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가족.
“오빠!”
내원을 가로지르던 반선희가 눈을 반짝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세 사람이 보여서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함께 있는 셋의 모습에 반선희가 도도도 뛰어갔다.
“경신술이 엉망인데?”
“뭐래.”
반가운 얼굴로 다가갔던 반선희가 양 볼을 잔뜩 부풀렸다.
인사는커녕 구박부터 하자 기분이 상한 것이었다.
“무공수련은 꾸준히 하고 있지?”
“우웅. 하고 있기는 한데…….”
“재미없지?”
“으응.”
곽춘에 비하면 사근사근한 한륭이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추며 묻자 반선희가 두 손을 앞으로 모아 꼼지락댔다.
습관적으로 하고는 있으나 재미가 있지는 않아서였다.
“그래도 꾸준히 해야 해. 건강을 위해서니까. 키도 자라고 피부도 좋아지려면.”
“무공수련을 안 해도 건강해질 방법이 있지 않을까, 오빠?”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단다.”
상냥한 한륭과 달리 곽춘은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오늘따라 밉살스러운 곽춘의 모습에 반선희가 도끼눈을 하고서 째려봤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도 곽춘은 능글맞게 웃었다.
“춘이의 말도 맞아.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어.”
“이건 인정.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면 우리는 남창의 부호로 살았을 거야.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었지.”
“동오야. 애 앞에서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한륭이 특유의 냉정한 표정으로 황동오를 노려봤다.
이제 여섯 살이 되었다고 하나 반선희는 아직 어렸다.
“시궁창이라는 단어가 어때서. 선희도 알 거는 다 알아. 안 그래?”
“알지. 근데 더러운 말이야. 지지란 뜻이지.”
“네가 하도 상스러운 말을 다 하고 다녀서 그런 거잖아.”
검지를 휘휘 저으며 대답하는 반선희의 모습을 보며 한륭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하는 행동들이 황동오에게서 많이 배운 듯해서였다.
“나만 그랬나? 다른 애들도 했는데.”
“그러니까 분위기를 좋게 몰아갔어야지. 그러면 다들 조심했을 거 아냐? 아이들이 보고 배운다는 거 몰라? 가장 먼저 하는 게 따라 하는 건데.”
“끄응!”
틀린 말이 전혀 없었기에 황동오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어떤 말을 해도 변명밖에 되지 않았기에 황동오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선희도 재미없다고 건성으로 수련해서는 안 돼. 선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알지?”
“무림문파!”
“맞아. 강호무림에 속해 있는 곳이며 무공을 배우는 곳이야. 더욱이 선희의 성은 문주님께서 직접 내려 주신 성이야. 본문에서는 가장 특별한 성이지.”
“그치만 나는 재능이 없는걸.”
반선희가 침울한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나이는 어려도 알 건 다 알았다.
자신의 무재가 평범하다는 걸 알았기에 반선희는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왜 재능이 없어. 있는데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야.”
“……정말?”
점점 아래로 숙여지던 반선희의 고개가 번쩍 들려졌다.
그러고는 기대하는 눈으로 한륭을 쳐다봤다.
“물론이지. 문주님께서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 하늘은 인간 모두에게 재능을 주었다고. 비록 그 재능의 크기가 공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떻게 갈고닦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고 말씀하셨어. 더구나 선희는 아직 어리지.”
“안 어려! 다 컸어!”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이 반선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이내 손가락 여섯 개를 폈다.
“많이 크기는 했지. 근데 우리처럼 크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하잖아.”
“그렇긴 해.”
조곤조곤한 한륭의 설명에 반선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은 좀 더 커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도 인정해서였다.
물론 세 사람처럼 큰 키를 가지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날씬하게는 클 거라고 생각했다.
“달리 말하면 선희에게는 그만큼의 시간이 있다는 거지. 이것저것 다양하게 해 볼 시간이. 물론 그렇다고 무공수련을 게을리하면 안 돼. 그건 나도 절대 용납할 수 없어. 너를 거둬 주신 문주님을 위해서라도 그래선 안 돼.”
한륭이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이것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만약 반호진이 거두지 않았다면, 정문 앞에 버려진 반선희를 모른 척했다면 지금의 그녀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한륭은 반선희가 나중에 다 자라면 반드시 반호진과 무상문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히잉.”
“울어도 이건 안 돼.”
“맞아. 사람은 은혜를 알아야 해. 하물며 짐승도 은혜를 입으면 보답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말하는 한륭을 곽춘이 거들었다.
그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이었다.
아니, 무상문도들 대부분이 같을 터였다.
“선희 너도 이제는 알아야 해. 네가 배우기 싫어하는 그 무공을 한 초식이라도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리고 네가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도.”
“다들 너무해!”
“다 컸다며? 그럼 이제 이런 것들도 알아야지. 어른스러워져야 하고. 그게 싫으면 계속 어리게 살든가.”
늘 푼수 같던 황동오가 한륭처럼 진지하게 말하자 반선희는 다시 한번 양 볼을 부풀렸다.
불만이 가득함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으이그.”
“내 머리에 손대지 마!”
“어휴. 이 말괄량이.”
“나 말괄량이 아냐!”
“애기 때는 참 귀여웠는데 말이지.”
곽춘이 키득거리자 한륭과 황동오도 피식 웃었다.
기어 다니지도 못해서 포대기에 싸여 있던 갓난아기 때가 떠올라서였다.
그때도 지금처럼 목청은 정말 좋았었다.
정문 앞에 버려진 걸 늦지 않게 발견한 것도 다 이 좋은 목청 덕분이었다.
“말괄량이 아니면 이제 우리한테 존댓말 써.”
“에?”
“언제까지 우리한테 반말할 거야? 이제는 우리도 적은 나이가 아니란다. 나이 차이만 무려 십삼 년이야, 십삼 년.”
“그럼 아저씨 아냐?”
황동오의 이마에 순간적으로 핏줄이 솟구쳤다.
아저씨라는 단어에 발끈한 것이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꼬맹이에게는 충분히 아저씨로 보일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존댓말 하렴.”
평정심이 흔들린 황동오와 달리 곽춘은 느물거리며 말했다.
반말을 쓰며 꼬맹이로 남을지, 아니면 존댓말을 사용해서 어른 대접을 받을지 양자택일을 하게 만들었다.
“어…….”
“고민되면 나중에 선택해도 돼. 급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빠져나갈 구석을 주면 안 되지. 이제는 마냥 어리광을 받아 줄 나이가 아니라고.”
착한 오빠 역할을 하는 한륭을 곽춘이 지그시 흘겨봤다.
너무 잘해 주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반선희가 특별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오냐오냐해 줘서는 안 되었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이야. 엄하게 가르치는 건 일곱 살이 될 때 해도 늦지 않아. 꼭 철이 일찍 들 필요는 없으니까. 선희는 우리하고 달라.”
“흐음.”
차분한 한륭의 목소리에 곽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과 반선희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에 어느 정도는 동의해서였다.
그리고 철이 빨리 들어서 좋을 게 없다는 점에서는 그도 동의했다.
“모르는 게 있다면 알려 주는 게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고. 처음부터 다 알고, 잘하는 건 아니니까. 우리도 몰라서도 깨지고, 이유 없이 혼나고 그랬잖아.”
“그랬었지.”
“그런 걸 굳이 아이들에게까지 이어지게 할 필요는 없잖아.”
한륭이 반선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곽춘이 만졌을 때와 달리 지금은 얌전했다.
“맞아. 악습은 끊어야지.”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시작하면 돼. 알아서 잘하는 아이도 있지만 하나하나 알려줘야 하는 아이도 있는 법이니까. 일단 선희는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부터 찾아보자. 그다음에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도 늦지 않으니까. 무작정 자신이 어떤 것에 재능이 있는지 알아보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거야.”
곽춘과 한륭의 대화를 들으며 반선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없기도 했고.
“우웅.”
“혹시 닮고 싶은 사람은 없어?”
“어?”
젖살 가득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반선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한륭의 말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서였다.
닮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아니지만 멋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있었다.
“있는 모양이네. 그럼 우선은 지켜 봐.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우리와 달리 선희는 앞으로 많은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어허. 우리가 더 오래 살 수도 있어. 고수가 되면.”
“혹은 어중간한 무인이 되어 대륙 어딘가에서 비명횡사할 수도 있고.”
헛된 꿈을 꾸는 황동오를 향해 곽춘이 일갈했다.
꿈을 가지는 건 좋지만 그래도 지나치게 허황된 꿈은 좋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현실적인 목표를 정하는 게 정신적으로도 좋았다.
“너는 말을 해도 꼭.”
“가능성이 없다는 게 아니라 너무 거창하다는 거야. 일단은 현실성 있는 목표부터 이룬 다음에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자고.”
“넌 너무 안전주의야. 때론 모험도 해야 하는데.”
“그러다가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지.”
“어휴.”
황동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을 해도 꼭 재수 없게 해서였다.
“내 말은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는 거야. 너에게 딴죽을 걸려는 게 아니라.”
“그래도 너무 부정적이야.”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아. 다만 서둘러 뛰다가 넘어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 그렇지.”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거나 말거나 반선희는 여전히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름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한륭은 따스한 눈빛으로 지그시 지켜봤다.
***
“참 신기하네. 숭산의 거처와 거의 똑같은 거 같은데?”
안내를 받아 접객실로 들어온 정현이 두 눈을 껌뻑였다.
크기가 좀 더 커졌을 뿐 구조가 거의 흡사한 것 같아서였다.
달칵.
“같은 사람이니 방의 모습도 비슷할 수밖에.”
“사백님!”
“이제는 사백이 아니지. 사숙이라 불러야지. 법조 사형의 제자가 되었으니.”
“하하하. 이게 습관이 되어서요.”
문이 열리며 반호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몇 년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는데 반호진만 보면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반대로 자신은 세월을 직격으로 맞은 느낌이었다.
“잘못된 걸 알면 고쳐야지.”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이제는 소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헌칠한 청년 스님이 된 정현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달라진 점은 외향만이 아니었다.
“벽을 넘었구나?”
“모두 사숙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내가 뭘 가르쳤다고. 널 가르친 건 법조 사형이시지.”
“저의 기초를 잡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사숙님은 저의 두 번째 스승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진짜 사부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그쯤 해.”
반호진이 팔을 휘저었다.
과해도 너무 과해서였다.
“농담이 아니라 진담입니다. 만약 사숙님의 금과옥조와도 같은 조언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 으응?”
쓸데없이 경건한 목소리로 일장 연설을 하던 정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호진의 등에서 툭 하고 튀어나온 두 개의 자그마한 인영 때문이었다.
머리 모양과 옷 색깔만 다를 뿐 똑 닮은 두 아이의 모습의 정현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보는 건 처음이지? 이 아이가 첫째 혜미고, 이 녀석이 둘째 혜성이다. 둘 다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