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終章. 그토록 바라던. -01
콰콰콰쾅!
지진이 서서히 가라앉을 때 곳곳에서 무너지고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호진이 시작을 끊자 가주들과 장문인들도 주요 시설들로 보이는 곳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서조운도 검파를 움켜쥐었다.
“형님과도 같은 인물이 또 나오지는 않겠죠?”
“나올 수도 있지. 내가 버젓이 존재하고 너도 있으니까. 다만 가능성이 희박해서 그렇지. 가능성은 어디에나 있지.”
“그럼 더 확실하게 짓밟아 놔야겠네요.”
서조운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사방팔방에서 곡소리와 단말마가 들려왔으나 불쌍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정마대전 당시를 떠올리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또한 시작은 마교가 먼저 했기에 명분은 중원무림에 있었다.
‘형님의 자녀들과 앞으로 태어날 내 자식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큰 피해를 입혀 놓아야 해.’
이번 공격은 단순히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중원무림의 미래가 걸려 있기도 했기에 서조운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쾅! 쾅! 쾅! 쾅!
이런 생각은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인 듯 조금 크거나 특별하다 싶은 전각들은 모조리 박살 났다.
보이는 족족 무너뜨리고 뭉개 버리자 멀쩡한 건물을 찾기가 힘들었다.
“악마 같은 놈들!”
“귀신이 되어서도 저주할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복수할 것이야!”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으나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이 콧방귀를 끼며 더욱 거세게 주변을 쓸어버렸다.
마인이고 건물이고 할 거 없이.
“다 부수지는 마. 챙길 건 챙겨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챙겨 가야지.”
“나는 무공서고에 가고 싶어. 분명 백도문파들의 무공비급이 있을 거야. 우선 그것들부터 회수해야지. 어쩌면 소실된 무공서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고.”
“마공서는 불태우고요. 비전절학들은 따로 관리해서 찾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타격은 있을 겁니다.”
반호진의 말에 선우방과 모용척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무인이다 보니 가장 먼저 무공서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반면에 서조운은 다른 쪽에 집중했다.
“숨겨 놓은 영약들도 분명 있을 텐데. 영초나 영단은 마공이나 정공을 가리지 않으니 챙기면 좋을 것 같아요. 남겨 둬 봤자 마교에만 좋은 일이니 이참에 싹 다 털어 가죠.”
“아주 좋은 생각이야.”
“저희들도 이제는 이런 쪽에 조예가 생겼으니까요. 흐흐흐!”
반호진의 허락에 서조운이 음흉하게 웃었다.
이제는 나이도 적지 않고 강호에서의 위치도 상당했지만 그럼에도 서조운은 체면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명예보다는 실리를 챙기는 데 더 중점을 두었기에 서조운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그건 선우방이나 모용척, 정이륭도 마찬가지였다.
“영약이라. 그건 좀 탐이 나는데.”
“우리가 못 쓸 것 같으면 다 망가뜨리면 되죠. 아니면 조운이가 불태우거나. 태워 버리는 건 조운이가 전문이니.”
“그렇지.”
선우방과 모용척의 시선이 서조운에게로 향했다.
마치 그를 믿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제 전문이기는 하죠. 똑같은 삼매진화라도 극양지기로 이루어진 삼매진화는 위력이 다르니.”
“서둘러 움직이자고. 늦으면 늦을수록 우리의 몫이 줄어드니까.”
어떻게 보면 전리품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일행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무언가 있어 보이는 곳 위주로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런 일행들을 일별한 반호진은 폐허를 방불케 하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며 느릿하게 걸었다.
승자로서 여유를 만끽하는 것이었다.
저벅저벅.
동시에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최초로 십만대산을 공격했고, 짓밟았음을.
“아쉽군. 현판이라도 있었으면 떼어 가는 건데.”
입맛을 다시며 반호진은 휘적휘적 걸어갔다.
중간중간 팽만철과 당우혁의 광소가 들려왔지만 반응은 하지 않았다.
그저 산책하듯 십만대산을 가로질렀다.
***
이른 아침부터 무상문의 정문이 부산스러웠다.
모용척과 정이륭, 상일기의 배웅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만큼 무상문의 인원 거의 전부가 정문에 나와 있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네요.”
“헛소리하지 말고 가.”
“섭섭합니다, 형님. 저는 진심인데요.”
“나도 진심이야.”
매몰찬 반호진의 대답에 모용척이 울상을 지었다.
자신은 발이 떨어지지 않는데 반호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해 보여서였다.
“얼른 가. 오빠 말고도 배웅할 분들이 계시니까.”
“……너까지 이러기냐.”
“나와 준 게 어디야?”
“어후. 이것도 여동생이라고.”
아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빨리 가라고 독촉하는 모용희수의 모습에 모용척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자신이 오빠인데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같이 지낸 시간이 몇 년인데. 부모님 생각도 해야지. 아빠야 별 신경 쓰지 않는다지만 엄마는 달라. 오빠를 엄청 보고 싶어 하실 거야.”
“끄응!”
모용척이 앓는 소리를 냈다.
반박하고 싶어도 반박할 수가 없어서였다.
실제로 어머니에게서 그리움 가득 담긴 편지를 자주 받았기에 모용척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니까 본가로 돌아가서 잘해. 엄마 좀 잘 챙겨 드리고. 이제는 효자 노릇을 할 때도 되었잖아?”
“여기서 더?”
“절대고수가 된 것 말고 오빠가 한 게 뭐 있어? 엄마 입장에서는 딱히 대단한 일도 아닐걸.”
“그, 그런가?”
“아빠나 좋아하지. 정말 오랜만에 모용세가에서 절대고수가 나왔으니까. 차기 천하십대고수이기도 하고.”
적나라한 모용희수의 말에 모용척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나같이 다 맞는 말이었기에 그로서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가문을 신경 써야지. 앞으로 네가 이끌어야 할 텐데. 어떻게 보면 지금이 딱 적당해. 배울 것도 다 배웠고.”
“아직 형님께 배울 게 많이 있습니다.”
“아니. 없어. 이제는 네 갈 길을 가야지. 방이가 그랬던 것처럼. 장가도 가고.”
“…….”
모용척이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본가로 돌아가서 시달릴 걸 생각하니 암담해서였다.
그러나 피할 길은 없었다.
“안 그래도 아빠가 벼르고 계셔.”
“……알고 있어.”
“소가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도록 해.”
“어휴.”
모용척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예전처럼 꿀밤이라도 때리고 싶은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얄밉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조심히 가.”
“자주 연락드리겠습니다, 형님. 올 수 있으면 가급적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돼. 너도 할 일이 많을 텐데. 승계 문제도 있고.”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꽤 오랜 시간을 무상문에서 머문 만큼 이래저래 할 일이 많을 게 분명해서였다.
“어차피 후계자는 저 혼자뿐이니까 괜찮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건 다른 문제니까. 무경이 높다고 다 해결되는 건 아니지. 인간관계는 무공보다 훨씬 복잡하니까. 그래도 넌 잘할 거야.”
“감사합니다. 꼭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형님!”
“보답할 것까지는 없고, 그냥 잘살면 된다. 혼처가 정해지면 청첩장 꼭 보내고.”
“아니, 형님까지…….”
모용척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여동생에 이어 반호진까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반호진은 모용척이 그러거나 말거나 한쪽에 조용히 서 있는 두 사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문주님.”
“허허허. 감사하단 말은 제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받은 게 저와 이륭이가 훨씬 더 많으니까요. 사실 아직도 어떻게 보답해야 하나 감이 잡히질 않습니다.”
“저는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로 생각하는 게 다른 모양입니다.”
상일기가 빙그레 웃었다.
예전과는 달리 넉넉한 여유가 담긴 미소였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보다 눈가에 주름이 많아져 있었다.
반호진과 정이륭이 나이를 먹은 만큼 상일기 역시 늙은 것이었다.
“받겠다는 쪽이 괜찮다고 했으니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는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아서요. 이륭이를 초월경까지 이끌어 주셨는데.”
“제가 해 준 게 아닙니다. 이륭이 스스로가 이룩한 것이지요. 또한 문주님께서 잘 가르치기도 했고요. 저는 그저 약간의 조언을 해 준 것밖에 없습니다.”
“허어.”
상일기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말없이 서 있는 정이륭을 힐끔거렸다.
좋은 생각이 있으면 꺼내 보라는 눈빛이었다.
“저도 사부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형님께 정말 많은 걸 배웠습니다. 무공뿐만 아니라요. 그래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필요 없다. 건강히 잘살면 된다. 가끔 연락하고. 어디서 지내는지는 꼭 말할 필요는 없고.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만 알려 주면 된다. 지나갈 때 여유가 되면 들르고.”
“그리하겠습니다.”
“조심히 가.”
“예.”
정이륭은 반호진을 향해 길게 읍을 했다.
감사의 마음을 잔뜩 담아서.
그런 후 서조운과 사마의성과도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진짜 다 갔네요.”
“솔직히 말하면 많이 늦었지. 원래대로라면 진즉에 돌아갔어야 했는데.”
반호진과 달리 서조운이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모용척과 상일기, 정이륭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는데 서조운은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슬프게 다가왔다.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닌데 이별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렇기는 한데…….”
“왜? 아쉬워?”
“네. 정이 많이 들었으니까요. 싸우면서 정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미운 정도 정이긴 하지. 근데 영원히 같이 있을 수는 없어. 그건 가족도 불가능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처럼 한동안은 허한 감정이 들 터였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기에 금세 익숙해질 것이었다.
“제가 너무 감성적이었던 거 같아요. 영영 못 보는 것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데. 꼭 형들이 찾아와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제가 찾아갈 수도 있고.”
“이륭이는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없을 거야. 듣자 하니 새로운 곳에 터를 잡은 모양이더라고. 예전에 강호를 유람하면서 봐 둔 곳이 있나 봐.”
“우리에게는 알려 줘도 될 텐데요. 아무리 방천문의 규율이 있다지만.”
“너무 서운해하지 마. 각 문파마다 반드시 지켜야 할 전통과 규율이 있는 거니까. 또 이륭이도 방이나 척이와 마찬가지로 승계를 준비해야 하고. 상 문주님의 나이가 이제는 적지 않으니까.”
투덜거리던 서조운이 이내 굳은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알아차렸다.
새삼 상일기가 늙었음을 말이다.
정정했지만 세월을 피하지는 못했다.
“자, 이제 그만 들어가자.”
“예.”
“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세 사람의 모습에 반호진은 몸을 돌려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서조운과 사마의성, 모용희수가 따랐다.
***
졸졸졸.
날씨가 화창해 소천검을 타고 남창을 한 바퀴 돈 반호진은 장원 근처의 강에 내려섰다.
장강이나 황하에 비하면 소소하기 짝이 없는 강이었지만 반호진은 그래서 좋았다.
평범하고 조용해서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기에 딱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
소천검을 검집에 넣으며 반호진이 중얼거렸다.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음이 체감되어서였다.
“미래도 바뀌었고.”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응시하며 반호진이 중얼거렸다.
처음 과거로 돌아온 걸 자각했을 때 그의 목표는 딱 하나였다.
천하사패의 준공을 막는 것.
막을 수 없다면 최소한 지난 생처럼 패배하지 않게 만드는 게 반호진의 목포였었다.
“그 이상을 이루었지.”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처음의 목표 이상을 이룩했다.
아니, 중원에 평화를 가져왔다.
심지어 과거보다 더한 위기가 닥쳤는데도 말이다.
“이제는 진짜 설렁설렁 살아도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