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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8장. 응징의 시간. -02
“도, 도망쳐!”
“일단은 물러난다!”
무자비한 살육에 마인들이 끝내 포기했다.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 여긴 것이었다.
비록 패배는 했을지언정 십만대산이 정복당하는 건 아니었기에 십대마가의 마인들이 빠르게 물러났다.
일종의 전략적 후퇴를 선택한 것이었다.
“다른 놈들은 놓쳐도 되지만 후계 경쟁을 하는 이들은 싹 다 조져야 해!”
“알고 있다!”
십만대산을 짓밟을 수는 있어도 정복할 수 없다는 걸 팽만철 등등도 잘 알았다.
또한 죽일 수 있는 숫자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도.
그래서 마교도들이 물러나자 일행들은 다음 작전으로 넘어갔다.
양보다는 질을 선택했다.
“마, 막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시간을 끌어! 대공자님을 지켜야 한다!”
“이 공자님을 모셔라!”
십대마가에 대한 정보는 제아무리 개방이라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금가장이나 하오문도 마찬가지였다.
중원에서 신강은 너무나 멀었고, 더욱이 십만대산은 폐쇄적이었다.
하지만 옷차림과 외모, 무경으로 신분을 알아보는 건 가능했기에 다들 조금이라도 고귀하거나 특별해 보이면 가차 없이 손을 썼다.
“이, 이 잔악무도한 놈들!”
“신께서 천벌을 내리실 것이다!”
“어이가 없군. 먼저 중원을 침공한 건 너희들이다. 이건 자업자득이지.”
또다시 주군과 주인을 잃은 이들이 비통함에 울부짖었지만 십만대산의 중심부로 걸어가던 반호진은 콧방귀를 끼었다.
가만히 있던 중원무림을 먼저 침략한 건 마교였다.
그런데 피해자 행세를 하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흥!”
그 마음은 오중건과 황보태경도 마찬가지인 듯 두 사람 다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쌍장을 내질렀다.
이윽고 곳곳에서 피가 솟구쳤다.
저벅저벅.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원로원도 사라지고 사단이 무너졌기에 각파의 수장들은 말 그대로 야생마처럼 날뛰었다.
출발하기 이전부터 복수심을 불태웠던 법무, 오중건, 운상 못지않게 마교도들을 도륙했는데 표정이 하나같이 밝았다.
무림 역사상 신강에 발을 디딘 이들은 있었어도 이렇게 십만대산에 쳐들어온 이는 없었기에 다들 잔뜩 들떠 있는 것이었다.
반면에 반호진은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가장 화려한 고루거각을 향해 걸어갔다.
“제가 길을 뚫겠습니다, 형님!”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죄다 도망치고 있기는 한데 또 모르니까요. 십대마가 중에 귀영마가와 구유마가는 암습에도 능하지 않습니까?”
“내 기감에서 벗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말이지.”
“저도 그건 알지만 그래도 형님께서 손을 쓰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잡것들은 저희가 맡아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서조운이 함께 이동하고 있는 일행들을 차례대로 쳐다봤다.
은근한 어조로 동조하기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차분한 선우방, 정이륭과 달리 모용척은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맞는 말이야. 호진이는 아까 제 몫을 다 했지.”
“누가 뭐래도 가장 큰 전공을 쌓았으니까요. 사실 저는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고요. 제가 이런 자리에 있을 줄이야.”
“사실 나도 그래.”
선우방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악명 높은 마교의 원로원과 싸우고 거의 승리하다시피 했지만 여전히 그는 지금의 상황이 실감 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붕 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모용척이 흥분해 있는 게 사실 선우방은 십분 이해가 되었다.
“형도요?”
“난 뭐 사람 아닌가. 당장 장인어른만 하더라도 신이 잔뜩 나셨잖아. 중원무림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어서. 최초는 그만큼 상징적이기도 하고.”
“설레는 단어이기는 하죠. 최초로 십만대산을 정복한 무인들.”
“엄밀히 따지자면 정복은 아니지. 궤멸이나 반파라면 또 모를까.”
“어쨌든 역사적인 날인 건 사실이니까요. 지금껏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걸 해냈으니까요.”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는 정이륭도 지금만큼은 추스르기가 쉽지 않은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초월경에 오른 것도 엄청난 일이지만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수백 년 넘게 이어진 무림 역사상 십만대산을 발아래 둔 무인은 없었다.
그중 한 명이 자신이 되었기에 정이륭은 심장이 터질 듯했다.
“우리가 최초지. 심지어 소수정예로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냈으니까.”
“그래서 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숫자로 밀어붙여서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낸 건 아니니까요. 어쩌면 저희가 최초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무공은 계속해서 발전하지만 그건 중원이나 마교나 마찬가지니까요. 결국 중요한 건 사람인데 형님과도 같은 인물이 또 나올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인정.”
선우방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친구지만 반호진은 참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어떻게 저런 존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처음에는 질투도 조금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
‘호진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다.’
선우방이 뜨거운 눈빛으로 반호진의 등을 쳐다봤다.
아직도 그는 소림사에서 있었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인생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터였다.
‘은혜를 갚을 날이 올지 모르겠네.’
과거를 회상하던 선우방이 피식 웃었다.
은혜를 갚고 싶지만 암만 봐도 은혜를 갚을 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웠기에 선우방은 실소를 흘리며 그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제가 됐든 간에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망설이지 않겠다고 말이다.
“마교주의 거처가 저곳인 거 같은데.”
“제가 보기에도요. 마치 궁전처럼 지었네요.”
“건축 양식이 중원과는 다르니까. 막말로 중원도 각 성마다 양식이 조금씩 다르잖아. 동쪽 끝과 서쪽 끝은 또 완전히 다르고.”
“그렇긴 하죠.”
고루거각을 넘어 마치 황제가 머무는 궁전처럼 지어진 거대한 건물에 서조운이 입을 살짝 벌렸다.
나이는 어려도 새외무림까지 다 가 본 이가 서조운이었다.
얼마 전 갔었던 북해빙궁도 커다랬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화려함에서도 비교불가였다.
“특이하면서 화려하네요. 이거 그대로 떼어 갈 수 있으면 무상문에 떼어 가고 싶은데요.”
이제야 좀 흥분이 가라앉았는지 모용척이 턱을 쓰다듬었다.
한데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중원인에게는 낯선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모용척의 두 눈에는 탐욕이 적나라하게 떠올라 있었다.
가지고 갈 수만 있다면 무상문이나 모용세가에 가져가고 싶다는 의지가 두 눈에 가득했다.
“그게 가능하겠어?”
“아쉽네요.”
“정 그렇게 탐이 나면 가주가 되었을 때 직접 만들어. 그 정도 능력은 있잖아?”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비합리적이니까요.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고요.”
모용척이 입맛을 다셨다.
만들고자 한다면 못 만들 것도 없었다.
다만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어갈 게 분명했기에 시도할 수 없을 뿐이었다.
“잘 봐 둬. 지금 보는 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까.”
“아깝네요.”
“다른 분들도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모용척이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비록 적의 건축물이지만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기에 안타까운 눈빛으로 건물을 두 눈에 담았다.
반대로 서조운은 다른 의미에서 아쉬워했다.
마교주의 거처가 무너지는 광경은 단 한 번밖에 볼 수 없기에 이 자리에 없는 이들을 안타깝게 여겼다.
“좀 더 기다려도 되지만 금방 올 거 같지는 않지?”
“다들 잔뜩 신이 나신 상태라.”
“신이 났다기보다는 눈이 돌아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그 말을 팽가주님께 전달해도 되지?”
“당연히 안 되지. 장인어른께 나 맞아 죽는다.”
선우방이 끔찍한 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격렬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런 친구의 모습에 반호진이 히죽 웃었다.
“내가 죽는 거 아니잖아?”
“잔인한 녀석.”
“구경하는 재미는 있겠네요.”
“초월경에 오른 사위와 장인의 대결이라. 재미가 쏠쏠하겠는데?”
“저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모두가 한통속인 모습에 선우방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다들 선우방이 그러거나 말거나 키득거렸다.
“이런 놈들을 내가 의형제라 생각했다니…….”
“저는 아닌데요?”
“저도요. 전 형님의 의동생이지 형의 의동생은 아닌데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선우방을 보며 모용척과 서조운이 다시 한번 가슴에 비수를 박았다.
반호진의 의동생인 건 맞지만 선우방과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두 사람은 아니었다.
가까운 건 사실이나 냉정하게 말해 반호진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매정한 놈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건만.”
“하지만 형님에 비할 바는 아니죠.”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죠. 저를 거둬 주신 건 형님인데요?”
“에잉!”
한마디도 지지 않는 서조운의 말대꾸에 선우방이 졌다는 듯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근데 그 모습에 서조운은 물론이고 모용척과 정이륭은 씨익 웃었다.
“의성이도 같이 왔다면 참 좋았을 텐데요.”
“어쩔 수 없지. 이번 작전은 속도가 제일 중요했으니까. 마교가 눈치채기 전에 몰아치는 게 핵심이라. 게다가 안전을 보장하기도 힘들고.”
아쉬움 가득한 서조운을 달래며 정이륭이 반호진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아무래도 사마의성에 대한 얘기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어서였다.
정작 두 사람은 서로를 아무렇지 않게 대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달랐다.
“그래도 많이 강해졌지. 이제는 최절정 고수가 되었으니까. 정말 노력 많이 했어. 인재도 키우고, 개인 공부도 하고, 거기에 무공 수련까지.”
“확실히 의성이가 독하긴 하죠.”
“여자한테 독하다가 뭐냐?”
“사실이잖아요. 그리고 저한테는 동성 친구나 마찬가지예요. 처음에는 남자로 알고 있었기도 했고.”
선우방이 타박하듯 말했으나 서조운은 당당했다.
애초에 남자 대 남자로 만났기에 사실 지금도 여인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사마의성도 그에게 여자로 보이려고 하지 않았고.
“뭐, 시작이 특이하기는 했지.”
“잡담은 그쯤 하고 이제 움직이자고. 여기 말고도 부술 곳은 많으니까.”
“주요 시설들로 보이는 것들 싹 다 붕괴시키면 되는 거지?”
“응.”
선우방의 말에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와 동시에 소천검이 혼자서 두둥실 떠올랐다.
스스로 검집에서 나와서는 순식간에 창공으로 솟구쳤다.
쌔애애액!
점으로 보일 정도까지 높게 솟구쳤던 소천검이 이내 한줄기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것도 황금빛 검강을 잔뜩 머금고서 말이다.
쿠콰콰쾅!
낙뢰처럼 떨어져 내린 소천검은 거대한 건물 정중앙을 갈랐다.
단숨에 커다란 건물을 두 동강 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지진까지 일으키며 궁전 전체를 집어삼켰다.
“크하!”
“속이 시원하네.”
지축이 뒤흔들렸으나 일행들 중 누구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미리 살짝 떠 있었기에 영향을 아예 받지 않은 것이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해.”
“주요 시설들도 싹 다 부숴야지. 본보기로 확실하게.”
“단 한 번으로 공포심을 심어 주지는 못하겠지만 경고의 의미는 확실하게 되겠지. 중원을 침공하려면 자기들도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마교주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공석이라 그게 좀 아쉽네.”
“소교주에 가장 가까웠던 야율천이 죽었으니까.”
선우방이 입맛을 다시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반호진은 개의치 않았다.
있거나 없거나 그에게는 상관이 없어서였다.
적어도 그가 살아 있는 한 마교가 중원을 침공할 일은 없을 게 분명했다.
설사 있다면 그건 반호진을 잡을 자신이 생겼을 때인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당분간은 소실된 전력을 복구하느라 정신없겠네요.”
“그래야지. 그렇게 만들려고 싹이 보이는 이들을 찾아 죽인 건데. 북해빙궁이 전력을 회복할 시간도 벌 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