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5장. 새로운 미래로. -02
서조운의 미간이 좁혀졌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으로 간사했다.
괜히 뒷간에 들어가기 전, 후의 마음이 다르다는 속담이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이야 복수심에 눈이 멀어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만 원하는 바를 달성했을 때는 마음이 바뀔 수도 있었다.
“다른 마음을 먹을 수도 있지. 근데 과연 실행할 수 있을까? 내가 있는데?”
“아. 하긴 그렇겠네요. 이미 한 번 뒤집었는데 두 번이라고 어렵지 않을 테니까요. 더구나 형님은 현 북해빙궁주처럼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지도 않고.”
“딴마음을 먹을 수는 있는데 쉽게 드러내지는 못할 거야. 다만 내가 원하는 건 그와 같은 제약을 걸 수 있는 존재가 나 말고도 더 있었으면 좋겠어.”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는 반호진의 시선에 서조운이 침을 삼켰다.
무엇을 바라는지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동시에 서조운은 자책했다.
간단한 해결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떠올리지 못해서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다만 한 가지 말해 주고 싶은 건 재능은 네가 더 위야. 지금까지 내가 본 사람들 중에 재능으로 널 넘어서는 이는 없었어.”
“흐흐흐흐!”
“그렇다고 자만하지는 말고. 재능은 말 그대로 출발선이 유리한 것뿐이니까. 방심하는 순간 순식간에 따라잡힐 거다.”
서조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쟁자들이 수두룩하기에 좋은 자극도 되었다.
해이해지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고나 할까.
“당연하지요. 형님 다음은 무조건 저입니다. 이것만큼은 다른 형들에게도 양보할 수 없어요.”
“경쟁은 좋은 거니까.”
“그렇지만 이왕이면 저도 형님처럼 되고 싶어요. 압도적으로 경쟁자들과 도전자들을 따돌리고 싶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만들면 되지.”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으니까요.”
서조운이 울상을 지었으나 반호진은 따로 조언을 해 주지는 않았다.
이런 문제들은 스스로 해결해야지 조언으로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또 형평성의 문제도 있었고.
“조급해하지 말고 차근차근해.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그렇게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네가 원하는 곳에 닿아 있을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절대 이 공자에게만큼은 추월당하지 않겠습니다. 어쩌면 형님을 대신해서 제가 싸워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지. 방이도 있고, 척이도 있고, 이륭이도 있으니까.”
“그중에 최고는 제가 될 겁니다. 흐흐흐!”
서조운이 두 눈을 활활 불태웠다.
농담처럼 말했으나 눈빛은 달랐다.
승부욕으로 불타오르는 눈빛에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힘내라.”
“형님의 기대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꼭 보답할 필요는 없고.”
“천하제이인의 자리는 제 것입니다. 형님께서 돌아가시면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물려받을 거고요.”
“얼른 죽으라는 말로 들리는데.”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어째 느낌이 오래 살지 말고 적당히 살다 귀천하라는 것처럼 들려서였다.
“전혀요. 절대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닙니다!”
“뭐, 나는 좋아.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야망은 있어야지. 안 그래? 너희들이 악착같이 따라오고 도전해야 나도 자극이 되니까.”
“형님은 조금 쉬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 마교주와의 싸움은 내가 더 강해서 이긴 게 아니니까.”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전쟁에서 이기긴 했으나 마교주와의 대결에서는 패배했었다.
사부인 담현과 전대고수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죽은 건 마교주가 아니라 그일 터였다.
“그렇지만 그게 전쟁입니다.”
“맞아. 꼭 강하다고 해서 무조건 이기는 건 아니지.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습니다.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잠시 쉬어 가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형님께서도 늘 휴식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랬었지.”
“저는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합니다.”
서조운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지금까지 고생했다고 반호진이 말했지만 정작 가장 고생한 건 누가 뭐래도 반호진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새외무림의 침공을 오직 반호진만이 예견하며 준비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중원의 평화를 가져온 것 또한 반호진이었기에 조금은 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잔소리는 듣고 싶지 않은데 말이지.”
“잔소리라니요. 이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언입니다, 충언!”
“어쨌든 알겠어. 나도 휴식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서조운의 표정이 밝아졌다.
혹시나 담현의 죽음으로 스스로를 더욱더 몰아붙이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 정도까지는 가지 않을 듯했다.
“내 계획과는 다르게 너무 열심히 달리기도 했고.”
“늘 말씀하셨잖아요. 설렁설렁, 대충대충,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다고요.”
“맞아. 그게 내 꿈이지. 물론 천하제일인이 된 다음에.”
“이제는 천하제일인이시지 않을까요?”
마치 아직은 부족하다는 듯이 말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서조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생각하기에 더 이상 반호진의 적수는 없을 것 같아서였다.
“마교주를 넘어서야 진짜 천하제일인이 되는 거지. 지금은 마교주가 죽음으로써 운 좋게 차지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 말은 쉬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것 같은데요.”
“일단은 쉴 거야. 당분간은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헥헥헥!
머리를 긁는 반호진의 손길이 기분 좋은 모양인지 일동이가 눈을 감고 입을 쩍 벌렸다.
누가 봐도 손길을 음미하는 표정이었다.
***
저번에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정문의 풍경에 법무는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 말았다.
삼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정문위사와 출입하기 위해 기다리는 수많은 방문객을 보자 감개무량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건 오중건도 마찬가지인 듯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맺혀 있었다.
“상전벽해라고 해야 하나요. 정말 많이 변했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근데 진즉에 이렇게 되었어야 했습니다. 예전에는 지나칠 정도로 검소했지요. 규모도 그렇고, 인원도 그렇고.”
“앞으로는 더욱 커질 겁니다.”
“그렇겠지요.”
오중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는 모두가 인정하는 중원제일검, 천하제일인이 이곳의 주인이었다.
그러므로 커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했다.
“오랜만입니다, 방장. 그리고 방주님.”
“허어. 상 문주님께서 직접 마중 나오신 겁니까?”
천천히 정문을 향해 걸어가던 오중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방천문주인 상일기가 마중을 나오자 놀란 것이었다.
그건 법무도 마찬가지였는지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허허허. 두 분께서 오시는데 당연히 제가 마중을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새신랑이 마중을 나올 수는 없으니까요.”
“저희가 좀 늦기는 했죠. 혼례식 당일에 도착했으니. 크흠!”
오중건이 민망하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원래 계획은 적어도 며칠 전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 법무와 같이 당일에 도착하게 되었다.
“새신랑과 새신부는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요. 아직 늦은 것도 아니고요.”
“시작은 안 했지요?”
“예.”
“어후. 천만다행이네요.”
법무야 대사형이니 괜찮았지만 오중건은 달랐다.
미운털이 박혀서 좋을 건 없기에 상일기를 따라 무상문으로 들어갔다.
줄을 서고 있던 이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봤지만 감히 따지는 이는 없었다.
소림사의 방장과 개방의 방주에게 따질 정도로 간 큰 사람은 없었기에 두 사람은 편하게 외원을 지나 내원으로 들어갔다.
“아미타불. 정말 많이 달라졌네요.”
“꽤나 커졌지요?”
“예. 전각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식구가 점점 늘어남에 따라 한두 개씩 짓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되었습니다. 허허허.”
자신의 문파도 아니건만 상일기는 뿌듯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한데 신기하게도 법무는 그런 상일기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 역시 상일기와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지은 것치고 상당히 체계적인 느낌이 듭니다.”
“사마가주가 직접 설계했기에 그런 느낌이 들 겁니다.”
“하긴. 사마가주가 있는데 허투루 건물을 세우지는 않았겠지요. 그나저나 하객들이 엄청 많네요. 익숙한 얼굴들도 많고.”
내원에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그래서인지 오중건은 눈이 마주친 이들 한 명 한 명과 묵례를 했다.
“새신랑이 반 문주이지 않습니까.”
“초대받은 사람만 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오중건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유명세와 달리 인간관계가 그리 넓지 않은 게 반호진이었다.
그렇다 보니 꼭 초대하고 싶은 이들에게만 초대장을 보냈을 텐데 하객들이 많자 그는 의아했다.
“초대장은 한 장이지만 수행원들도 같이 오니까요. 은근슬쩍 함께 오는 이들도 있고. 좋은 날이라 가급적 소란을 키우려 하지 않는 걸 이용하는 거지요.”
“사람들 참. 눈도장을 찍는다고 해서 친해질 사람이 아닌데 말이죠.”
상일기의 대답을 들은 오중건이 혀를 끌끌 찼다.
나이는 어려도 속에 구렁이 수십 마리를 품고 있는 게 반호진이었다.
노회한 노고수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게 반호진이었기에 오중건은 코웃음을 치며 걸음을 옮겼다.
“시작하는 모양입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미리 준비된 자리에 착석한 법무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있어 반호진은 친형제나 다름없었다.
또한 나이는 그보다 어려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법무는 흐뭇한 얼굴로 전통 혼례복을 입고 있는 반호진과 모용희수를 차례대로 바라봤다.
“진짜 잘 어울리네요. 전통복을 입고 있는 건 저도 처음 봅니다.”
“삼봉 중에 백봉이 제일 먼저 가는군요.”
오중건이 입을 쩍 벌렸다.
남들이 보면 푼수라고 쑥덕거릴지 모르나 오중건은 진심으로 순수하게 감탄했다.
원래부터도 아름다웠지만 제대로 화장하고 치장한 모용희수는 절세가인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로 기품 있고 우아했다.
무림삼봉 중 최고는 자신이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에 오중건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우와…….”
“어째 더 예뻐진 거 같지 않아?”
“진짜 미쳤다.”
“선녀다, 선녀. 천하제일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오중건만이 아닌 듯 곳곳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이 젊은 청년들이었는데 여인들의 탄성도 상당했다.
물론 여자들의 경우 순수하게 감탄하기보다는 질투가 절반 이상이었다.
‘사부님.’
온갖 말들이 귀에 들렸으나 법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사부인 담현을 떠올렸다.
만약 살아 있었다면 이 자리에 담현도 함께 있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기뻐하며 반호진의 결혼을 축하해 줬을 터였다.
‘그 어렸던 꼬마아이가 혼례를 올리고 있습니다. 양가의 축복 속에서요.’
아무리 말하고 소리쳐도 담현에게는 들릴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법무는 마음속으로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비록 이곳에는 없지만 하늘에서 반호진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담현 대사께서도 함께 계셨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말이죠. 저희 사부님도 그렇고.”
오중건이 느닷없이 훌쩍였다.
법무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죽은 개왕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마침 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하는.”
“마교의 침공만 아니었다면…….”
까드득!
오중건이 이를 갈았다.
이제는 전쟁이 끝난 지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는 증오심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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