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6장. 찬탈자(簒奪者). -03
서로 한 치도 물러나지 않을 때 멀리서 중후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자 두 형제는 물론이고 반호진과 일행들의 고개가 움직였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던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놀랍구나. 중원에서 수련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정도 경지까지 오르다니.”
“예?”
은은한 감탄이 서려 있는 북해빙궁주의 목소리에 북궁단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북해빙궁주는 설명 대신 놀란 눈으로 북궁열만 바라봤다.
“계기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네요.”
“계기?”
북해빙궁주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어서였다.
물론 그도 사람이기에 북궁열이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했다.
반대의 입장이었어도 그 역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아버지였다.
한데 북궁열은 부모가 아닌 남을 대하듯이 그를 대했다.
“예. 분노라고 해야 하나, 복수심이라고 해야 하나.”
“네 심정은 이해한다. 나였어도…….”
“아뇨. 당신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직접 겪어 보지 않았으니까요.”
“너 이 자식! 감히 아버지의 말을 끊어!”
북해빙궁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될 때 북궁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친의 말을 도중에 끊은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었지만 그 전에 호칭이 문제였다.
엄연히 부자지간임에도 마치 남처럼 당신이라고 지칭하는 말에 북궁단은 벌게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아버지라. 세상 어떤 아버지가 자식을 버리지? 부자지간의 연은 날 버리는 순간 끊어졌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그 연을 끊은 건 내가 아니지. 저 사람이지.”
“…….”
날 선 북궁열의 한마디에 북해빙궁주는 물론이고 북궁단도 입을 다물었다.
반박하기에는 북궁열의 말이 사실이어서였다.
굳이 북궁열의 입장을 생각할 것도 없이 그를 버린 건 사실이었다.
“그저 아들이기에 저 사람을 이해해야 하나? 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더는 바라지도 않고.”
“그래서 중원무림에 붙은 것이냐.”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끈이 떨어졌는데 어디라도 붙어야지요.”
“북해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버렸구나.”
북해빙궁주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지금까지의 대화에서 북궁열의 결의를 느낄 수 있었기에 그에 맞게 북해빙궁주 역시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아뇨. 생각을 바꾼 것뿐입니다.”
“그렇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당신의 입장에서는 그렇겠죠.”
북해빙궁주의 심유한 눈빛이 북궁열에게 닿았다.
마치 그를 들여다볼 듯이 쳐다봤던 것이다.
하지만 깊고 서늘한 북해빙궁주의 시선을 북궁열은 피하지 않았다.
“많이 컸구나.”
“덕분에요.”
자신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보는 둘째 아들의 모습에 북해빙궁주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소궁주인 북궁단도 감히 마주 보지 못하는데 북궁열이 똑바로 눈을 맞추자 북해빙궁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더불어 가슴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자신이 잘못 선택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그 생각이 떠오른 것과 동시에 북해빙궁주는 전음을 보냈다.
이대로 쳐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반호진이 직접 온 만큼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가 쉽지는 않겠으나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호진이 있기에 어떻게든 타협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궁으로 돌아와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북해빙궁주는 다시 한번 전음을 보냈다.
아무리 북궁열이 배신감에 치를 떤다지만 혈육의 정은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북해빙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기에 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북궁열을 바라봤다.
“정말 한 치도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군요.”
“응?”
여전히 적개심이 가득한 목소리에 북해빙궁주의 두 눈이 커졌다.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을 거라고는 당연히 예상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반응은 그 정도에서 벗어났다.
조금의 여지도 없다는 듯한 북궁열의 반응에 북해빙궁주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버렸던 패가 쓸모 있어 보이니 탐이 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쩌죠? 돌아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너와 단이가 힘을 합치면 과거의 성세를 되찾을 수 있다. 강대했던 북해빙궁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이다.”
“제가 소궁주를 도와야 하는 거겠죠. 저를 소궁주로 만들 생각은 없지 않습니까?”
“장남은 단이다.”
북해빙궁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깨달았다.
북궁열이 무엇을 바라는지 말이다.
그러나 북궁열이 아무리 아까워도 소궁주의 자리는 줄 수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절한 거니까요. 그리고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자리는 소궁주 따위가 아니거든요.”
“뭐라고?”
잠자코 있던 북궁단이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지금의 발언은 북해빙궁의 주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어서였다.
그걸 북해빙궁주도 알았기에 매서운 눈으로 북궁열을 노려봤다.
“나라고 안 될 이유는 없지.”
“감히……!”
“좋게 봐주었더니 선을 넘는구나.”
북해빙궁주의 눈빛이 일변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냉정함 속에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있었는데 이제는 달라졌다.
서늘하다 못해 싸늘한 눈빛으로 북해빙궁주가 북궁열을 쏘아봤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이곳으로 돌아왔겠습니까.”
“진심이로군.”
“예.”
“검신의 뜻일 테고. 그럼 이것도 알고 있느냐? 네가 중원무림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걸.”
“그 대가로 북해빙궁을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이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버려져서 잊힐 인생이라면.”
북궁열이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아버지인 북해빙궁주를 향해 살기를 드러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북해빙궁주도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못 본 사이에 말이 많아졌어.”
“……검신.”
“궁주는 잠시 뒤로 물러났으면 하는데. 일단은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난 다음에 우리의 대화를 나누자고.”
“협약에 어긋나는 행위네.”
“먼저 협약을 어긴 건 그쪽인데.”
북해빙궁주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협약을 어겼다니! 엄연히 수정을 청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는 소림사가 받아들이지 않았나!”
“일 공자는 이 공자와 대화를 나누고.”
“무상문주!”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북궁단이 소리를 질렀으나 반호진은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한낱 소궁주 따위와는 말을 섞지 않겠다는 듯이 북해빙궁주만 쳐다봤다.
“그때부터 이걸 노린 건가?”
“맞아. 정확하게는 북궁열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게 맞겠지.”
“거절한다면?”
“흐음. 굳이 결과를 말해야 할까?”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에 북해빙궁주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뛰어넘고자 그토록 노력했건만 결과는 실패였다.
그걸 그는 반호진을 보는 순간 느꼈다.
‘……격차가 더 벌어졌어.’
과거에 만났을 때는 그래도 비벼 볼 만하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덤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으음!’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 더욱 커지는 듯한 존재감에 북해빙궁주는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기색을 결코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또한 아직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원하는 걸 쉽게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멸문을 택하려고?”
“이기긴 힘들겠지. 그러나 순순히 당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북해빙궁주의 시선이 반호진의 어깨너머로 향했다.
말하지는 않았으나 의도는 명백했다.
그런데 서슬 퍼런 협박에도 불구하고 반호진은 콧방귀를 끼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북해빙궁주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정면으로 싸우면 이기기 힘들다는 걸 그도 알았다.
하지만 반호진도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확실히 북해의 패자다워.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아마 당신에게도 나쁘지만은 않을 거야.”
“제안?”
“듣기 싫다면 거절해도 돼.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까. 나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고.”
“…….”
북해빙궁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심히 거슬리는 말이었으나 더 짜증 나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북해빙궁주는 남몰래 입술을 깨물며 반호진을 쳐다봤다.
“어떻게 할래?”
“……들어는 보겠다.”
“간단하게 내기를 하는 거야. 일 공자와 이 공자의 대결에. 궁주는 일 공자에 걸 테고 나는 이 공자에 걸 테니 내기 성립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내기의 대가는 더욱 간단해. 승자가 북해빙궁을 가지는 거지. 어때? 아주 깔끔하지?”
“지금 그걸 내기라고 하는 건가? 북해빙궁은 나의 것이다!”
북해빙궁주가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는 듯이 노발대발했다.
한데 그 모습을 보고도 반호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도리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지금은 그렇겠지. 근데 내가 나서고도 그럴까?”
으드득!
북해빙궁주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면서 반호진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어느 쪽을 택하든 선택은 자유야. 말한 대로 강요는 안 할 생각이고.”
“만약 소궁주가 이기면 약속을 지킬 건가?”
“물론.”
“이 공자가 죽어도?”
조용히 듣고 있던 북궁열이 움찔거렸다.
이 공자라는 표현에서 북해빙궁주가 자신을 더 이상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느껴져서였다.
그러나 이미 기호지세였다.
이제 남은 건 직진뿐이었다.
“당연하지. 승부의 세계는 냉혹하니까.”
“순순히 물러나겠다고?”
“그래야지. 그래야 균형이 맞지 않겠어?”
“좋다. 받아들이겠다.”
북해빙궁주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분명 북궁열은 놀라운 성장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아직 북궁단과 비교하면 부족했다.
더구나 같은 무공을 수련한 만큼 그 차이는 더더욱 크게 느껴질 터였다.
“바로 시작하자고.”
북해빙궁주의 대답에 반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표했다.
이윽고 반호진 일행과 북해빙궁도가 동시에 이동했다.
두 사람이 편하게 겨룰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휘이이잉!
북풍한설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삭풍과 함께 가는 눈발이 휘날렸다.
그 말인 즉 냉기가 상당하다는 뜻이었으나 정작 서 있는 북궁열의 표정은 평온했다.
중원인들에게나 추운 날씨이지 그에게는 평범한 추위였다.
이런 날씨는 북해인에게 일상이나 다름없기에 북궁열은 편안한 얼굴로 적당히 거리를 벌린 채 서 있는 북궁단을 쳐다봤다.
“난 준비됐다.”
“나 역시.”
흥분한 얼굴로 북궁단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이런 대결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그게 북궁열은 마음에 들었다.
저 거만한 얼굴이 곧 일그러질 걸 생각하니 손이 근질거렸다.
“그럼 와라.”
“흥! 네놈이 와라. 형으로서 선수를 양보해 주겠다.”
“그렇다면야 거절하지 않고.”
오만하게 선수를 양보하겠다고 말하는 북궁단을 보며 북궁열이 씨익 웃었다.
북궁단이야 자존심이 중요하겠지만 그는 아니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그깟 자존심쯤은 얼마든지 굽힐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기도 했고.
휘이익!
말을 마침과 동시에 북궁열의 신형이 사라졌다.
한순간에 감쪽같이 사라졌던 것이다.
이형환위를 뛰어넘는 움직임에 북궁단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만만하게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북궁열이 성장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였다.
쩌어어엉!
그래도 북해빙궁의 소궁주 자리를 거저 얻은 건 아니라는 듯이 북궁단이 북궁열의 일장을 막았다.
그러나 보고 막은 건 결코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막은 것이었기에 북궁단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꼴에 감은 있네?”
“네놈 따위가 감히!”
대놓고 이죽거리는 북궁열의 모습에 북궁단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던 북궁열이 마치 내려다보듯이 말하자 자존심이 상한 것이었다.
물론 방금의 일격은 놀라웠지만 그렇다고 두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츠츠츠츠!
더욱이 모두가 지켜보고 있기에 북궁단은 처음부터 빙백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모두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빙백신공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게 아니지!’
북궁단의 두 눈이 희번덕였다.
혼자서 독학한 북궁열과 달리 그는 북해빙궁주가 직접 가르쳐 주었기에 자신이 있었다.
명백한 수준 차이를 보여 줄 자신이 말이다.
쩌저적!
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