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461화 (외전) (461/468)

외전. 1. 도공(刀公).

“받아라!”

“어림없지!”

따앙! 따다다당!

넓은 연무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대련을 지켜보던 유호량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처음 봤을 때만 하더라도 꼬맹이였던 애들이 이제는 제법 남자다운 태가 났다.

키도 훌쩍 크고 어깨도 떡 벌어진 모습을 보자 유호량은 왠지 모르게 부모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얍!”

“합!”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여섯 남짓한 아이들이 열심히 목검과 목도, 목창을 휘둘렀다.

각자에게 맞는 병기를 들고서 기초 수련을 하는 것이었는데 아이들 중에는 여자아이들도 제법 있었다.

“허허허.”

열심히 수련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자 유호량은 흐뭇하면서도 뿌듯했다.

저 아이들이 무상문의 미래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느꼈다.

별호조차 없이 강호를 떠돌던 무명의 무인인 그를 거둬줬을 뿐만 아니라 초월경의 고수로 이끌어 준 게 바로 반호진이었다.

‘만약 문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난 어중이떠중이로 강호를 떠돌다 죽었겠지.’

사실 유호량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강서성 남창까지 흘러들어왔고, 운 좋게 반호진이 이곳에 터를 잡아 무상문을 개파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찾아갔다.

그러나 반호진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반호진의 성격이 까칠하다는 건 유명했기에 비무첩만 잘 전달되어도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근데 행운이 찾아왔지. 천운이 닿았다고 해야 하나.’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호량은 그날 바로 반호진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이야 도공(刀公)이라 불린다지만 그때 당시에는 무명소졸이나 다름없었는데 말이다.

그게 유호량은 아직도 신기했다.

‘장수는 자신을 알아봐 주는 군주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친다고 했지. 나 역시 마찬가지야.’

아무도 몰라주던 그를 지금의 위치까지 올려 준 게 반호진이었다.

그를 인정해 주는 건 물론이고 무공서까지 내려 주었기에 유호량은 맹세했었다.

자신의 목숨을 반호진과 무상문에 바치기로 말이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지.’

유호량은 선물받은 도를 툭툭 건드렸다.

반호진이 직접 하사한 도였는데 원래 사용하던 애병과 길이, 무게는 동일했으나 품질은 전혀 달랐다.

명도(名刀)라 칭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유호량은 만족스러웠다.

“근데 갚을 날이 올지 모르겠네.”

“무슨 말씀이세요?”

“아, 천영각주.”

“하하하.”

“아직도 직위가 낯선가?”

말끔한 복장의 조우삼이 멀겋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는 이십 대 중반이 지났음에도 조우삼은 여전히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이상하게 적응이 되지 않더라고요.”

“벌써 몇 년째인데. 대외적인 활동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부담스러운데 겨우겨우 하고 있는 겁니다.”

“잘하고 있네.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말게.”

유호량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그가 보기에는 잘하고 있어서였다.

“솔직히 잘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 정도면 충분하네. 건성으로 하는 것보다는 낫지. 그리고 나나 각주나 이런 자리는 처음 아닌가?”

“호법님께서는 잘하시는 것 같으신데요.”

조우삼의 시선이 비지땀을 흘리며 대련에 열중하고 있는 문도들에게로 향했다.

평소에는 지금처럼 무상문도들을 가르치지만 주기적으로 소림사와 연계된 표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남창을 넘어 무림 전역에 소문이 날 정도로 대단했다.

개인적으로 유호량의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오는 무인들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나라고 처음부터 잘한 건 아니었네. 하다 보니까 는 거지. 조 각주도 그럴 테고. 아직 젊지 않나.”

“저도 이제는 젊은 나이는 아니죠.”

“나에 비하면 한창 젊은 나이지.”

유호량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말했다.

불혹을 넘은 그에 비하면 조우삼은 한창 때였다.

“문주님께서는 저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르셨죠.”

“허허허. 문주님은 논외로 놓아야지. 어찌 문주님과 비교하나? 문주님과 비교할 수 있는 존재는 달마 대사나 장삼봉, 천마 정도나 가능할 걸세.”

“역시 제가 좀 말도 안 되는 예를 들기는 했죠?”

“당연히. 객관적으로 비교하려면 후기지수들과 비교를 해야 하지 않겠나. 조 각주의 나이를 생각하면.”

“근데 하필이면 당대의 후기지수들은 죄다 황금 세대라…….”

조우삼이 쓴웃음을 지었다.

후기지수들이라고 해도 만만한 이가 단 하나도 없어서였다.

반호진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또래의 무인들 중에도 괴물들이 수두룩했다.

오죽 했으면 앞에서는 황금 세대, 뒤에서는 지옥의 세대라고 말할 정도였다.

“지옥의 세대를 말하는 게지?”

“흠흠!”

“뭐 어떤가. 다들 암암리에 말하고 다니는 것을. 아마 다른 분들도 알고 계실 걸세. 또 사실이기도 하고. 나였어도 조 각주와 같은 심정일 걸세.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무공의 격차는 어마어마하니.”

유호량은 십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조우삼과 같은 마음을 품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제법 초탈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는 알아주는 이 하나 없는 무명소졸이었다.

“그러니까요.”

“하나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 되네. 나를 보게나. 나는 문주님께서 거둬 주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무명소졸이었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과분하게도 도공이라는 별호를 얻지 않았나. 나에 비하면 조 각주는 시작점 자체가 달라. 또한 나보다 나이가 훨씬 젊지. 그러니 자네의 가능성을 믿게. 또한 문주님의 선택을 믿고.”

“아.”

조우삼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소연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었다.

“정 스스로를 못 믿겠으면 문주님의 선택을 믿게나. 그건 확실하니까. 많은 사례가 증명하지 않나.”

“못난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원래 자네의 나이에는 고민하고 방황하는 게 당연한 것이네. 오히려 문주님께서 특별한 경우이시지. 허허허.”

“근데 호법님께서는 결혼 생각이 없으신지요?”

“내 나이가 몇인데.”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이었으나 유호량은 당황하지 않았다.

민망함을 숨기고자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함을 눈치채서였다.

“혼담이 제법 들어온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어떻게 들었나?”

“아마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겁니다.”

“허어.”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시지 않습니까?”

조우삼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면서 유호량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혹시나 마음에 둔 이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결혼이라는 게 한 사람의 마음만으로 되나. 둘의 마음이 같아야 이루어지는 게지.”

“호법님께 구애하는 곳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만.”

“그럼 뭐 하나. 목적이 불순한데.”

“그렇긴 하죠.”

유호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저 좋아했을 텐데 그러기에는 그의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다.

한데 그 순간 이상하게도 유호량의 뇌리에 한 여인이 떠올랐다.

“아직은 생각이 없네. 그리고 결혼에 대한 고민은 조 각주도 해야 하지 않나? 혼기가 꽉 찼는데.”

“저는 본문에 뼈를 묻을 생각이라.”

“혼인한다고 해서 뼈를 묻지 못하는 건 아니네만.”

“솔직히 다른 사람의 삶을 책임질 자신이 아직은 없어서요.”

“마음에 드는 여인이 없구먼.”

유호량이 다 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에둘러 말했지만 그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그건 아닙니다만.”

“아니긴.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지.”

“유 호법님.”

얼굴을 붉히며 극구 부인하는 조우삼을 놀리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방금 전까지 생각했던 여인의 목소리에 유호량이 화들짝 놀랐다.

“황 총관?”

“예. 저예요.”

“커험! 갑자기 무슨 일이오?”

“손님이 찾아오셔서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고자 유호량은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황매향을 바라봤다.

“손님 말이오?”

“예. 친우분들께서 오셔서 응접실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알겠소.”

“저는 그럼 이만.”

할 말만 하고 쌩하니 몸을 돌려 멀어지는 황매향의 모습을 유호량은 황망히 바라봤다.

정말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서였다.

그러다가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조우삼에게 눈인사를 한 후 응접실로 향했다.

“자네 왔는가!”

“오랜만일세!”

“얼마 전 소식을 들었네. 십만대산을 정복했다고. 정말 대단하네!”

응접실에 들어가기 무섭게 낭인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 세 명이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런데 친구들은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전부 열 살 안팎으로 보이는 아이들을 대동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도공 대협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시선이 닿기 무섭게 세 명의 사내아이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해 왔다.

하나같이 어른스럽게 포권을 해 왔던 것이다.

그 모습에 유호량은 쓴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흠흠! 몇 번 찾아오기는 했어도 내 자식을 보여 준 적은 없는 것 같아서 말이야.”

“신기하게도 우리 셋 다 같은 생각을 했더라고. 아이들의 나이가 비슷해서 그런가.”

유호량의 쓴웃음에 친구들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본인들 스스로도 민망한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속내를 잘 알고 있으니.

그럼에도 아이들을 물리지 않은 건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어서였다.

“자네도 이제 슬슬 제자를 구할 때가 되지 않았나. 우리야 혼례를 올려서 처자식이 있다지만 자네는 혼자이니. 혹 원하는 이성상이 있다면 내가 중매를 서 줄 수도 있네.”

셋 중 가장 직설적인 성격의 중년인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자신의 아들이 유호량의 제자가 되는 것에 실패한다면 그 대안으로 중매를 서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너무 계산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유호량처럼 절대고수가 아니었기에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마음만 받겠네.”

“이 친구야. 아직 안 늦었네. 자네는 탈인경에 올라 노화도 느리지 않나. 나이만 사십 대이지 육신은 삼십 대보다도 더 낫지 않은가. 그러니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보게. 따로 나를 찾아와도 되고.”

예의상 거절하는 것이라 여긴 중년인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친구들도 있어 한 번은 빼는 것이라 여긴 것이었다.

하지만 유호량은 진심이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독립할 계획이 없나? 무상문의 호법이라고 하나 가신은 아니지 않나. 그렇다고 혈족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독립할 수 있을 듯한데.”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껏 말이 없던 호리호리한 체격의 중년인이 묻자 유호량의 얼굴이 굳어졌다.

넌지시 물어보는 듯했으나 그 저변에 깔린 의도는 명확했다.

그렇기에 유호량의 눈빛이 달라졌다.

“궁금해서 그러네. 우리야 근근이 먹고 살지만 자네는 다르지 않나.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개파도 가능하고. 무상문주님의 성격상 말리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럴 생각은 전혀 없네. 난 이곳에 뼈를 묻을 것이야. 설사 결혼을 한다고 해도 말일세.”

“아깝지 않나? 힘들게 올라왔으니 이제는 좀 누려도 되지 않겠나.”

단호하게 말했음에도 말을 꺼냈던 중년인은 끈질겼다.

은근하게 헛바람을 주입했던 것이다.

그런 친구의 모습에 유호량은 두 눈을 감았다.

흐른 세월만큼 친구들도 변한 것 같아서였다.

“만약 개파를 한다면 우리가 미력하게나마 도와줄 수도 있네.”

“암! 우리가 보통 사이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자기들끼리 죽이 척척 맞는 모습에 유호량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이내 두 눈을 뜨고서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나가게.”

“응?”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난데없는 말에 세 명의 중년인이 대경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였다.

“더는 찾아오지 말게. 찾아와도 만나지 않을 것이고.”

스윽.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이 유호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세 명의 중년인들은 물론이고 아이들도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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