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4장. 끝은 또 다른 시작. -03
북궁열은 두 눈을 감았다.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반호진이 무엇을 노리는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반호진의 말대로 그가 잃을 건 없었다.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야. 네가 생각하는 게 맞기도 하고.”
“마교를 견제해 달라?”
“맞아. 근데 전쟁을 하라는 뜻은 아니야. 나도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아. 다만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를 않길 바랄 뿐이지. 그리고 견제를 꼭 북해빙궁만 할 이유는 없고.”
“협력관계?”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되는 경우는 의외로 비일비재하다.”
북궁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견원지간이라고 하더라도 상호 간에 이익이 된다면 힘을 합치는 경우는 많았다.
괜히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가 있는 게 아니었다.
“동료라.”
“막말로 중원을 침공한 건 늘 북해빙궁이었어. 이 역사를 설마 모르진 않겠지.”
“부정하기에는 증거들이 너무 많긴 하지.”
북궁열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명백한 증거들이 너무 수두룩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최근의 전쟁만 하더라도 중원을 먼저 침공한 건 북해빙궁이었다.
그로 인한 결과가 바로 현재의 자신이었고.
“그러니 다른 관계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설마 마교가 두려운 건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마교가 괜히 단일 세력으로 최강이라 불리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지.”
정천맹도 승리했는데 북해빙궁이라고 못 할 건 없었다.
게다가 침공이라면 모르겠으나 북해에서 싸우는 거라면 북해빙궁이 이길 가능성이 더 높았다.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야. 마교가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하는 것.”
“그 대가가 북해빙궁주라.”
“손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의 내 입장에서는. 그렇지만 북해빙궁주가 된다면 손해겠지.”
“말했다시피 아니다 싶으면 거절해도 된다.”
고민하는 북궁열을 보며 반호진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제안을 받아들이면 좋겠지만 거절해도 상관없었다.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니까.
“진심이군.”
“굳이 어르고 달랠 필요가 없는 일이니까. 억지로 시켜서 될 일도 아니고.”
“다시 한번 내 처지를 짚어 주는군.”
“선택권을 주는 거다.”
“근데 더 웃긴 건 네 말대로 될 것 같다는 거다. 나를 북해빙궁주로 만들어 주겠다는 게.”
북궁열이 실소를 흘렸다.
다른 이였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역정을 냈을 것이었다.
그러나 반호진이라면 가능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주겠다. 그리 긴 시간은 안 되겠지만. 나도 언제까지 숭산에 머물 생각은 없어서.”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는데.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발악이라도 해 봐야지.”
“좋은 선택이야.”
반호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맺혔다.
원하던 결과에 몸이 저절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근데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말해 줄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말해 주지.”
“날 어떻게 북해빙궁주로 만들어 주겠다는 거지?”
“일단 생각해 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두 가지나?”
북궁열이 두 눈을 껌뻑거렸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있다고 하자 살짝 놀란 것이었다.
그런 북궁열의 시선을 마주하며 반호진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너도 알다시피 내가 직접 끌어내리는 거다.”
“궁주와 소궁주를 말이군.”
“맞아. 어떻게 보면 가장 깔끔하면서 확실한 방법이지.”
“둘 다 반항하겠지만, 무의미하겠지.”
북궁열은 아버지이자 형을 다른 사람처럼 지칭했다.
그 정도로 북궁열은 쌓인 게 많았다.
애초에 버림받기도 했고.
둘이 먼저 버렸으니 자신도 버릴 자격이 있다고 북궁열은 생각했다.
“실패할 수도 있지. 두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성장을 할 수도 있으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북궁열이 피식 웃었다.
물론 반호진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말 그대로 가능성이니까. 가능성은 모두에게 있으니. 너 역시 마찬가지고. 그래서 생각한 게 두 번째 방법이다.”
“궁금하군.”
“네가 직접 둘을 끌어내리는 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북해빙궁을 손아귀에 넣는 거지.”
“내가?”
“그래, 네가. 현 북해빙궁주보다 강해져서. 사실 이게 가장 확실하지. 피해도 최소화하고. 내가 끌어내린다면 반발이 없을 수가 없으니까. 너도 반파된 북해빙궁을 원하는 건 아니잖아?”
북궁열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말에 대해서는 격하게 동의했기 때문이다.
다 무너진 북해빙궁은 의미가 없었다.
북해제일패로 존재하는 북해빙궁을 손에 넣어야지만 진짜 궁주라고 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 약해진 북해빙궁은 의미가 없어. 너도 그걸 바라지는 않을 테고. 마교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현재의 전력은 유지하고 있어야 해.”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 방법을 추천해.”
“근데 내가 끌어내리는 게 가능할까?”
북궁열도 알았다.
두 번째 방법이 첫 번째 방법보다 훨씬 좋다는 걸 말이다.
다만 문제는 그 자신이었다.
이제 절정의 경지에 익숙해진 그와 달리 북해빙궁주는 비록 초입이기는 하나 초월경에 오른 무인이었다.
그 격차는 어마어마했기에 사실 따라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반호진과 같은 비상식적인 존재가 있긴 하나 그건 말 그대로 예외였다.
“무작정 끌어내리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나도 격차가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방법도 준비했다.”
“방법이라면?”
“네가 강해지면 되는 일 아냐?”
“……지금 그걸 말이라고.”
북궁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실현하느냐였다.
“왜 못 한다고 생각하지?”
“그럼 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못 할 것도 없지. 물론 이곳에서는.”
“그 말은?”
“네가 꼭 소림사에 머물 필요는 없지. 아, 그렇다고 해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뜻은 아니야. 다만 일정 조건하에 움직이는 건 가능하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사형, 아니 방장과 얘기가 끝났다.”
꿀꺽.
북궁열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지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기대하는 얼굴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무상문으로 가는 건가?”
“맞아. 그곳에서 중원 최고의 후기지수들과 어울리며 실력을 쌓아라. 조건은 소궁주와 똑같잖아? 같은 무공을 익혔으니. 재능이 다르다고 하나 환경에서는 적어도 뒤지지 않는다고 보는데.”
이어지는 반호진의 말에 북궁열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자연적인 환경은 확실히 북해빙궁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무상문이 월등히 좋았다.
일단 사람이 살기에는 북해보다 중원이 환경적으로 훨씬 좋았고.
“그 부분은 부정하지 못하겠군.”
“더욱이 혼자보다는 경쟁자가 있는 게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
“너도 도와주나? 예를 들면 조언 같은.”
“원한다면야.”
“좋군.”
북궁열이 처음으로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경쟁자들은 두렵지 않았다.
반호진의 의형제들이 아무리 날고 기는 후기지수들이라고 하나 그 역시 북해에서는 손꼽히는 재능이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일정은 우리와 맞췄으면 하는데.”
“나는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다. 소림이 허락만 한다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 이미 방장과는 이야기가 끝난 상태라. 일단 내가 속가장문인이기도 하고.”
“떠나는 날짜를 말해 주면 준비하고 있겠다.”
북궁열의 눈빛이 달라졌다.
언제 염세적이었냐는 듯이 의욕이 넘치는 모습에 반호진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일정에 대해서 설명했다.
***
똑똑똑.
“형님. 조운입니다.”
“들어와.”
“예.”
문 밖에서 들리는 서조운의 목소리에 반호진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탁자 옆에 엎드려 있던 일동이, 이동이, 삼동이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서조운의 음성에 반응한 것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삼형제가 달려 나갔다.
서조운을 반겨 주려는 것이었다.
헥헥헥!
“침 좀 그만 묻혀라, 이 녀석들아.”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다리 여기저기를 물고 늘어지는 삼형제의 모습에 서조운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달려든 삼형제로 인해 가다듬은 옷매무새가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서였다.
그렇다고 다시 손을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서조운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포기해. 그런 말을 알아들을 거였으면 진즉에 알아들었겠지.”
“이건 분명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일 거예요. 다른 명령은 귀신같이 알아듣잖아요.”
“간식의 힘일 수도 있고. 지금 손에 간식이 없잖아?”
“……그것도 일리가 있네요.”
“무시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아는 체를 해 주는 게.”
여전히 몸을 비벼대는 삼형제를 보며 반호진이 의자에서 일어나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서조운에게 앞자리를 권했다.
“가끔은 그냥 무시해 줬으면 하는 생각도 들어요.”
“사실 나도 그래. 애들이 너무 힘이 넘쳐. 이제는 손주도 본 녀석들이.”
“아주 왕성하죠. 성욕인지 번식욕인지는 구분은 안 가지만요.”
“둘 다일 수도 있고.”
자리에 앉자 언제 날뛰었냐는 듯이 얌전히 배를 바닥에 붙이고 엎드리는 삼형제의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건 서조운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둘 다라면 너무 끔찍한데요.”
“근데 그건 본능이니까. 발정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지. 발정 난 사람도 있고.”
“그렇게 따지면 인간도 만만치 않기는 하네요. 한편으로는 부럽고요. 아무 생각 없이 마음대로 사니까요. 특히나 이 녀석들은요.”
서조운이 진심으로 부러운 듯이 삼형제를 쳐다봤다.
그러자 삼형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조운의 눈빛을 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이상하다고 느끼긴 하는 듯했다.
“왜 아무 생각 없이 살 거라고 생각해? 이 녀석들도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을 거야.”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다 행복해 보여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또르륵.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잘 데워진 차를 반호진은 서조운의 찻잔에 따라 주었다.
이윽고 향긋한 차향이 실내에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저는 준비되었습니다.”
“무슨 준비?”
“하실 말씀이 있으셔서 따로 부르신 거잖아요.”
“눈치는 참 빨라.”
“하하하. 제 장점 중 하나입니다. 형들에게는 없는 거죠.”
서조운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눈치에 한해서는 자신이 제일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비빌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친구인 사마의성 정도였다.
“다른 게 아니라 우리가 맺은 맹약에 대해서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어서.”
“맹약이라 하심은?”
“너의 구양절맥을 치료하면서 맺은 약속 있잖아. 설마 잊은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어떻게 그 약속을 잊겠습니까. 제 목숨과도 연관된 일인데요.”
서조운이 격렬하게 손사래를 쳤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게 그때 반호진과 맺은 약속이었다.
또한 그날 서조운은 스스로에게 따로 맹세까지 했었다.
“잊어버리기에는 조금 특별하기는 했지?”
“그럼요. 완전 특별했죠.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날 정도로요. 그날의 대화, 분위기, 방 안의 냄새 등등 다 기억납니다.”
아련한 얼굴로 서조운이 말했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억이 선명한 건 반호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약속한 건 십 년이었지. 그걸 이제 그만 풀어 줄까 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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