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7장. 황금 세대. -02
꼼짝도 할 수 없는 몸에 북궁열은 두려움과 분노를 느꼈다.
지금의 상황이 의미하는 바가 너무도 명백해서였다.
그래서 분노에 치를 떨었는데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더불어 그를 억누르던 거대한 중압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반호진.”
“이제부터 계약을 이행해야 하는데 죽으면 쓰나.”
“그런 이유였나.”
“이것 말고 중요한 게 더 있나?”
창졸간에 북궁열의 옆에 도착한 반호진이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여전히 피투성이 상태로 드러누워 있는 북궁단을 내려다봤다.
“중원 놈들은 믿을 수 없다! 결국 네놈도 버려질 거다!”
“시끄럽네.”
심리전에 말려 허무하게 패배한 주제에 입만 살아서 큰소리치는 북궁단을 반호진은 피식 웃으며 일별했다.
대놓고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북궁단이 얼굴을 구겼으나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북궁열은 발을 들어 북궁단을 강하게 지르밟았다.
“크윽!”
“어떻게 할까?”
신음을 흘리는 북궁단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북궁열이 물었다.
지금 바로 죽일 수 있지만 그러기에는 아쉽다는 뜻이었다.
“점혈해서 뒤로 보내. 의성이에게 맡겨.”
“역시 말이 잘 통한다니까.”
“죽이라고 해도 안 죽일 거잖아.”
“그러기에는 아쉽지.”
북궁열이 비릿하게 웃었다.
살기 가득한 섬뜩한 미소에 올려다보던 북궁단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동시에 북궁열의 가슴에 쌓인 한이 얼마나 큰지도 느꼈다.
“점혈 풀리게 하지 말고.”
“북해빙궁주라면 모를까 이놈에게 풀릴 정도로 내 실력이 허술하지는 않아.”
“악착같이 해혈하려고 할걸.”
“그렇겠지. 근데 실패할 거야.”
북궁열이 씨익 웃었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였다.
무슨 수를 써도 풀지 못할 거란 자신감이 표정에 잔뜩 서려 있었다.
“그쯤 해라.”
“싫은데요.”
진즉에 도착했음에도 반호진의 등장으로 인해 잠자코 서서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북해빙궁주가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마치 명령하듯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북궁열의 대응이 놀라웠다.
단호한 어조로 확실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북궁열!”
그 모습에 북해빙궁주가 노한 어조로 강하게 둘째 아들을 불렀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북궁열은 싸늘한 눈빛으로 한때 아버지였던 북해빙궁주를 쳐다봤다.
“승부는 났습니다, 궁주님.”
“정녕 이렇게까지 할 것이냐!”
“반대였으면 어땠을까요? 당신은 나서지 않았겠죠. 제가 죽더라도 말이죠.”
“…….”
북해빙궁주가 입을 다물었다.
이 말이 사실이어서였다.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도 했고.
북해빙궁에 분란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잔인하지만 차라리 북궁열이 패배해서 죽는 게 나았다.
“내기에서 졌으니 약속을 이행했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없다면?”
“지금 그쪽에 다른 선택지가 있나? 하나뿐인 후계자가 붙잡힌 마당에?”
“되찾으면 될 일이다.”
북해빙궁주가 씹어 먹을 듯이 반호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온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흩뿌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흉흉한 북해빙궁주의 기세에도 반호진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가능하겠어?”
“저번과는 상황이 다르니까.”
반호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북해빙궁주가 말했다.
지난번에는 천하십대고수가 함께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북해빙궁주는 과거에 비하면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다르긴 하지. 아주 많이. 근데 자신 있어? 날 쓰러뜨릴 자신이.”
“나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곳은 북해빙궁이다.”
“궁도들을 갈아 넣겠다는 말을 이렇게 대놓고 해도 되나? 다 듣고 있는데?”
반호진이 씨익 웃으며 주변을 훑었다.
일부러 보여 주려는 듯이 주위의 반응을 살핀 것이다.
실제로 여유가 있기도 했고.
반대로 반호진과 북해빙궁주의 대화를 들은 북해빙궁도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본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약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법.”
“말은 바로 해야지. 북해빙궁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서겠지. 안 그래?”
“…….”
“역시 약속은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군. 아니, 일 공자가 이겼다면 나더러 약속을 지키라고 지껄였겠지.”
북해빙궁주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게 대답이었다.
무언의 긍정이었으니까.
“승부는 결정 났다! 모두 물러나라! 나는 불필요한 싸움을 원치 않는다!”
고집으로 똘똘 뭉쳐 있는 북해빙궁주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갑자기 북궁열이 입을 열어서였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북궁열의 말에 수하들이 동요한다는 점이었다.
“배신자의 말을 듣지 마라! 북궁열은 더 이상 이 공자가 아니다! 중원무림의 주구일 뿐이다!”
흔들리는 부하들의 모습에 북해빙궁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빠르게 북해빙궁도들의 동요를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덤비지 않으면 죽이지 않겠다. 원한다면 약속해 주지.”
“저 말을 믿지 마라! 내 말만 따라라!”
북해빙궁주가 더더욱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동요를 잠재우려는 것도 있지만 아직 이 사태를 모르는 이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였다.
“보아하니 혼자서 덤빌 생각은 없는 모양이야. 그렇다면 나도 굳이 기다려 줄 필요는 없겠지.”
반호진이 땅을 박찼다.
겉보기에는 어려도 산전수전 다 겪은 무인이 반호진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북해빙궁주의 의도를 단박에 간파하고는 몸을 날려 거리를 좁혔다.
“막아라!”
쏜살같이 날아오는 반호진의 모습에 북해빙궁주가 기겁했다.
날을 세우며 대립하기는 했으나 그는 자신의 실력을 잘 알았다.
아직은 반호진을 홀로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그는 다급하게 친위대와 북해빙궁도들에게 명령했다.
“존명!”
그러나 북해빙궁주의 지시에 따른 이들은 친위대뿐이었다.
근처에 있는 북해빙궁도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갈팡질팡했다.
북해빙궁주처럼 그들도 반호진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부질없는 짓을.”
“형님께서 나설 필요 없습니다!”
화르르륵!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달려드는 친위대의 모습에 반호진이 혀를 찰 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북해의 혹한을 단숨에 밀어 버리는 무지막지한 열기와 훈풍에 반호진은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맞습니다. 이런 잔챙이들은 막내에게 맡기시죠.”
“굳이 너까지 나설 필요는 없지. 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서조운이 반호진을 스쳐 지나갈 때 모용척과 선우방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북해빙궁주도 아닌 일개 친위대에 반호진이 나서는 건 인력 낭비였다.
게다가 진짜 나서야 할 사람은 따로 있기에 선우방은 반호진의 옆에 서 있는 북궁열을 슬쩍 쳐다봤다.
퍼퍼퍼펑!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서조운의 양손에서 일어난 거대한 불꽃이 쇄도하던 친위대를 덮쳤다.
그러자 친위대 역시 반격을 위해 각자 빙공을 펼쳤다.
하지만 자신만만하게 펼친 빙공은 순식간에 소멸했다.
상쇄당하는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증발했다.
“무, 무슨?!”
“이게 어떻게 된……!”
친위대원들이 하나같이 경악했다.
알고 있는 서조운의 무위와는 전혀 달라서였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친위대의 공격을 집어삼킨 불꽃이 조금도 기세가 죽지 않고서 그들을 덮쳤기 때문이다.
“끄아아악!”
“사, 살려 줘!”
“불을, 불을 꺼 줘!”
순식간에 불덩이로 화한 친위대가 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꿀꺽!
그 모습에 지켜보던 북해빙궁도들이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친위대가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보고도 믿기지가 않은 것이었다.
“궁주님!”
“웬 놈들이냐!”
친위대가 처절한 신음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할 때 일단의 무리가 안쪽에서 나타났다.
북해빙궁주가 기다리던 장로들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기다린 건 북해빙궁주만이 아니었다.
반호진과 북궁열도 기다렸다.
“당……신은?”
“이 공자가 어떻게 여기에?”
“소궁주!”
갑작스러운 소동에 헐레벌떡 달려 나왔던 장로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지도 못한 이들의 등장에 다들 놀란 것이었다.
거기다 북궁단이 생포되어 있자 더더욱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북해빙궁주를 쳐다봤다.
“허업!”
그러던 중 장로 한 명이 서조운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서조운의 경지를 한눈에 알아차리고는 경악한 것이었다.
“왜 그러는가?”
“무슨 일이야?”
깜짝 놀란 얼굴로 몸을 떠는 일 장로의 모습에 다른 장로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 장로가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저럴 수가…….”
“대체 왜 그러는 게야?”
“말 좀 해 보게.”
장로들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매서운 눈으로 서조운을 쳐다봤다.
하나 그들의 눈에는 딱히 특별한 게 보이지 않았다.
극양지기를 다루는 게 조금 특이하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중원과 이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다른 장로들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 왔으나 일 장로는 그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북해빙궁이 늘 강대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 아닐까.”
“……소림검신.”
“북해의 위세가 대단했던 때가 있었듯이 중원도 마찬가지지.”
“으음!”
일 장로가 침음을 흘렸다.
반호진도 반호진이지만 서조운을 비롯해서 일행들 중 만만해 보이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게 그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저런 세대가 나타났다는 게 말이다.
“근데 이 공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야. 일반적이라면 당연히 이 공자부터 볼 줄 알았는데.”
침음을 흘리던 일 장로의 시선이 반호진의 말에 북궁열에게 향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놀랐다.
북궁단이 이른 나이에 초월경에 오른 것도 놀라운 일인데 북궁열 역시 똑같은 경지에 올라 있자 놀란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의미 없는 가정일 뿐이지만 북궁열이 북궁단과 함께 북해빙궁을 이끄는 상상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상상일 뿐이었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갔군.”
“맞아. 그러니 선택을 해야 할 거야. 침몰하는 배에 남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배에 올라탈 것인지.”
“…….”
장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지막한 반호진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문 것이었다.
하지만 두 눈과 머리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놈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마시오! 우리는 북해빙궁이외다!”
“뭐, 어느 쪽이든 나는 상관없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그는 게 맞는 것이기도 하고.”
“나 역시. 장로들을 잃는 건 아쉽지만 딱 그 정도까지지.”
감정에 호소해서라도 어떻게든 장로들을 설득하려는 북해빙궁주와 달리 반호진이나 북궁열은 어느 쪽을 선택하는 크게 상관없다는 주의였다.
모두 적이 된다면 당장은 전력의 손실이 크겠으나 그렇다고 넘어온 이들이 순순히 명령을 따를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때문에 북궁열은 아쉬울지언정 반드시 장로들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북해빙궁주부터 잡고 보자고.”
“죽이진 마라.”
“원한다면야.”
짧은 대답과 함께 반호진이 움직였다.
북해빙궁주를 향해 몸을 날렸던 것이다.
그 모습에 북해빙궁주가 식겁하며 소리쳤다.
“싸워야 하오! 이대로 가다간 저놈에게 북해빙궁을 넘겨주게…….”
“거참 말 많네.”
“큭!”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반호진의 모습에 북해빙궁주가 다급하게 빙백신공을 끌어올렸다.
의지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었다.
콰우우우!
북해빙궁주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막대한 기운이 주위를 순식간에 얼려 버렸다.
극한의 냉기가 북해빙궁주를 중심으로 사방을 잠식한 것이었다.
만약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을 테지만 반호진은 달랐다.
이런 경험을 수도 없이 겪었기에 반호진은 달려들면서 그대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쩌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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