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6장. 찬탈자(簒奪者). -02
우왕좌왕하던 북해빙궁도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끝에서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보다 빨리 과거 일 공자였던 북궁단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제는 소궁주가 된 그는 노기를 숨기지 못하며 북궁열을 노려봤다.
“네놈이 어찌 이곳에 와 있는 것이냐!”
“허어. 동생이 왔는데 반겨 주지는 못할망정 왜 왔냐니. 내가 못 올 곳에 온 건가?”
“중원에 있어야 할 놈이 어떻게 이곳에 있는 것이냐?”
노성이 장내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얼마나 목소리가 컸는지 집결했던 북해빙궁도들이 미간을 좁혔다.
내공이 실려 있는 목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듯 고통스러워서였다.
반면에 북궁열은 시뻘건 얼굴의 북궁단을 지그시 응시했다.
“확실히 재능은 있어. 근데 좀 실망이네. 모든 지원을 다 받았을 텐데도 고작 그 정도라니.”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라!”
대답은커녕 이상한 말만 지껄이는 북궁열의 모습에 북궁단이 다시 한번 호통을 쳤다.
예전 어렸을 때처럼 목소리부터 높였던 것이다.
그러나 북궁열은 더 이상 과거의 어리던 그가 아니었다.
“이 몸이 왜 대답해야 하지?”
“뭐라고?”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에 북궁단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이 차이는 크지 않았으나 어렸을 적에는 감히 그에게 대항조차 하지 못했던 이가 동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가 조금 컸다고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대꾸하자 북궁단은 어이가 없었다.
“네가 묻는 말에 내가 꼭 대답해야 하나?”
“네가……라고?”
“그래.”
어처구니없어하는 북궁단을 향해 북궁열이 뭐가 이상하냐는 듯이 대답했다.
놈이라는 말에 비하면 지극히 양호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똑같이 놈이라고 해도 되었지만 그래도 북궁열은 북궁단이 형이기에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원에서 지내더니 예의범절을 잊은 모양이구나. 형을 못 알아보는 걸 보면.”
“알아보니까 이 정도로 말하는 거지. 정말 예의를 잊었으면 씨발새끼라고 했겠지.”
으드득!
대놓고 욕을 때려 박는 북궁열의 모습에 북궁단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이를 갈았다.
“난 적어도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으니까.”
“허! 자격?”
“그럼. 원래대로라면 작년에 네가 중원으로 와서 나와 교대했어야 했지. 근데 결과는 어땠지?”
“한 명씩 번갈아 볼모가 되는 건 너무나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걸 너도 인정해서…….”
“무슨 소리. 난 인정한 적 없다. 너와 궁주가 원해서 협약 내용을 수정했을 뿐.”
북궁열이 서늘한 눈빛으로 북궁단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비효율적이라는 판단은 오로지 두 사람만의 생각이었다.
정작 당사자라 할 수 있는 북궁열의 생각은 눈곱만큼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북궁열은 바로 그 부분을 명확히 짚었다.
“북해빙궁을 위해서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북해빙궁이 아니라, 너를 위해서겠지.”
“그게 바로 북해빙궁을 위한 것이다!”
“벌써 자신이 궁주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하는구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북궁단을 보며 북궁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아서였다.
“대답해라! 어째서 네놈이 이곳에 와 있는 것인지! 설마 도주한 것이냐?”
일순 북궁단의 표정이 일변했다.
최악의 가정이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이었다.
소실된 전력이 제법 복구되기는 했으나 아직 중원을 침공할 때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그 말은 달리 말하면 현재로서는 반호진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도주가 가능할 것 같아?”
“법왕이 죽었으니…….”
“지금의 방장도 초월경의 무인이다. 법왕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강자이지.”
“근데 어떻게?”
“왜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까. 반대로는 생각하지 못하나? 예를 들면 소림사에서 나를 풀어 준다거나.”
북궁단의 동공이 커졌다.
그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말이 북궁열의 입에서 흘러나와서였다.
동시에 주변에 모여 있던 북해빙궁도들이 웅성거렸다.
북궁단 만큼이나 그들 역시 놀란 것이었다.
“네놈을 풀어 줬다고? 왜?”
“왜겠어?”
얼떨떨한 표정의 북궁단을 똑바로 쳐다보며 북궁열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마치 그것도 짐작하지 못하냐는 듯이 말이다.
흠칫!
명백히 자신을 무시하는 북궁열의 표정에 눈빛이 점점 사나워지던 북궁단이 순간 움찔거렸다.
뒤늦게 한 가지 가정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서였다.
“……설마?”
“이제야 알아차린 모양이군.”
“얼토당토않은 소리!”
북궁단이 격렬하게 소리쳤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중원무림이 너를 도와줄 이유가 없으니까!”
“과거에는 없었지. 근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어. 그리고 관계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면.”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그것까지 설명해 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비아냥거리듯 말하는 북궁열의 모습에 북궁단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닦달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도 알았다.
더 이상 그가 알고 있던 남동생, 북궁열은 없었다.
그저 중원무림을 등에 업은 이 공자가 있었을 뿐이었다.
“네놈 따위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느냐?”
“못 할 것도 없지.”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확실히 지지기반이 빈약하기는 하지.”
“흥! 빈약은 무슨! 아예 없는 수준이지!”
북궁단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으려는 듯이 말이다.
“지금 보니 그런 것 같긴 하네. 아니면 무공 수련 대신 내 기반을 없애는 데 열중했거나.”
“열중할 필요도 없다. 북해빙궁의 정당한 후계자는 나뿐이니까.”
“맞아. 넌 후계자일 뿐이지. 아직 북해빙궁의 주인은 아니지.”
“곧 이 몸이 주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나에게 충성을 맹세해라. 그럼 목숨만은 살려 주마.”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벌써부터 북해빙궁주라도 된 것처럼 거만을 떠는 북궁단의 모습에 북궁열이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나 자신의 예상대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형제이기에 이 몸이 관용을 베푸는 것이다. 마지막 기회이니 받아들여라.”
“말귀를 못 알아듣네. 아니, 인정하기 싫은 건가? 그리고 관용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거다. 약자가 강자에게 베푸는 게 아니라.”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겠다는 거냐.”
북궁단에게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매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전력으로 살기를 발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북궁열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 반대라니까 그러네.”
“네놈이 그걸 원한다면…….”
“어어?!”
남동생이 아닌 불구대천의 원수를 노려보듯 살의를 숨기지 않던 북궁단의 시선이 정문 너머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본 것인지 북궁단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북해빙궁도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경악한 것이었다.
“어, 어떻게?!”
북궁열이 박살 낸 정문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일단의 무리를 본 북궁단이 대경했다.
정확하게는 선두의 반호진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그럼에도 북궁단은 여전히 악마 같은 무위를 보여 주었던 반호진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꿀꺽!
머리뿐만 아니라 몸도 반호진을 기억하는 모양인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더불어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며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소, 소림검신이다!”
“어째서 이곳에?!”
반호진의 등장으로 인한 충격은 삽시간에 북해빙궁 전체로 퍼져 나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등장에 다들 대경실색한 것이었다.
일반 궁도들은 물론이고 간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조차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 정도로 반호진의 존재감은 압권이었다.
저벅저벅.
“오랜만이야.”
“당신이 어떻게?”
“내가 못 올 곳에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뒷짐을 진 채로 느릿하게 걸어오는 반호진의 모습에 북궁단은 머리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 반호진을 만났을 때가 말이다.
그땐 전대 천하십대고수들과 함께했는데 그때에도 반호진은 지금처럼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있었다.
“못 올 곳은 아니지. 하지만 연락은 하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뭐라고?”
“북해빙궁이 뭐라고 내가 연락을 해? 그냥 오면 되는데. 이 공자야 집이니 더더욱 연락을 할 필요는 없고.”
반호진의 말에 북궁단의 고개가 서서히 움직였다.
뒤늦게 반호진이 서 있는 위치가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로서는 절대 달갑지 않은 북궁열의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모습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
“이제야 눈치를 챈 모양이야.”
“어째서?”
“내가 이유를 설명해야 하나?”
반호진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서렸다.
설명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어서였다.
더욱이 반호진은 북궁단의 아랫사람이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오히려 윗사람이었다.
“네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얌전히 찌그러져 있든가, 아니면 나하고 승부를 보든가.”
“뭐라고?”
북궁단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했다.
감히 자신에게 제안을 하자 격노한 것이었다.
그러나 살벌한 북궁단의 눈빛에도 북궁열은 여유롭게 이죽거렸다.
“이마저도 싫다면 죽든가.”
“소림검신을 믿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구나!”
“무슨 소리를. 북해빙궁주도 아니고 너 따위를 상대하는데 왜 검신을 믿지? 너 정도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감히!”
“눈깔이 있어도 제대로 못 보는 주제에.”
북궁열이 이제는 대놓고 무시했다.
예전이라면 벌벌 떨었겠으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이제는 당당해져도 되었다.
“줏대도 없이 굽실거리던 녀석이!”
“과거에는 그랬었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상황이니까. 근데 말이야. 이제는 바뀌었어.”
“네놈이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글쎄. 내 생각은 다른데. 죽을 사람은 내가 아니거든.”
극도로 흥분하는 북궁단과 달리 북궁열은 얄밉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었다.
반호진을 비롯해서 일행들과 함께 지내서 그런지 입심이 상당했다.
그걸 북궁단도 느낀 모양인지 길길이 날뛰며 노성을 토해 냈다.
한데 그 모습에 주변에 있던 북해빙궁도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당장 내 앞에 데려와 무릎 꿇리지 않고!”
북궁단의 고성이 장내를 갈랐다.
하지만 그의 대노 섞인 명령에도 북해빙궁도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움직이지 못했다.
북궁열의 옆에는 반호진이 있었기에 다들 눈치만 살폈다.
“이익!”
그 모습에 북궁단이 다시 한번 노성을 터트렸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북궁단이라고 수하들의 생각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당장 그만 하더라도 반호진이 부담스러웠기에 직접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쯤 하지. 부하들을 채근해 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당장 무릎을 꿇어라!”
반호진은 어쩔 수 없었지만 북궁열은 달랐다.
그렇기에 북궁단은 무시무시한 기파를 온몸에서 뿌려 대며 북궁열을 압박했다.
“싫다니까.”
“감히 소궁주의 명을 거부하는 것이냐! 북해빙궁의 사람이!”
“그렇게 따지자면 더더욱 내가 네 지시에 따를 이유는 없지. 나 역시 궁주의 자식이니까.”
“나는 소궁주다!”
“맞아. 그건 인정해. 근데 나도 정당한 승계권이 있는 사람이거든. 그리고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너를 소궁주로 인정한 적이 없어.”
장난기 가득했던 북궁열의 표정이 일변했다.
섬뜩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북궁열은 북궁단을 직시했다.
“오랜만이로구나.”
저벅저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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