랐다.
어쩌면 비밀리에 더러운 일을 해야만 하는 때가 올 터였다.
그리고 그때 그걸 할 수 있는 건 무상문에서 자신뿐이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어.’
봉구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반호진과 무상문을 위해서라면 누구도 손에 더러운 걸 묻히기를 피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과 잘하는 건 엄연히 달랐다.
조금은 순진한 구석이 있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봉구는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라는 하오문 출신이었다.
그렇기에 그런 쪽의 일에 익숙했다.
‘또한 그래야만 하고.’
남들과는 차별화된 장점을 가지고 있는 건 아주 큰 강점이었다.
처음 반호진을 만났을 때 피력했던 부분이 바로 그것이기도 했고.
“일단은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각오야 언제든지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봉구는 현재에 집중했다.
요즘 들어 사마의성이 키우는 정보 조직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중이었기에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해야 했다.
아무리 사마의성이 집중적으로 키우는 정보 조직이라지만 따라잡히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기에 봉구는 눈을 빛내며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
“여기는 올 때마다 바뀌는 거 같아요.”
“바뀌긴. 정문은 똑같은데.”
“문주님도, 참. 분위기가요. 그리고 규모도 처음과 비교하면 정말 달라졌잖아요. 거의 두 배는 커진 것 같은데.”
“처음이 너무 작았어.”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던 면사여인이 피식 웃었다.
커진 게 아니라 원래의 규모를 찾아갔다는 말이 맞아서였다.
애초에 자신의 위상은 생각하지 않고 너무 작게 지었었다.
“그렇긴 해요. 무상문주님께서 의외로 검소하신 성격이라.”
“검소한 것도 있지만 만사 귀찮아하는 것도 있지.”
“호호.”
백설이 어색하게 웃었다.
무상문의 정문에서 무상문주를 욕하는 말에 동의하기가 어려워서였다.
상관인 면사여인이야 친하기에 상관이 없다지만 그녀는 달랐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눈치 보기는.”
“저는 문주님과 다르다고요. 그리고 무상문주님이야 관대한 성격이라 이런 말을 들어도 신경 쓰지 않으시지만 다른 분들은 다르니까요.”
“하긴. 서 공자님이 좀 극성맞긴 하지.”
“이제는 보통 무인이 아니시잖아요.”
백설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그녀도 예전에 비하면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지만 서조운이나 다른 의형제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었다.
특히나 서조운은 황금 세대라 불리는 이들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맞아. 클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클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러니까요. 이십 대에 초월경이라니.”
“근데 이미 더 어린 나이에 오른 이가 있어서 충격이 덜해.”
“진짜 대단하신 분이죠, 무상문주님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절대고수로 성장시켰으니까요.”
“우리에게도 그런 인재가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없으니까 따로 말하지 않은 거겠지?”
면사여인, 난희주가 면사 속에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생각이 의미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상문주님의 성격상 그럴 가능성이 크죠. 만약 싹수가 보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티를 내 주셨을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으니까.”
“딱 한 명만 있으면 되는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명만.”
난희주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녀는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반호진과 같은 천하제일인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서조운, 선우방, 모용척, 정이륭과 같은 이들을 바랄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것도 욕심이죠.”
“그런가?”
“누구나 가질 수 있다면 희소성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겠죠.”
“하아.”
냉정하지만 맞는 말에 난희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다시 한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만약 반호진보다 먼저 서조운과 정이륭, 사마의성을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웅성웅성.
그때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던 정문 앞이 시끄러워졌다.
누군가의 등장에 방문객들이 웅성거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웅성거림이 난희주와 백설이 서 있는 쪽으로 점차 가까워졌다.
“어서 오세요, 문주님.”
“네가 직접 나온 거야?”
“문주님께서 직접 오셨는데 당연히 제가 마중을 나와야지요.”
“이거 영광인데.”
웅성거림에 고개를 들었던 난희주의 두 눈에 살짝 놀람이 떠올랐다.
다른 이도 아니고 무상문의 총관인 황매향이 눈앞에 다가와 있어서였다.
“영광이라니요.”
“영광이지. 무상문의 총관인데.”
“일개 총관일 뿐이에요.”
“황 총관을 일개 총관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안 그래?”
“맞아요.”
백설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당장 그녀만 해도 난희주의 말에 십분 동의했다.
“이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드릴 건 없어요.”
“내가 뭘 바라고 이런 말 하는 게 아냐. 그냥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뿐이지. 자리를 잘 잡아서 다행이기도 하고.”
“들어가시죠.”
“그래.”
난희주나 백설은 몰라봐도 다들 황매향은 알았다.
그렇기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이들이 궁금한 눈으로 난희주와 백설을 힐끔거렸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호위무사들을 대동하고 들어가자 누구인지 다들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똑똑똑.
“문주님.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들여보내.”
“네.”
짧은 대답과 함께 황매향은 익숙하게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난희주와 백설이 들어갈 수 있게 살짝 비켜서며 출입문을 열자 두 여인이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이야, 오빠.”
“그러게.”
“신수가 훤해졌는데?”
“그럴 수밖에. 나야 잘 먹고 잘 사니까.”
난희주의 인사를 받아 주며 반호진이 자리를 권했다.
그러면서 백설의 묵례도 받아 주었다.
“얘기는 들었어.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어? 그동안 바쁘게 살았으니까. 이제는 좀 여유를 누려 봐야지.”
“너무 쉬면 관절이 녹슨다.”
“그 정도까지는 안 늘어지지. 자, 인사해야지?”
적당히 대꾸해 준 반호진이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러자 반호진의 양쪽에 앉아 있던 두 아이가 경계 섞인 표정으로 인사해 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 난 오빠의 친한 동생인 난희주라고 해.”
자신에게 집중되는 두 쌍의 시선을 차례대로 마주하며 난희주가 면사를 벗었다.
처음 만나는 만큼 인사는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녀가 면사를 벗자 쌍둥이 남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면사를 쓰고 있을 때도 예쁠 거라 예상하긴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반혜미와 반혜성은 커다래진 눈으로 멍하니 바라봤다.
“쿡쿡!”
그 모습에 난희주의 뒤에 서 있던 백설이 작게 웃었다.
쌍둥이의 놀란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였다.
“내가 한 미모 하기는 하지.”
“우리 엄마가 더 예뻐요!”
“그건 인정. 모용 소저는 삼봉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근데 나도 꿀리진 않는단다.”
우쭐대는 난희주의 모습에 반혜성이 소리쳤다.
예쁜 건 사실이나 엄마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뭐, 좀 예쁘기는 해요.”
“쫌?”
“네.”
“아들이라서 그런가. 확실히 오빠를 닮았네.”
퉁명스럽게 인정하는 반혜성의 모습에 난희주가 씨익 웃었다.
외모는 다른데 성격은 판박이인 것 같아서였다.
반면에 반혜미는 말이 없었다.
대신 여전히 경계 어린 표정과 눈빛으로 난희주를 힐끔거렸다.
“어떤 부분이?”
“반골 기질이?”
“내가 무슨 반골이야. 난 그 정도는 아니야.”
“청개구리 이상이기는 한데.”
난희주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라는 말에 순순히 긍정하기가 어려워서였다.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진 않잖아?”
“대신 상처를 주지.”
“인생은 착하게만 살 수는 없어.”
“그건 인정.”
어깨를 으쓱거리며 난희주가 피식 웃었다.
모든 이에게 착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늦었지만 문주가 된 걸 축하해. 취임식 때 못 가서 미안하고.”
“괜찮아. 못 올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잖아. 처음에는 조금 서운했는데 십만대산에 간 걸 알고는 바로 이해했어.”
난희주는 솔직하게 말했다.
처음 참석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진짜 많이 섭섭했었다.
하지만 불참하는 이유가 십만대산을 정벌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고 난 후에는 서운함을 말끔하게 털었다.
사유가 지극히 타당해서였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
“고맙긴. 당연한 거지. 다른 곳도 아니고 십만대산인데. 근데 십만대산을 정벌할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난희주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무림 역사상 마교가 중원을 침공한 적은 많았어도 반대의 경우는 없었다.
그렇기에 난희주는 궁금했다.
“별거 없어. 그냥 당한 만큼 갚아 주고 싶어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