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충정(忠情).
정현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당황한 것이었다.
그러자 쌍둥이 남매도 덩달아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
“제가 어떻게 아저씨입니까?!”
“스물두 살이면 아저씨지. 약관의 나이인데. 빨리 결혼했으면 자식도 있을 나이야.”
“그, 그렇긴 합니다만.”
정현이 말끝을 흐렸다.
이렇게 말하니 반박할 게 궁색해져서였다.
하지만 머리로는 납득이 되어도 가슴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이 차이를 봐. 우리 쌍둥이들 이제 네 살이야. 너랑은 무려 열여덟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거의 아버지뻘이란 말이지.”
“……세월이 무상하네요. 제 나이가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충격이 상당한 모양인지 정현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말은 인정하는 듯했으나 얼굴은 달랐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 아저씨 왜 저래요?”
차분한 성격의 반혜미가 조용히 살펴보는 것과 달리 반혜성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시 한번 아저씨라 콕 짚으면서 말이다.
그 말에 정현이 울상을 지었다.
“아저씨라 불리는 게 어색해서 그래. 엄밀히 따지자면 아저씨가 아니기도 하고.”
“네? 아저씨가 아니에요?”
반혜성은 물론이고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반혜미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저씨가 맞으면서 아니라고 하자 둘 다 의아해했다.
“항렬로 따지자면 형이나 오빠라고 할 수 있지. 나한테는 사질이니까.”
“오……빠요?”
“……형?”
이어지는 반호진의 말에 쌍둥이 남매가 두 눈을 껌뻑였다.
아무래도 오빠나 형이라는 호칭이 쉬이 나오지 않아서였다.
반면에 정현은 히죽 웃었다.
“훨씬 좋네요. 아저씨는 너무 먼 느낌이에요. 우리가 남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데 말이죠.”
“그렇기는 하지. 다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날 뿐.”
“윽!”
또다시 가슴을 후벼 파는 발언에 정현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반혜미와 반혜성이 키득거렸다.
스님이기에 어려운 사람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반대여서였다.
“너희들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아저씨라고 해도 뭐라 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일단 방장 사형께서도 별다른 말은 안 할 테고.”
“확실히 안 하시겠죠. 조카나 마찬가지니까요. 저도 그런 느낌이고요. 나이 차이가 또 엄청 나는 건 아니니까요. 방장과 비교하면요.”
“비교 대상이 방장 사형이면 그렇기는 하네.”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립이 훌쩍 넘은 법무의 나이를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오, 오라버니?”
“싫으시면…….”
격한 정현의 반응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던 반혜미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어째 반응이 싫어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정현은 반혜미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좋다! 오라버니라니! 본사에서는 듣지도 못한 호칭이야!”
“아, 네.”
격렬하다 못해 활활 불타오르는 정현의 기세에 반혜미가 어색하게 웃었다.
다행히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반응이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건 반호진도 마찬가지인 듯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야.”
“아, 죄송합니다!”
“우리 애들 아직 어리다. 이제 네 살이야.”
“시정하겠습니다!”
“적당히 해. 여기가 군부도 아니고.”
기합이 바짝 들어간 정현의 모습에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반대로 반혜성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 모양인지 쿡쿡 웃었다.
“그럼 저는 큰 형님이라 부를까요?”
“큰 형님?”
“예. 제가 아는 형들 중에 가장 연세가 많으세요!”
“허어. 아미타불.”
정현이 손목에 감고 있던 염주를 천천히 굴렸다.
동요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적당하네. 적어도 아저씨보다는 낫구만, 뭐.”
“흠흠! 그렇긴 하지요?”
“싫으면 말고. 당사자가 싫다면 별수 없지.”
“저는 싫다고는 안 했습니다.”
“그럼 정리 끝.”
별것 아닌 것으로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기에 반호진은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고는 뒤늦게 차호를 들어 정현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아삭.
그리고 반호진의 양옆에 앉은 쌍둥이들은 총관부 소속 시비가 가져온 복숭아를 우물거렸다.
아이가 먹을 수 있도록 잘게 잘라서 그런지 두 아이 다 야무지게 복숭아를 뜯어 먹었다.
“아이들의 두 눈에 총기가 있네요. 외모도 보통이 아니고.”
“다행히 나보다는 수매를 닮았어.”
“확실히 그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는 성격이었기에 반호진은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이왕이면 못생긴 것보다는 잘생긴 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기에 반호진은 아이들의 외모가 앞으로도 지금과 변함이 없기를 바랐다.
“근골도 훌륭하네요.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아부부터 할까. 솔직하게 말해. 밑밥 깔지 말고.”
“크흠! 그럼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당분간 무상문에 머물러도 될까요?”
“뭐야? 고작 그걸 물어보려고 분위기를 잡은 거였어?”
반호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창한 부탁도 아니고 겨우 머무르는 걸 허락받고자 하자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다른 이라면 이게 당연할지 모르나 정현은 달랐다.
사질이고 오랜 세월을 함께한 사이였기에 반호진에게는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고작이라니요. 저한테는 얼마나 꺼내기 힘든 말인데요.”
“이거 섭섭한데. 우리 사이가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였어?”
“그럼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가 가. 별채를 내어줄 터이니.”
별채를 내어 준다는 말에 정현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설마하니 별채를 배정해 줄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반호진으로서는 당연했다.
오히려 이것조차 약소하다고 여겼다.
‘지난 생에서는 허무하게 죽었지. 약관이 되기도 전에. 그러니 이번에는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면서 살거라. 또 어디까지 성장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죽었던 정현의 모습을 털어 버리며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
“스승님. 약재들 정리가 끝났습니다.”
“빨리 끝냈구나.”
“곧 비가 올 것 같아서요.”
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녀가 새하얀 앞치마를 입고서 공손히 대답했다.
그런 소녀의 모습에 우송덕이 빙그레 웃었다.
“잘했다.”
“아니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의녀의 길을 걷게 된 소녀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칭찬받을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네가 하지 않았다면 소중한 약재들이 비를 맞았을 것이다. 그러니 잘한 일이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예.”
칭찬을 들어서 기분 나쁠 건 없기에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우송덕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바삐 움직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자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어서였다.
‘일개 노예였던 나에게 제자라니.’
의평각에서 일하는 아이들은 전부 그의 제자였다.
비록 각자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분야는 다르다고 하나 그럼에도 제자인 건 변하지 않았다.
그게 우송덕은 여전히 신기하면서도 행복했다.
‘이 모든 게 전부 주군의 은덕이니 나는 죽을 때까지 갚아야 한다.’
이제는 머리카락이 회색으로 변했으나 우송덕의 충정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욱 굳건해지고 거대해졌다.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준 게 반호진이었기에 우송덕은 그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철주야 공부하고 연구했다.
‘아이들의 미래가 내 어깨에 달려 있기도 하고.’
우송덕의 인자한 눈빛이 전각 내부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처음에는 셋이서 시작했던 인원이 이제는 오십 명이 훌쩍 넘었다.
그로 인해 신경 써야 할 일이 더욱 늘었지만 우송덕은 도리어 기뻤다.
의평각의 규모가 커지는 만큼 무상문에 더욱 보탬이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으윽! 살살 좀 해 줘!”
“엄살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엄살이라니! 진짜 아프다고! 근데 침 제대로 놓는 거 맞아?”
“실수인 척 다른 곳에 놓아 드릴까요?”
“그 무슨 섬뜩한 소리를.”
연습도 실전처럼 하길 원하는 반호진의 성격상 큰 부상은 없어도 자잘하게 다치는 이들은 제법 많은 편이었다.
또 문도 대부분이 아직 어린 만큼 힘 조절이 어설펐다.
감정기복도 심했고.
그렇다 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부상자가 나와서 의평각의 환자실에는 늘 부상자가 있었다.
“또 어깨가 빠지셨어요?”
“그러게. 너무 자주 빠지는 거 같아.”
“안 빠진 거 같은데요?”
“잘 봐 봐. 어깨에 힘이 안 들어가.”
물론 부상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접골을 핑계로 마음에 둔 의녀를 보러 오는 당돌한 녀석들도 있었다.
“허허허.”
근데 그 모습조차 우송덕에게는 귀엽게 보였다.
남녀가 서로에게 끌리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다.
더구나 둘 다 무상문의 문도였기에 맺어져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 나이도 어느덧 지천명이 훌쩍 지났구나.”
풋풋한 젊은이들의 대화에 우송덕은 새삼 자신이 늙었음을 깨달았다.
처음 무상문에 입문했을 때도 적지 않은 나이였으나 이제는 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나름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게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십 년은 더 살아야 할 텐데. 아이들이 어엿한 한 명의 의원이 될 때까지는. 그때까지만 버텨 주면 좋으련만.”
우송덕의 시선이 자신의 양손으로 향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등에는 검버섯이 가득했다.
그걸 보며 우송덕은 쓰게 웃었다.
인생이라는 게 바란다고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쓴웃음을 지은 것이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군과 무상문을 위해서 말이지.”
우송덕의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가장 큰 전각으로 향했다.
바로 반호진의 집무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
창문 하나 없이 밀폐된 공간에서 봉구는 쉴 새 없이 서류를 뒤적거렸다.
오밀조밀하게 적힌 쪽지들도 한쪽에 가득했는데 바로 전서구를 통해 그에게 전달된 것들이었다.
“흐음.”
암호화되어 있는 것들도 상당했는데 봉구는 어렵지 않게 금세 해석해 냈다.
처음에야 낯설고 어려웠지만 몇 년 하다 보니 이제는 읽음과 동시에 해석이 되는 수준까지 올랐다.
“전체적으로 평화롭네. 남창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고.”
기밀이라 할 수 있는 건 암호화되어 전달되어지지만 일반적인 내용들은 글자로 간략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보라는 건 표면적인 부분만 보아서는 안 되었다.
표면 아래에 깔려 있는, 숨어 있는 내용을 파악할 수 있어야 했다.
“금가장과 하오문도 별다른 일은 없고.”
봉구는 기지개를 켰다.
사방이 완벽하게 밀폐된 공간 안에 홀로 온갖 서류들과 씨름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밝았다.
정보를 조합하고 분류해서 파악하는 일이 그에게는 너무나 재미있어서였다.
물론 과도한 업무에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만큼 보람도 있었다.
“중원의 정세도 태평성대네. 근데 이런 시대를 만든 게 바로 문주님이신데.”
봉구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지금의 평화를 만든 게 반호진이건만 고마워하기는커녕 다들 누리기 바쁜 게 그렇게 꼴보기가 싫었다.
물론 마교의 십만대산을 정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이들이 반호진을 칭송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건 얼마 가지 않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금세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고는 각자 힘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북해빙궁을 전복시킨 것도 문주님이신데. 이런 것은 알려나.”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게 훨씬 더 많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런 것들을 밝히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반호진이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봉구로서는 이렇게 혼잣말으로나마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물론 힘을 키우는 게 장기적으로는 필요한 일이긴 한데, 너무 모르니 좀 그러네. 아니, 아는 사람만 알고 있으니 더 멋있는 건가?”
봉구가 눈을 반짝였다.
생각을 전환하니 또 비밀스러운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오히려 아는 이들만 안다는 게 특별하게 느껴졌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천영각의 부각주라는 걸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