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6장. 찬탈자(簒奪者). -01
반호진의 말과 행동에 모용희수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사람들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걱정 안 해도 돼. 절대 보일 리 없으니까. 지켜보도록 놔두지도 않을 거고.”
“저는 걱정하지 않아요. 가가를 믿으니까요. 그리고 미덥지 않지만 오빠도 있고요.”
“그게 가장 어이가 없어. 척이도 같이 있거든. 말려도 모자랄 판에.”
“오빠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요.”
“뿌린 대로 거두게 된다는 걸 왜 모를까.”
반호진이 혀를 찼다.
인생이라는 게 그랬다.
업보는 돌고 도는 법이었다.
지금의 행동이 나중에 고스란히 돌아올 텐데도 다들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다.
“선우 공자님은 안 계신 모양이네요?”
“곧 아빠가 되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아이에게 못나고 모자란 아빠가 될 수는 없으니까.”
“후환이 두려운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고.”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친구인 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아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니 진짜 후환이 두려워서 혼자만 빠진 걸 수도 있었다.
“저라면 그럴 것 같아요.”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일단 아이들부터 내쫓아야겠어.”
파아아앗!
반호진을 중심으로 무지막지한 기파가 뿜어져 나왔다.
압도적인 존재감이 삽시간에 사방팔방을 잠식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자 멀리 떨어져서 방을 주시하던 이들이 흠칫 놀라며 뿔뿔이 흩어졌다.
“오빠도 짝을 찾아야 할 텐데.”
“강제로 시키면 더 안 하려고 할 거야. 자기가 원해야 결혼을 할 성격이라.”
“그렇기는 한데 오빠는 소가주이니까요. 저와는 달리 어쩔 수 없이 정략결혼을 해야 할 거예요.”
“별수 없어. 그게 숙명이니까.”
“대신 제가 잘 챙기려고요. 혼처도 몇 군데 생각해 두었어요.”
매일같이 싸워도 결국 혈육이었다.
말로는 밉다 해도 마지막에 남는 건 가족뿐이었기에 모용희수는 남몰래 혼처 몇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척이는 알아?”
“아마 모를 거예요. 아빠하고 둘이서만 의논했었거든요.”
“장인어른과 둘이서라.”
모용희수의 눈매가 반달을 그렸다.
장인어른이라는 네 글자가 묘하게 그녀의 가슴을 뒤흔들어서였다.
동시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자신이 반호진의 반려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빠도 생각해 둔 곳이 몇 군데 있더라고요. 몇 곳은 저하고 겹치기도 하고요.”
“근데 우리 너무 척이에 대한 얘기만 나누는 거 아냐? 지금은 서로에게 집중해야 할 시간 같은데.”
“그, 그렇죠.”
잘만 대답하던 모용희수가 말을 더듬었다.
은근한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었다.
“갑자기 왜 말을 더듬어?”
“그, 그게…….”
모용희수가 시선을 피했다.
묘하게 뜨거운 반호진의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였다.
더불어 그녀의 머릿속에 지금껏 수도 없이 상상했던 것들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스윽.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용희수의 모습에 반호진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도 처음이지만 서두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서로가 처음인 만큼 천천히 알아갈 작정이었다.
그리고 모용희수와 마찬가지로 반호진도 떨렸다.
“자, 봐.”
너무 하얘서 투명하게까지 느껴지는 모용희수의 왼손을 반호진은 살며시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왔다.
정확하게는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으로.
두근두근.
“어?”
반호진의 손길에 퍼뜩 놀라던 모용희수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만큼이나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이 느껴져서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반호진도 긴장했다는 걸 알게 되자 모용희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도 똑같아. 결혼도 처음이고.”
“풋!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저희 둘 다 처음이네요.”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자고. 하나씩 차근차근 알아가도 늦지 않아. 이제는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맞아요. 이제부터는 함께할 테니까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모용희수가 해맑게 웃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반호진에게는 너무나 눈부셨다.
절세미녀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제대로 치장한 모용희수의 미모는 압도적이었다.
여신이 강림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렇지. 오늘은 바로 첫날밤이고.”
잠시 차분해졌던 모용희수의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첫날밤이라는 세 글자가 그녀의 방심을 사정없이 뒤흔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반호진도 마찬가지였다.
샤라락.
이미 모용희수를 끌어당긴 상태였기에 반호진은 어렵지 않게 상의의 옷고름을 풀었다.
그러자 모용희수는 물론이고 반호진의 목도 새빨갛게 변했다.
역사적인 순간을 앞두고 두 사람 다 잔뜩 긴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망설임은 없었다.
“가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된 모용희수가 손을 뻗었다.
여자라고 해서 가만히 있을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기에 모용희수는 천천히 손을 뻗어 반호진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스르륵.
이윽고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간 두 사람의 몸이 포개졌다.
동시에 등잔불의 불꽃이 자연스럽게 꺼지며 방 안에 어둠이 찾아왔다.
“사랑해.”
“저도요.”
귓가에 간질거리는 반호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모용희수는 환하게 웃었다.
행복함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는 반호진의 등을 꽉 껴안았다.
***
휘이이잉!
싸늘하다 못해 칼날처럼 느껴지는 매서운 칼바람에 새하얀 장포가 펄럭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대한 성채와도 같은 북해빙궁을 바라보는 북궁열의 눈빛은 뜨거웠다.
반가움보다는 분노와 애증이 뒤섞여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저벅저벅.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북해빙궁을 내려다보는 북궁열의 옆으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바로 반호진이었다.
중원에서부터 함께한 반호진은 북궁열의 옆에 섰다.
“얼마 만이지?”
“알면서 묻는 건가?”
“진짜 몰라서 묻는 건데.”
“계산할 가치도 없다는 말인가.”
북궁열이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했다.
아무리 위상이 대단한 북해빙궁이라지만 반호진에게는 한 번 무너뜨렸던 곳에 불과했다.
직접 봉문까지 시켰기에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었다.
“그런 건 아니고. 이것저것 일이 많았잖아. 혼례도 올렸고.”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단 생각이 들지만, 또 네가 그러니 이해가 가기도 하는군.”
“육 년 정도 되었나?”
“정확히 따지면 육 년을 꽉 채우고 칠 년을 향해 가고 있지. 네 예상대로 궁주는 협약을 변경했고.”
“나만 예상했나.”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사이 반호진의 곁으로 몇 개의 인영이 더 다가왔다.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는데…….”
“역시나였지.”
“맞아. 나의 기대가 무색하게 북해빙궁주는 당당하게 협약 내용을 변경하자고 요청했지.”
까드드득!
북궁열의 눈빛이 달라졌다.
애증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살기가 가득 채웠다.
그러면서 그는 이를 사정없이 갈았다.
“덕분에 벽을 넘었잖아?”
“하하하! 덕분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그 분노가 충격요법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사실이니까.”
무시무시한 살기를 흩뿌리던 북궁열의 기세가 착 가라앉았다.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살기를 갈무리한 것이었다.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고요한 북해빙궁을 주시했다.
“그러니 보여 줘야지. 그로 인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사실 나도 궁금하기는 해. 북해빙궁주가 선택한 일 공자가 어디까지 도달해 있는지가.”
“나 역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과 눈빛으로 북궁열이 땅을 박찼다.
그런데 허공으로 떠오른 그의 신형이 땅바닥에 내려서지 않았다.
지면에서 살짝 뜬 채로 북궁열의 신형은 유유히 북해빙궁의 거대한 정문을 향해 미끄러졌다.
“급하기는.”
유려하게 육지비행술을 펼치며 나아가는 북궁열의 모습에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아닌 척하지만 그의 눈에는 보였다.
당장이라도 복수하고 싶은 열망이 말이다.
“확실히 쌓인 게 많긴 많은 모양이에요, 형님.”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말 그대로 부모형제에게 모두 버림을 받았는데. 어떻게 보면 배신보다 더하지.”
“그러니까요. 가족 전부에게 버림을 당했으니. 근데 모친은 어쩔 수 없이 따르지 않았을까요?”
“뭐, 그건 북궁열이 결정할 문제고.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돼.”
반호진의 말에 서조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설사 북궁열의 모친이 북해빙궁주의 뜻에 반대했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과적으로 북궁열은 버림받았고, 거기에 대해서 따질 자격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북해빙궁은 진짜 오랜만이네요. 아주 예전에 형님과 둘이서 이렇게 먼발치서 본 적이 있었죠.”
“그랬었지.”
“제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니 진짜 까마득하네요.”
서조운이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막 구양절맥에서 치료되어 골골대던 때가 바로 그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몸도 그렇고 정말 많은 게 달라졌다.
더 이상 염룡이라 불리던 후기지수는 없었다.
“뭐가 까마득해? 얼마나 되었다고.”
“엄청 오래됐죠. 저도 그렇고 척이 형도 더 이상 치기 어린 나이가 아니니까요.”
“가만히 있는 날 왜 걸고넘어져?”
옆에 조용히 있던 모용척이 인상을 있는 대로 썼다.
그러나 그 반응에도 서조운은 당당했다.
“치기 어리다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렸던 게 형이니까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다들 그렇게 생각할걸요?”
서조운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주변에 있는 형들을 바라봤다.
그러자 모용척이 매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각자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하나같이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허!”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 광경에 모용척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말이다.
“그만 떠들고 가자. 아직 혼자서 전복시킬 정도는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모용척을 일별한 반호진이 가볍게 몸을 날렸다.
앞서 날아간 북궁열처럼 육지비행술을 펼치며 북해빙궁의 정문을 향해 날아갔다.
그 뒤를 일행들이 뒤따랐다.
콰아아앙!
하지만 북궁열은 반호진과 일행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마음이 없다는 듯이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새하얀 정문을 향해 거칠게 일장을 날렸다.
빙백신공의 기운을 가득 머금은 강기가 호쾌하게 뻗어 나가며 문지기도 없는 거대한 정문을 산산조각 냈다.
“누, 누구냐!”
“적습이다!”
단 일격에 정문이 박살 나자 인근에 있던 북해빙궁도들이 황급히 달려 나왔다.
그러다가 북궁열을 보고는 다들 멈칫거렸다.
시간이 제법 흐르기는 했으나 모두 이 공자인 그를 알아본 것이었다.
“이, 이 공자님?”
“어째서 이런 짓을……?”
적의 습격인 줄 알고 뛰쳐나온 북해빙궁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중원에 있어야 할 북궁열이 이곳에 있는 것도 놀라운데 집이나 마찬가지인 정문을 부수고 들어오자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었다.
저벅저벅.
몰려왔음에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는 북해빙궁도들을 향해 북궁열이 걸음을 옮겼다.
보무도 당당하게 정문을 통해 북해빙궁 안으로 들어갔다.
“어, 어떻게 해야 해?”
“막아야 하는 거야?”
“무슨 소리! 이 공자님이신데!”
“그렇지만 정문을 부수고 들어왔잖아?”
의견이 분분히 갈리는 와중에도 북궁열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이동했다.
북해빙궁의 주인이 머물고 있을 집무실을 향해서.
“멈춰라!”
“오랜만이야.”
“네놈이 어찌 이곳에 와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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