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5장. 새로운 미래로. -03
“언젠가는 그 빚을 갚을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잊지 않고 준비한다면 말이지요.”
“혈채는 피로 갚아야 합니다.”
오중건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동시에 내심 살짝 놀랐다.
다른 이도 아니고 소림사의 방장인 법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아미타불. 저 역시 불제자이기 전에 사람이며 무인입니다. 그리고 꼭 제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맞습니다. 방법은 많지요. 또 저희에게는 아주 강력한 검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너무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건 함께해야 합니다.”
“문제는 모두의 뜻을 하나로 모으기가 어렵다는 거지만요.”
오중건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다 같이 전쟁을 치렀지만 생각은 각기 달랐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오늘 이곳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 대부분이 참석했다는 점이었다.
“모두가 합심해서 노력해야겠지요.”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천하십대고수는 전부 다 왔네요.”
압도적인 미모를 뽐내는 모용희수를 일별한 오중건이 곳곳에서 자리를 빛내주고 있는 수장들을 바라봤다.
아직 재건 중인 공동파와 곤륜파를 제외하면 모두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하객으로 왔으나 모두 다 축하해 주는 건 아니었다.
몇몇은 여전히 아쉬운 얼굴로 반호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방장께서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이 자리는 소림사의 방장으로서가 아니라 사제의 사형으로서 와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오중건이 어색하게 웃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꼭 그럴 이유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법무의 결정에 그가 가타부타할 자격은 없었기에 그저 웃기만 했다.
“혼례식 당일에 온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요.”
“사정이 있지 않았습니까. 아마 반 문주 성격으로 보건대 개의치 않을 겁니다. 오히려 늦지 않게 와 주어서 고마워하지 않을까요?”
“사제가 착하긴 하지요.”
“어…….”
오중건이 자기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성격이 착하다는 말에 동의하기가 어려워서였다.
공명정대한 건 사실이나 착하다고 하기에는 애매했다.
그렇다고 성격이 나쁜 건 또 아니었지만.
“저도 알고 있습니다. 사제의 성격이 까칠하다는 것을요. 근데 저에게는 착한 사제입니다.”
“그건 그렇지요.”
“물론 여전히 저에게는 꼬마아이일 때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만.”
“그때도 지금과 같았습니까?”
“비슷했습니다. 오히려 더 개구쟁이였지요. 하지만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는 아이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에도 지금과 비슷하다는 말에 오중건은 피식 웃었다.
왠지 모르게 상상이 되어서였다.
“나이를 좀 먹고 반 문주를 만난 게 다행이네요. 젊었을 때 만났다면 엄청 좌절했을 겁니다.”
“꼭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저만 하더라도 결국 이겨 내지 않았습니까. 방주님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잠시 힘들어할지언정 결국에는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셨을 거예요.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얼마 남지 않으시기도 했고.”
“이거야, 원. 방장께는 숨길 수가 없군요.”
오중건이 겸연쩍은 듯이 말했다.
그러나 눈빛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노력한 결실이 점차 맺히고 있어서였다.
“드디어 가시는구나…….”
“여동생이 시집가는데 사위만 보이는 모양이구나.”
“저에게는 희수보다 형님이 더 중요합니다!”
“이제는 손아랫사람이 되었는데 말이지.”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한 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입니다!”
모용척이 이 부분은 거론할 여지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또한 장담컨대 이 부분을 가지고 면전에서 따지는 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흐음. 가문의 어르신들이 썩 좋아하시지는 않을 텐데.”
“그럼 지금이라도 혼례를 물릴까요?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다만 그로 인한 후폭풍은…….”
“절대 그럴 수는 없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모용궁이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그것만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한 노력들을 모조리 수포로 만들어 버리는 짓이었기에 모용궁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끄응!”
“일단 희수가 행복해 보이잖아요.”
“…….”
앓는 소리를 냈던 모용궁의 표정이 멍해졌다.
굳이 모용척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눈에도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하는 딸의 모습이 말이다.
동시에 갓난아기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너무나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그의 검지를 잡던 날.
동그란 눈으로 그를 보며 웃었을 때.
또 옹알이를 지나 처음으로 아빠라 부르던 날.
모든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다른 이유들은 다 제쳐 두고 저것만으로도 저는 희수를 시집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렇게 환히 웃는 걸 본가에서 언제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렇긴 하구나.”
“더욱이 형님이시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고민한 만큼 희수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첩실인데.”
딸의 행복한 모습에 자신도 미소를 짓던 모용궁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은밀하게 훑었다.
대부분의 하객들이 식을 올리는 두 사람을 축복해 주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부부가 되고 있음에도 욕심을 버리지 않는 자들을 모용궁은 눈에 담았다.
“형님 성격상 받더라도 아무나 받지는 않을 겁니다. 일단 당장은 생각이 없으신 거 같더라고요.”
“그 말은 나중에는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로구나.”
“형님이 관심이 없더라도 여인들이 가만 놔두지 않으니까요. 희수의 미모를 보고 달려들던 멍청이들과 같은 과인 거죠. 근데 그게 죄는 아니니까요. 덮친다면야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주변만 배회한다면 저희 쪽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덮치는 게 가능할 리는 없겠지. 다만 심히 거슬려서 문제지. 강력한 경쟁자가 남아 있기도 하고.”
모용궁의 시선이 아들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그 시선에 모용척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부친이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흠흠! 저는 중립입니다. 남녀사이에 관여하기가 좀 그래요.”
“네 하나뿐인 여동생과 연관된 일이다.”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만…….”
모용척은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혈육이라지만 그래도 그는 누구의 편을 들어 주기가 애매했다.
피가 통하지 않았다고 해도 의형제는 의형제였기에 모용척은 모용궁의 시선을 피했다.
붉은 노을만큼이나 호롱불에 비치는 모용희수의 얼굴이 빨갰다.
피부가 워낙 희다 보니 붉은 불빛에 물이 든 것처럼 보였다.
‘으음!’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는 호롱불처럼 모용희수의 얼굴색도 미세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모에는 변함이 없었다.
첫날밤이 부끄러운 모양인지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는데 그 모습이 반호진에게는 더욱더 고혹적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야 혼례를 올린 게 실감이 됐다.
‘낮에는 너무 정신이 없었어.’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과거로 돌아오는 기적을 겪었고, 무림에서는 영웅이라 불리는 반호진이었으나 결혼은 처음이었다.
지난 생에서는 지인의 혼례식 때 하객으로 참석한 적도 없었기에 반호진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겨우 다독였다.
“가가.”
“식을 올렸다고 이제는 호칭을 바꾸는 거야?”
“새로운 관계가 되었으니 당연히 그에 맞게 호칭도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흐음. 크게 달라진 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낯간지러우세요?”
아직 화장을 지우지 않은 모용희수가 생글거렸다.
아닌 척하지만 반호진이 부끄러워하는 게 눈에 보여서였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모습에 모용희수는 귀엽다는 듯이 반호진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결혼은 처음이니까.”
“저도 처음이에요.”
“근데 왜 그렇게 침착해? 나도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데.”
“저라고 안 떨리는 건 아니에요. 다만 떨림보다 기쁨이 더 커서 그래요.”
모용희수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라고 떨리지 않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호진보다 모용희수의 심장이 더 빨리 뛰고 있었다.
그럼에도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이 순간을 너무도 고대했기 때문이었다.
“기쁨이 더 크다고?”
“네. 가가와 부부의 연을 맺었으니까요.”
“뭐야.”
“가가는 저와 결혼한 게 싫으세요?”
“싫다면 혼인 서약을 하지 않았겠지.”
촉촉한 눈망울로 물어 오는 모용희수를 보며 반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고민을 했더라면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을 터였다.
반호진도 모용희수가 좋았기에, 평생을 함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결정을 내렸다.
“알아요. 가가의 성격이 어떤지 이제는 조금 알거든요. 만약 조금이라도 고민이 되었다면 결정을 내리지 않으셨겠죠.”
“귀신이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파악하는 건 당연한 것이니까요. 또 같은 마음이라는 점에 대해서 너무나 기쁘기도 하고요.”
“나도 고마워.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도 내 곁에 있어 줘서. 여자로서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지금이야 무상문주이고 소림사의 속가장문인이라지만 처음에는 아니었다.
본연의 실력이 알려지기 전에는 그저 조금 특출난 후기지수일 뿐이었다.
반면에 모용희수는 무림삼봉이라 불리며 수많은 남자의 관심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그녀는 한결같이 일편단심과도 같은 면모를 보이며 반호진의 곁에 있었다.
“그만큼 가가가 좋았거든요. 다른 남자들과 다르기도 했고요.”
“나라고 다른가. 똑같지 뭐.”
“아니요. 달랐어요. 대부분은 제 마음보다는 몸을 원했거든요. 아, 그렇다고 해서 외모적인 부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에요. 남자든 여자든 첫인상은 무조건 외모에서 결정되니까요. 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일관성이에요. 가가는 남녀를 불문하고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봐주었어요. 예쁘다고 해서 더 잘해 주고, 못생겼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으셨죠. 남녀를 구분 짓지 않고 똑같이 인간으로 보시더라고요. 그게 저에게는 되게 신기하게 다가왔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가 같은 사람은 없었거든요.”
모용희수의 투명하고 큰 눈이 여전히 혼례복을 입고 있는 반호진을 담았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반호진 역시 옅게 화장을 한 상태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욱 멋져 보였다.
“특이했나 보다.”
“맞아요. 가가도 아시잖아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급을 나누고 거기에 맞게 행동한다는 사실을요. 그런데 가가는 다르더라고요. 물론 철딱서니 없는 오빠를 개과천선 시켜 주신 것도 감명 깊었고요.”
“그때의 척이는 진짜 철이 없기는 했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호진도 십분 인정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때의 모용척은 정상이 아니었다.
만약 반호진의 극양처방이 아니었다면 지난 생과 똑같은 길을 걸었을 테고, 종국에는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과거를 후회했을 터였다.
“아버지께서도 그걸 어찌나 고마워하시는지 몰라요.”
“언젠가는 철이 들었을 거야.”
“그랬을까요?”
모용회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회의적이어서였다.
반호진이니까 모용척이 정신을 차린 것이었지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스스로 철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다만 단시일 내에는 힘들었겠지. 시간이 꽤 많이 필요했을 거야. 그나저나 다들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건지.”
반호진의 시선이 창문을 뚫어 버릴 듯이 강렬하게 번뜩였다.
육안으로 보이지는 않아도 기감으로는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 방을 주시하는 시선들이 말이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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