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445화 (445/468)

제 144장. 끝은 또 다른 시작. -02

팽만철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장난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표정과 눈빛으로 그는 반호진을 직시했다.

“왜 수매이냐라.”

“벌써 수매라고 하는 거냐?”

팽만철이 두꺼운 팔뚝을 벅벅 긁었다.

수매라는 두 글자를 듣자 닭살이 오돌토돌 돋아난 것이었다.

그러면서 질색한 표정으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연인이니까요.”

“허어! 네 입에서 연인이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예상하셨지 않습니까?”

“예상하는 것과 직접 듣는 건 엄연히 다르지.”

팽만철은 계속해서 양 팔뚝을 긁었다.

피부에 돋아난 두드러기가 가시지 않아서였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이제는 이유를 들었으면 하는데.”

“팽 소저가 아닌 이유는 분명합니다.”

“솔직히 막내가 모용희수보다 외모적으로 부족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나야 자식이니까 화영이가 더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이들의 시선은 다르지. 근데 꼭 교제하는 데 있어 외모가 전부는 아니지. 더욱이 혼인은 가문 대 가문이 맺어지는 인륜지대사지 않더냐.”

팽만철도 인정할 건 인정하는 사나이였다.

그렇기에 외모적인 부분에서 팽화영이 부족하다는 건 인정했다.

그러나 남녀사이에 있어 외모가 전부는 아니었다.

외모를 제외한 부분에서는 오히려 팽화영이 모용희수보다 나았다.

“맞습니다. 외모가 전부는 아니죠. 근데 저는 외모 때문에 수매와 교제한 게 아닙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가문을 본 것도 아닙니다.”

“……아니라고?”

“예. 애초에 그런 것들은 기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사람만 봤다는 것이냐?”

팽만철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기준이 사람이라면 더욱 말이 되지 않아서였다.

개인적인 능력만 본다면 모용희수보다 팽화영이 월등했다.

오빠들보다 더 무재가 뛰어난 게 바로 팽화영이었다.

“예. 재능이 아니라.”

“어째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본 것 같다?”

“가주님은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나십니다.”

“크하하하! 내가 좀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기는 하지.”

팽만철이 호탕하게 웃었다.

이해를 잘못한 것 같았지만 반호진은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서로 좋으면 되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저는 무인이기 전에 사람입니다. 또한 남자지요.”

“누가 그걸 모르나. 그렇게 따지면 나도 사람이고 남자야.”

“맞습니다. 그런데 왜 자식을 가지고 장사를 하시려고 하셨습니까?”

“…….”

팽만철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훅 들어오는 날카로운 한마디에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였다.

변명거리야 찾으면 수만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변명일 뿐이었다.

꿀꺽!

결론적으로는 반호진의 말대로 장사를 하려 한 게 맞았다.

막내딸인 팽화영을 매개체로 삼아 반호진을 하북팽가의 울타리 안에 담으려고 했기에 팽만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마른침만 삼켰다.

“물론 정략결혼이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저 역시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서로가 똑같이 원할 때 정략결혼이 성립되는 것인데 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정략결혼이 성사되지 않을 수밖에요.”

“장사라. 틀린 말은 아니야.”

“팽 소저는 좋은 분을 만나실 겁니다. 무인으로서도, 여도객으로서도 대성할 겁니다.”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건가?”

팽만철이 실소를 흘렸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좋은 점이 딱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머리가 맑아졌다는 것이었다.

“약이라도 주는 게 어딥니까.”

“하긴. 네 성격에 들이받으면 그냥 들이받지 약까지 주지는 않지. 그런 걸 보면 화영이의 재능이 뛰어나기는 한가 봐. 네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가주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팽 소저의 재능이 특별한걸요.”

“알지. 근데 나라고 완벽한 건 아니니까. 그 편견을 깨부숴 준 게 너고.”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떤 대답을 하든 민망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았기에 반호진은 말을 아꼈다.

“여전히 아쉽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는 바랄 수 없겠지. 근데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첩을 들일 생각은 없지?”

“혹시나 해서 묻는다는 말은 제 대답을 얼추 아신다는 뜻 아닙니까?”

“이왕이면 확실하게 하자 이거지. 확답을 들어서 나쁠 건 없잖아?”

“아직 혼례도 안 올렸습니다. 너무 앞서가신 것 같습니다.”

“흐음. 생각이 나중에는 바뀔 수 있다는 뜻이렷다.”

반호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대답을 어떻게 해석하면 저런 결론이 나오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왜 해석이 그렇게 갑니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니까. 괜히 뒷간에 들어가기 전, 후의 감정이 다른 게 아니거든. 또 사람일이라는 게 한 치 앞을 모르니까.”

“포기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언제? 난 아쉽다고 했지, 포기했다고는 말 안 했는데?”

“…….”

이번에는 반호진의 말문이 막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팽만철의 말이 맞았다.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적은 없었다.

“그나저나 모용세가가 부럽구먼. 소림검신을 품에 안다니. 그것도 정실이라니!”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아직 혼례도 안 올렸습니다. 상견례도 안 했고요.”

“그럼 나는 엎어지길 기다리면 되는 건가?”

팽만철이 능글맞게 웃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표정에 반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교제도 쉽게 내린 결정 아닙니다.”

“그렇겠지. 너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엄청나게 신경 쓰는 녀석이니까.”

반호진의 동공이 커졌다.

설마하니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볼 줄은 몰라서였다.

심지어 그 대상이 팽만철이라는 사실에 반호진은 정말 크게 놀랐다.

“그게 티가 납니까?”

“네 주변만 봐도 딱 나오잖아.”

“흐음.”

“나도 나름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야!”

탕탕!

팽만철의 커다란 손이 다탁을 두드렸다.

그러자 이상하게 작아 보이는 탁자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휘청거렸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뭐, 사과할 정도까지는 아니고.”

“궁금증은 풀리셨습니까?”

“응. 완전히. 아주 개운하게.”

기분이 좋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납득할 만했기에 팽만철은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두 녀석들도 나와 같은 이유겠지?”

“예.”

“그럼 됐어. 나중에 본가나 놀러 와. 너무 집에만 박혀 있지 말고. 바깥바람도 적당히 쐬어야지.”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팽만철은 알았다.

반호진이 대답처럼 강호를 돌아다닐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걸 말이다.

“다음번 만남은 네가 장가가는 날이겠구먼.”

“그건 모르지요.”

“초대장은 꼭 보내고. 안 보내면 내가 직접 쳐들어올 거다.”

팽만철이 경고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건 진심이었다.

“제가 그렇게 매정하지는 않습니다.”

“글쎄.”

팽만철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매정하다는 쪽이었다.

물론 잔정은 많지만 그건 자기 사람에 한정해서였다.

그 외에는 일절 관심도 없는 게 반호진이었기에 팽만철은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

위령제로 북적거리는 소림사 경내와 달리 숭산 심처에 머무는 북궁열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앞마당을 바라봤다.

며칠째 사람 하나 찾아오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북궁열은 외롭지 않았다.

적응이 된 것도 있지만 볼모의 신분으로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철두철미하게 감시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나았기에 북궁열은 나름 만족했다.

저벅저벅.

그때 북궁열의 거처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입구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북궁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입구 쪽으로 향했다.

“오랜만이야.”

“……당신이 무슨 일이지?”

천천히 걸어오는 반호진의 모습에 북궁열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란 것이었다.

“환대까지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앉을 자리 정도는 권할 줄 알았는데.”

“내가 권할 필요가 있을까. 이곳이 내 집도 아닌데. 막말로 창살 없는 감옥이잖아.”

북궁열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만큼이나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정확하게는 세 방향을 채우고 있는 절벽을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군. 이곳을 벗어날 수 없으니. 근데 외부로 나가는 것 말고는 모든 게 자유인 걸로 아는데.”

“억압된 자유를 과연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볼모 신분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네 생각이고. 찾아온 용건이나 말하지. 피차 얼굴을 길게 봐서 좋을 건 없으니.”

쌀쌀맞다 못해 냉랭한 북궁열의 반응에도 반호진은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북궁열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오히려 최악은 아니라고 반호진은 생각했다.

“용건까지는 아니고,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어서.”

“볼모인 나에게?”

북궁열이 무표정한 얼굴로 콧방귀를 끼었다.

자신에게 제안할 게 있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싸늘한 대꾸에도 반호진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던 범위 안이었기에 반호진은 말을 이었다.

“너에게도 나쁘지만은 않은 내용일 거다.”

“거부할 권리는 없겠지?”

“아니. 듣고 나서 하기 싫다면 거절해도 된다. 강압적으로 널 어떻게 할 생각이었다면 굳이 이렇게 말로 하지 않았을 거다. 그냥 힘으로 찍어 눌렀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게 가능하니까.”

“…….”

북궁열의 아래턱에 힘이 들어갔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북궁열은 차라리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북해빙궁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마.”

북궁열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상상도 못 한 말에 경악한 것이었다.

그 정도로 지금의 발언은 충격적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데.”

“나를 북해빙궁주로 만들어 주겠다고?”

“맞아.”

북궁열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충격은 얼마 가지 않았다.

이내 그는 냉정함을 되찾고는 반호진을 노려봤다.

“마교 때문인가?”

“정확해.”

짧은 시간에 많은 걸 유추해 낸 북궁열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은 제안이지만 결국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내가 받아들일 것 같나?”

“나쁠 거 없잖아?”

“뭐라고?”

“네가 잃을 건 없어. 아니, 솔직히 말하면 더 이상 잃을 게 없잖아? 처음 약속은 오 년이지만 과연 북해빙궁 측에서 일 공자를 이곳으로 보낼까? 내 생각은 다른데.”

꾸욱!

북궁열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안 그래도 그가 걱정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약속을 하기는 했으나 서로 합의한다면 내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

그리고 오 년이라는 시간은 상당히 길었다.

“애초에 일 공자가 아닌 널 보낸 것부터가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것 아닐까?”

“이간질하지 마라.”

“너라면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이간질하는 게 아님을. 난 그저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다. 이간질할 필요도 없고. 그리고 앞서 말했다시피 난 강요하는 게 아냐. 넌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다.”

북궁열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라고 모르지 않았다.

다만 반호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기에 일단 부정하고 본 것이었다.

“거절하겠다면 이대로 난 돌아갈 거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기도 하고. 그러니 확실하게 대답해. 대화를 더 이어 갈 건지, 아니면 끝낼 건지.”

“……자세히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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