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7장. 황금 세대. -03
검에서 뿜어진 검격이 순식간에 북해빙궁주의 영역을 갈랐다.
다른 이도 아니고 북해의 주인이라 불리는 북해빙궁주가 전력을 다해 펼친 빙백신공이었으나 반호진은 너무나 쉽게 찢어 버렸다.
“지켜만 볼 것이오!”
순식간에 자신의 영역을 찢어발기며 쇄도하는 검격에 북해빙궁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대로 가다간 팔다리 중 하나가 잘릴 것 같았기에 그는 장로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혼자서는 무리지만 장로들과 함께라면 잠시 붙잡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였다.
거기에 전대 장로들인 육존(六尊)까지 가세한다면 반호진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 가오!”
“차합!”
몇몇 장로들 역시 그리 생각하는지 두 눈에 살기를 띠고서 반호진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반호진의 앞을 두 개의 인영이 막아서서였다.
“어딜 감히.”
“어림도 없지.”
뻐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달려들던 장로들의 신형이 멈춰 섰다.
본인이 원해서 멈춘 게 아니라 타의로 멈춰 선 것이었다.
스르륵.
강제로 멈추게 된 장로들이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들의 몸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이내 두 눈을 부릅떴다.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자 다들 아연실색했다.
“으음!”
그리고 일 장로는 침음을 흘렸다.
호기롭게 달려든 장로들과 달리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장로들의 실력은 분명 뛰어났지만 반호진 일행을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철퍼덕!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보이는 것이었다.
반응도 못한 채 심장이 관통당한 장로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심후한 공력으로 마지막까지 생명의 끈을 붙잡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죽음을 피할 수는 없기에 약간의 시간 차이만 있을 뿐 모두 차가운 바닥에 몸을 뉘었다.
콰콰콰쾅!
하지만 충격적인 일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아니,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달려들던 장로들을 무참하게 쓰러뜨린 모용척과 선우방이 제대로 날뛰자 어떤 장로도 감히 막아서질 못했다.
“미, 미친! 저 나이에 그 경지에 올랐다고?!”
“말도 안 돼!”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날뛰자 장로들은 물론이고 북해빙궁도들도 대경실색했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그 정도로 두 명이 보여 주는 무위는 충격적이었다.
“웃기네. 소궁주와 이 공자는 당연한 거고 내가 오른 건 말도 안 되는 일인가?”
“이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지. 그러니 더더욱 보여 줘야 하지 않겠어? 중원의 힘을 말이지.”
“아주 뼈에 사무치도록 만들어 줘야겠어요. 다시는 그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모용척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처럼 북해빙궁에 공포심을 심어 놓아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 장로!”
“언제까지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이오!”
그때 두 사람의 맹공에 속절없이 밀리던 장로들이 다급하게 일 장로를 불렀다.
초월경의 고수인 일 장로가 합류한다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간절한 장로들의 요청에도 일 장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초월경에 오른 무인은 선우방과 모용척만이 아니어서였다.
저벅저벅.
게다가 잠시 멈춰 서 있던 반호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일 장로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으아아아!”
그런 일 장로의 모습에 북해빙궁주가 울부짖었다.
참전하지 않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표명하자 이성을 잃은 것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발악이라도 해야 했기에 북해빙궁주는 악을 쓰며 반호진에게 쇄도했다.
쌔애애액!
가공할 냉기와 함께 극음지기에 버금가는 한기(寒氣)로 이루어진 강기가 반호진을 덮쳤다.
한 개도 아니고 수십 개가 오로지 반호진만을 노리고서 쏟아졌다.
꽈과과광!
정확히 반호진을 노리고서 쏟아지는 맹공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타격은 없었다.
아무리 두들겨도 호신강기에는 미세한 균열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걱.
반면에 반호진의 일검은 정확히 북해빙궁주의 손을 갈랐다.
가볍게 휘둘렀건만 황금빛 검강은 북해빙궁주의 영역은 물론이고 강기마저 가르며 손바닥을 찢었다.
그것도 단순히 상처를 입힌 게 아니라 팔의 절반을 거의 잘라 내다시피 했다.
“사람은 참 어리석어. 약속을 지켰으면 자존심은 지켰을 텐데.”
“끄으윽!”
반호진의 검이 재차 움직였다.
이번에는 오른팔을 노렸는데 역시나 저항은 없었다.
아니,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북해빙궁주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다가오는 검강을 지켜보는 것밖에는 없었다.
툭.
느릿하게 뻗어왔음에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던 검강이 지나가자 북해빙궁주의 오른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깔끔하게 어깻죽지에서부터 잘린 것이었다.
“아, 아버지!”
그 광경에 사마의성의 손에 붙들려 있던 북궁단이 피를 토하듯이 소리쳤다.
하지만 북해빙궁주는 북궁단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초점 없는 공허한 눈빛으로 땅바닥만 멍하니 쳐다봤다.
“여기서 더 할 필요는 없겠지?”
“물론.”
“그럼 맡기지.”
“……그래.”
미동도 하지 않는 북해빙궁주의 모습에 북궁열이 다가왔다.
그런데 북궁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오만가지 감정이 얼굴과 눈동자에 휘몰아치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하는데, 실수하지 마라.”
“당연한 소리를. 이미 부자의 정은 끊은 지 오래다.”
서늘한 반호진의 목소리에 북궁열이 단호하게 말했다.
심사가 복잡한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정에 휘둘릴 정도로 유약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찬탈자인 만큼 정과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다만 끝은 내가 내고 싶을 뿐이다.”
“따로 할 생각은 하지 말고.”
“그럴 일은 없다. 나라고 전 북해빙궁주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여기 있는 누구보다 반호진의 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게 북궁열이었다.
일행들과 함께 왔지만 실상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낸 건 반호진이었다.
그 사실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북궁열은 절대 허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당장은 반호진이 필요하기도 했고.
“약속만 제대로 이행한다면 내가 북해빙궁에 간섭하는 일은 없을 거다.”
“걱정 마라. 지금 끝을 낼 생각이니까.”
지켜보는 반호진의 시선을 느끼며 북궁열은 한때 아버지라 불렀던 북해빙궁주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무릎 꿇은 그와 눈을 마주했다.
“……원하는 대로 되어서 기쁘더냐?”
“물론입니다.”
“배은망덕한 놈.”
“먼저 배신한 건 당신입니다. 만약 약속만 제대로 지켰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걸 당신도 알고 있었고요.”
“내 잘못이란 말이냐.”
여전히 공허한 눈빛으로 북해빙궁주가 말했다.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그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예.”
“장담하건대 네 끝도 좋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외세의 힘을 빌려서 좋게 끝난 적은 없으니.”
“그럴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리되더라도 버림받은 채 하루하루를 벌레처럼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죽여라.”
북해빙궁주는 두 눈을 감았다.
애초에 대화가 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았기에 그는 더 이상 대화하기가 싫었다.
“유언 정도는 들어 드리지요.”
“패자가 무슨 말을 남길까.”
“그러시다면야.”
퍼석.
북해빙궁주의 상반신이 움찔거렸다.
내가중수법으로 심장을 터트리자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한 것이었다.
이윽고 북해빙궁주가 시커먼 피를 칠공에서 흘리며 뒤로 쓰러졌다.
저벅저벅.
서서히 식어 가는 북해빙궁주를 바라보던 북궁열이 몸을 돌렸다.
사마의성이 지키고 있는 북궁단에게 가기 위해서였다.
진정한 끝은 북궁단의 죽음이었기에 북궁열은 차가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높고 널찍한 대전을 반호진은 찬찬히 걸었다.
북해빙궁을 방문한 건 이번이 두 번째지만 이렇게 대전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복슬복슬한 융단을 밟으며 반호진은 천천히 주위를 구경했다.
“엄청 넓네요.”
“그러게.”
“북해빙궁이 이 정도면 무상문은 더 커야 하지 않을까요?”
순수하게 감탄하는 서조운, 선우방과 달리 모용척은 얼굴 가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무상문의 대전과 너무 비교되는 것 같아서였다.
“쓸데없이 크기만 한 것 같은데.”
“무슨 소리. 방처럼 넓으면 다 쓰게 되어 있어. 더욱이 무상문은 앞으로 더 커질 텐데.”
“청소하기 힘들어.”
모용척과 달리 검소한 정이륭은 고개를 저었다.
필요하다면야 이렇게 크게 지어도 상관없겠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아직은 불필요했다.
그렇다고 반호진이 무상문을 북해빙궁처럼 대규모로 키울 것 같지도 않았고.
마음만 먹는다면 진즉에 북해빙궁과 맞먹는 규모로 무상문을 키울 수 있었음에도 반호진은 그러지 않았다.
“청소 걱정을 왜 네가 해?”
“넌 너무 과시하는 걸 좋아해.”
“약간의 허세는 필요한 법이야. 특히나 남자에게는 말이지.”
“넌 꼭 너랑 똑같은 여자를 만나야 해.”
“그런 여자가 천생연분일 수도 있어.”
정이륭의 악담에도 모용척은 능글맞게 웃었다.
이 정도로는 그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않아서였다.
자신이 유별나다는 걸 인지하고 있기도 했고.
“웬일로 긍정적이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이제는 나도 적은 나이가 아닌데.”
“사람이 급격하게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그러던데.”
“그 무슨 재수 없는 소리야? 내 인생의 찬란한 황금기는 지금부터인데!”
“그러니까 평소대로 해. 너답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격분하는 모용척을 보며 정이륭이 씨익 웃었다.
이제야 원하는 반응이 나와서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친우인 모용척이 오래 살았으면 싶어서.
“네 자리다.”
“알고 있다.”
한편 반호진과 나란히 대전을 가로지른 북궁열은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대전 가장 깊은 곳에 우뚝 솟아 있듯이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옥좌를 바라봤다.
빙옥(氷玉)이라고 하는, 오로지 북해에서만 채굴되는 특수한 옥으로 만든 옥좌였는데 북해빙궁에서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한 명뿐이었다.
당대의 궁주에게만 허락된 자리에 북궁열이 다가가서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느낌이 어때?”
“기쁘군. 원래는 내 자리가 아니어서 그런가.”
“물려받은 게 아니라 쟁취했기에 더 의미가 있지. 근데 알지? 이게 끝이 아니란 걸.”
“물론이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빼앗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려우니까. 또 할 일도 많고.”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지만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일단 최강자였던 전대 북해빙궁주가 죽은 만큼 전력 손실이 상당했다.
북궁열 본인도 초월경의 무인이라고 하나 죽은 북해빙궁주와 비교하면 수준이 확실히 낮았다.
그렇기에 북궁열은 우선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완할 계획이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해.”
“정말 필요하다 싶으면. 그 전까지는 내 스스로 할 생각이다.”
“그러면 나야 좋지. 맹약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믿고 싶은데, 알잖아?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변덕이 심한지.”
반호진이 심유한 눈으로 북궁열을 바라봤다.
이미 전례가 있기에 다시 한번 짚은 것이었다.
그리고 반호진은 기본적으로 북궁열을 믿지 않았다.
애초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손을 잡은 것이었기에 신뢰는 없었다.
“날 믿기 힘들다면 상황을 믿어라. 또한 맹약을 이행해야 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알고 있다.”
“지금은 그거면 되지 않나?”
“지금은 그렇겠지. 그나저나 취임을 못 보고 가서 미안하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군. 게다가 취임식을 거창하게 할 생각 없다. 그런 형식적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부터 북해빙궁의 주인은 북궁열이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선만 넘지 않는다면 우선은 지켜볼 생각이었다.
“후읍!”
앞장서서 걸어가던 오중건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구주팔황을 다 돌아다녀 본 오중건이지만 신강은 낯설었다.
또한 늘 조심해야 하는 곳이었기에 발을 디디자마자 긴장됐다.
동시에 묘한 흥분도 일었다.
“긴장되시는 모양입니다.”
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