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5장. 새로운 미래로. -01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서조운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격렬한 서조운의 반응과 달리 반호진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나는 북해빙궁을 비롯해서 철혈성, 포달랍궁, 구천문이 언젠가는 침공하리라고 예상했어. 그에 따라 준비도 했고. 근데 내 예상과 달리 대규모 전쟁이 연달아 벌어졌어. 사실 솔직히 말하면 천사맹과 마도련, 마교는 예상 밖이었어.”
“예상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까요? 어느 누가 마도련과 천사맹이 나타나리라 예상했겠어요.”
“그렇게 따지면 또 그렇기는 하지. 미래를 보지 않는 한.”
“맞습니다.”
“어쨌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새외무림의 침공이 빨랐어. 거기에 대규모 전쟁이 연이어 벌어졌지. 그래서 그것들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반호진이 서조운을 지그시 바라봤다.
처음의 기대보다 서조운은 훨씬 더 잘해 주었다.
또한 앞으로가 기대되기도 했고.
때문에 반호진은 이런 결정을 내렸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요.”
“이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더 이상 중원무림을 노릴 곳도 없고.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수는 있겠지만 백도무림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네요. 웬만한 곳들과는 다 싸웠으니.”
“그리고 너도 꿈이 있잖아.”
서조운은 이미 충분한 몫을 해 주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놓아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담현이 그에게 행복하게 살라고 권했듯이 말이다.
“제 꿈은 형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짐승도 다 자라면 독립하는 법이다.”
“전 아직 부족합니다. 형님께 배울 게 산더미처럼 있습니다!”
“방이를 봐. 혼자서도 척척 잘하잖아.”
서조운이 울상을 지었다.
말하는 투가 무조건 자신을 내보낼 것 같아서였다.
“혹시 제가 필요하지 않으신 건가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넌 그런 말을 할 위치가 아니야.”
“그런데 왜 자꾸 내보내려는 거죠?”
“네 몫을 충분히 했으니까. 그러니 이제는 네 삶을 살라는 거다. 내가 판단하기로 십 년 치 일을 다 했으니까.”
“그럼 약속은 끝났다 치고, 당분간 더 머물러도 되나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표정으로 서조운이 물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울 것 같은 얼굴로 말이다.
그 모습에 반호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까지 이곳에 있으려는 거야? 네 꿈을 시작해도 되고, 그게 아니라면 본가인 서가장으로 가도 되는데.”
“저는 형님의 오른팔이니까요. 가문을 이어야 하는 방이 형이나 척이 형, 이륭 형, 의성이와는 완전히 다르죠. 전 셋째라 서가장을 이을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형님의 곁에 남을 사람은 저라는 뜻이죠.”
“내가 언제 충성을 강요한 적 있냐.”
반호진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듣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단 한 번도 없으시죠.”
“근데 왜 충성 운운하는 거야?”
“그만큼 제가 형님을 모시고 싶다는 뜻입니다. 결국에는 다들 제 자리로 돌아가겠지만 전 아니니까요!”
“너는 이제 혼자가 아니야.”
움찔!
서조운이 순간 흠칫거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들이 있어서였다.
지금은 소수지만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 아이들의 미래도 넌 책임져야 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미래는 제가 가야 할 길과 같습니다.”
“하아. 이해가 안 되네. 놓아준다고 하는데도 안 가겠다니.”
반호진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집불통도 이런 고집불통이 없어서였다.
“저는 형님 옆에서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
“너만의 가문을 일으키겠다는 꿈은 어쩌고?”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룰 방법을 얼마 전에 찾아냈습니다.”
“무슨 방법인데?”
“제가 가신이 되는 겁니다. 정확하게는 가신 가문을 일으키는 거죠. 그럼 모든 게 다 해결됩니다.”
서조운의 콧대를 세웠다.
평소답지 않게 우쭐한 표정을 짓는 서조운의 모습에 반호진은 결국 실소를 흘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저런 방법을 떠올린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가신 가문?”
“예. 무상문은 앞으로 더욱 커질 겁니다. 이미 그 사실을 만천하에 증명하기도 했고요. 그러니 가신 가문이 생기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렇게 하자.”
“저는 언제든지 형님의 뜻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가라고 하면?”
“그건 좀…….”
분부만 내리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던 서조운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런 서조운의 모습에 반호진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원래의 약속대로라면 우리에게는 육 년 조금 넘는 시간이 있어. 그걸 유예기간으로 삼는 거야.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말고 좀 더 고민해 보자는 이야기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은데요. 저 그렇게 가벼운 사나이가 아닙니다. 충분히, 심도 깊게 고민해 보고 내린 결정입니다.”
“사람 일이라는 게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 예를 들면 혼인이라든지.”
“혼인이라. 확실히 큰일이기는 하죠. 근데 저는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정략결혼을 할 생각은 없다고요. 약속했던 기간을 채우면 스물일곱 살이라 나이가 적지 않기도 하고요. 그래서 아버지께서도 이해하셨습니다.”
이 정도쯤은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이 서조운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반호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내가 가신으로 남는 걸 원치 않을 수도 있잖아?”
“반대로 저보다 더 원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저는 뜻이 맞지 않는 여인과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절대 타협이 없다는 듯이 서조운이 강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결국 어깨를 으쓱거릴 수밖에 없었다.
“엄청 확고하네.”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유화가 고생을 많이 하겠어.”
“예?! 유화가 왜 여기에서 나옵니까?”
“둘이 만나는 거 아니었어?”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묻는 반호진을 향해 서조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피를 토하듯이 큰 소리로 부정했다.
“절대, 절대 아닙니다! 제가 왜 유화랑 만납니까?!”
“아니라고?”
“예! 절대 아닙니다!”
“그럼 유화 혼자만의 짝사랑인가?”
서조운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그러나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허둥지둥댔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나 보네? 없었으면 처음부터 싫다고 말했을 텐데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어…….”
“뭐, 알아서 해. 두 사람 문제에 관여할 생각은 없으니까. 남녀사이는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해야지. 그나저나 좋을 때구만. 우리 조운이가 다 컸어.”
마치 다 자란 자식을 쳐다보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반호진의 시선에 서조운의 목이 붉어졌다.
얼굴을 넘어 점점 전신으로 번져 가는 것이었다.
“저는 진즉에 다 컸는데요.”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그러다가 놓친다. 제일 어리석은 짓이 놓치고 후회하는 거야. 설마 집안이 부족해서 고민하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다만 아직은 나이가…….”
“허어. 거기까지 고민했다니. 정말 다 컸네.”
“으으으!”
끝까지 아기 취급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서조운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따지기에는 명분도, 신분도, 나이도 전부 다 밀렸다.
“당장 혼인할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걱정해? 만나다가 때가 무르익으면 그때 결혼하면 되지.”
“그게, 그러니까요…….”
“아, 이건 실언. 두 사람 일은 둘이 알아서 해. 난 더 이상 말하지 않으마.”
“형님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서조운이 역공을 날렸다.
혼자만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나도 고민 중이야. 근데 혼례를 올리는 날이 그리 멀지는 않을 거야.”
“오오오!”
“일단 내가 막내라 형님들 문제도 있고.”
“하긴. 그건 저나 형님이나 같으니까요. 그나마 전 큰형이 장가를 갔으니. 게다가 모용세가는 척이 형도 있잖아요.”
서조운이 개구지게 웃었다.
모용세가야 서둘러서 혼인까지 진행시키고 싶을 테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말이다.
후계자인 모용척이 혼례는커녕 만나는 상대도 없기에 모용세가로서는 여동생인 모용희수를 먼저 결혼시키기가 난감했다.
“그 문제가 있긴 하지.”
“보통은 순서대로 혼례를 올리니까요. 다만 문제는 척이 형도 한 성깔한다는 거죠. 아마 정략결혼을 시키려고 하면 노발대발할걸요.”
“그렇지는 않을걸. 자기 신분과 위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까. 속으로야 격분하겠지만 겉으로는 받아들일 거야. 또 은근히 여동생을 챙기는 녀석이니.”
“소가주라는 자리도 할 게 못 되는 것 같아요. 책임져야 하는 게 엄청 많으니.”
누리는 게 많지만 그만큼 의무 역시 많았다.
그래서 서조운은 소가주라는 직위가 꼭 좋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나중에 가신 가문의 가주가 되면 너도 똑같아지는 거야.”
“에이. 엄밀히 따지면 다르죠. 소가주는 지시를 받아야 하지만 가주는 결정권자이니까요. 그만큼 책임져야 하는 것도 커지지만 그래도 지시를 받는 것보다는 내리는 쪽이 훨씬 낫죠.”
“야망도 있는 녀석이 왜 나가려고 하지 않을까.”
반호진의 중얼거림에 서조운은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여기서 대답했다가는 겨우 끝낸 논쟁을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어쨌든 잘해 봐. 난 둘을 응원하는 쪽이니까. 잘 안돼도 나는 두 사람을 똑같이 대할 거고.”
“순리에 맡기겠습니다.”
“그러다가 뺏기지.”
“으으!”
서조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사실 모르는 게 이상했다.
예유화는 완치가 되었을 때부터 뭇 남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지금은 미모가 만개해서 남창을 넘어 강서성 제일의 미녀라 불렸다.
“뭐, 순리에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저도 형님처럼 되고 싶었었는데…….”
“이미 충분히 되었고, 누린 것 같다만.”
“전 이제 스무 살이잖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따라 할 기세인 서조운의 모습에 반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 똑똑한 녀석인데 이럴 때 보면 어수룩하기 그지없었다.
“너와 난 달라. 닮고 싶다고 해서 완전히 똑같아지는 건 불가능하고.”
“그렇긴 합니다만.”
“그나저나 북궁열은 어때?”
서조운의 눈빛이 달라졌다.
한순간에 진지해진 것이었다.
“열심히 합니다. 재능도 있고, 사교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를 믿을 수 있을까요?”
“배신할까 봐 걱정돼?”
“저뿐만 아니라 형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버림받았다고 하나 북해빙궁주의 적자이니까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 말도 맞아. 근데 골육상쟁이 괜히 벌어지는 게 아냐. 더욱이 북해빙궁주는 첫째인 일 공자를 선택했지. 즉 버림받았기에 절대 북해빙궁주의 손을 잡지는 않을 거야. 여자가 한이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지만 남자의 한도 만만치 않아.”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서조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대의 북해빙궁주를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이래저래 들은 것이 있었다.
중원을 침공했던 전대 북해빙궁주보다는 약하다지만 그래도 초월경의 무인이었기에 서조운은 회의적이었다.
“성공해도 좋고, 실패해도 좋고.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이야. 북해빙궁주가 젊다고는 하나 죽지 않는 건 아니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당대의 북해빙궁주를 넘어서지 못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소궁주는 어떨까?”
“형님께서 보시기에는 비슷하다고 하셨죠?”
“맞아.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지.”
“어쩌면 압살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이 공자가 북해빙궁주가 되어도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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