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4장. 끝은 또 다른 시작. -01
반호진의 인사를 받으며 하오문주가 고개를 저었다.
친분이 깊은 건 아니나 개인적으로 하오문주는 담현을 존경했다.
그렇기에 담현이 귀천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난희주와 함께 출발했다.
“맞아. 방장께서 돌아가셨는데 당연히 와야지. 오빠가 걱정되기도 하고.”
“내가 왜 걱정돼?”
“방장께서 돌아가셨으니까. 그것도 전쟁으로 인해서 돌아가셨잖아.”
“사람은 언젠가 죽어. 그리고 마지막을 함께해서 괜찮아.”
“괜찮은 척하는 건 아니고?”
난희주가 큰 눈으로 반호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애써 슬픔을 감추려 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슬프지 않은 건 아닌데 또 그렇다고 해서 엄청 힘든 건 아니야.”
“은근히 매정하네.”
“내가 슬퍼하는 걸 원치 않으실 테니까. 마지막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래서는 안 되고.”
“남기신 말씀이 있구나.”
“응.”
반호진은 담현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묘하게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듯한 말을 곱씹으며 반호진은 곳곳에서 흐느끼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난희주도 그런 이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외롭지는 않으시겠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 주어서.”
“다행이지.”
“그만큼 방장께서 인망이 있으셨단 뜻이기도 하고. 세상이 참 웃겨. 정작 일찍 죽어야 할 놈은 오래 살고, 오래 살았으면 하는 이들은 박명하니.”
“박명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
반호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천수를 다 누렸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박명하다고 말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느끼기에는 그래. 방장 같은 분들이 오래 사셔야 중원이 평화로운데. 물론 오빠가 있긴 하지만.”
“나하고 평화하고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지. 웬만큼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지 않는 한 중원침공은 생각도 하지 않을 테니까. 중원의 마도무림이나 사도무림은 이미 된통 당하기도 했고. 적어도 오빠가 살아 있는 한 마도나 사도나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하지도 않을걸?”
난희주의 말에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하오문주와 백설, 비천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동의하는 것이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이제 전쟁은 지긋지긋해.”
“짧은 시간에 너무 몰리기는 했어. 근데 새외무림이나 사도무림, 마도무림 쪽에서는 충분히 기회라고 생각할 법했으니까.”
“그렇긴 했지.”
“사실 나만 하더라도 백도무림의 저력이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물론 오빠가 대활약하기는 했지만.”
“대활약이라.”
반호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의 결과는 결코 그의 실력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로 돌아오는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결과도 없었다.
“표정이 어째 떨떠름하다?”
“나 혼자서만 이룩한 게 아니니까.”
“가끔 쓸데없이 겸손하다니까. 오빠답지 않게.”
“나를 어떻게 생각한 거야?”
“에이. 잘 알면서.”
난희주가 개구지게 싱긋 웃었다.
그런데 그 말에 꽤 많은 이들이 동조했다.
“차라리 욕을 해. 애매하게 돌려 말하지 말고.”
“욕이라니. 중원의 구성(求星)이자 영웅인 오빠에게 내가 어떻게 욕을 하겠어?”
“적당히 해.”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안 그래?”
“맞아요.”
난희주가 쳐다보자 백설이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난희주의 말이 백번 옳았다.
오직 반호진만이 영웅이나 구성이란 말에 어울렸다.
“근데 다행이다. 난 내심 걱정했는데. 오빠가 많이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해서.”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리 그가 절대고수라지만 사람이 아닌 건 아니었다.
부모나 마찬가지인 담현의 죽음에 반호진도 힘들고 슬펐다.
하지만 처음이 아니기에 견딜 만했다.
“나도 사실 걱정이 많이 돼. 사부님께서도 이제는 연세가 적지 않으셔서.”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아직은 죽을 생각이 없으니까.”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사부님.”
“나도 노력하고 있단다.”
난희주가 하오문주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보며 반호진은 조용히 있었다.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배려해 준 것이었다.
“참, 오빠. 법무 대사께서는 취임식을 안 하신다는 말이 있던데?”
“굳이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하셔서.”
“그래도 방장이 되시는 건데.”
“상황이 상황이니까. 내가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나는 대사형의 결정을 존중하는 쪽이라.”
이제 막 위령제를 치렀는데 곧바로 취임식을 하는 것도 보기에 좀 그랬다.
더욱이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취임식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다른 문파나 무가라면 성대하게 취임식을 하는 게 맞겠으나 법무는 소림사의 제자였다.
“하긴, 이곳은 소림사니까. 남들에게 알려야 할 이유도 없지.”
“그것도 그렇고 나는 대사형의 편이라.”
“정확하게는 별 관심 없는 거 아냐?”
난희주가 새치름한 표정으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우애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취임식에 관심이 없어서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서였다.
“취임식은 의미가 없잖아. 대사형이 방장이 될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반 문주님.”
난희주와 티격태격대는 사이 금하륜과 금호연이 다가왔다.
호위대를 이끌고 반호진을 찾아온 것이다.
“바쁘실 텐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금가장주님.”
“다른 분도 아니고 방장이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바빠도 당연히 와야지요. 그리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문주님.”
“예.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친분까지는 아니지만 하오문주와도 안면이 있기에 금하륜은 부드럽게 웃으며 먼저 인사했다.
그러자 하오문주 역시 옅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난희주와 금호연도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고생했다.”
“고생이라니요. 이 정도 일은 고생 축에도 들지 않습니다, 형님.”
사마의성이 하오문 일행을 마중 나간 것처럼 금가장은 서조운이 맡았다.
그래서 반호진은 서조운에게도 고마움을 표했으나 정작 서조운은 손사래를 쳤다.
“고생은 고생이지. 넌 소림사의 제자도 아닌데.”
“대신 형님의 의동생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첫 번째요! 그러니 응당 제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보다 더 정신없으실 텐데요.”
“이 정도 가지고 뭘.”
“으헝헝!”
“사부님!”
서조운의 시선이 대성통곡하는 이대제자들에게로 향했다.
위령제답게 곳곳이 눈물바다로 변했다.
대성통곡까지는 아니더라도 흐느끼는 이들이 엄청 많았기에 서조운도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담현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고.
“애도는 그만해도 돼. 그 정도면 충분히 했어.”
“예, 형님.”
“크흠!”
반호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익숙한 헛기침 소리에 몸이 절로 반응한 것이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팽가주님.”
“잠깐 시간 되지?”
“예. 가시죠.”
“다른 두 놈은 안 온 것 같은데?”
팽만철이 퉁방울만 한 눈을 치켜뜨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샅샅이 살펴봐도 그가 찾는 둘은 보이지 않았다.
키는 그에 비하면 왜소해도 존재감은 남다른데 전혀 느껴지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정이 있어 못 오신다고 했습니다.”
“킁! 사정은 무슨. 그냥 귀찮은 거지. 당가주야 어르신께서 돌아가셨으니 이해가 간다지만 남궁가주는 다르지. 냉큼 와도 모자랄 판에.”
“말 못 할 사정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가시죠.”
“어라? 이쪽 길은 예전에 네가 지내던 곳으로 가는 길 아니야?”
“맞습니다.”
익숙한 길에 팽만철이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반호진과 단둘이 걸어가니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사마 소저.
한편 멀어지는 반호진과 팽만철을 지켜보던 사마의성은 머릿속을 울리는 전음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전음을 보낸 난희주에게로 시선을 옮긴 것이었다.
-혹시 포기한 건가요?
-그게 무슨 말이죠?
-제가 아는 사마 소저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데요.
사마의성은 전음을 보내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사마의성은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용기 있는 자가 영웅을 차지하는 법이에요. 적어도 사마 소저는 저처럼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신분은 아니잖아요.
-난 소저?
-힘내요.
사마의성의 동공이 커졌다.
다른 이도 아니고 난희주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기에 정말 크게 놀란 것이었다.
-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에요. 저도 나름 노리는 게 있어서 말이죠.
얼마나 놀랐는지 입을 다물지 못하는 사마의성을 보며 난희주가 말을 이었다.
특유의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그 모습에 사마의성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도 오랜만이군.”
예전 반호진이 사용했던 처소에 들어서며 팽만철이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적으로는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게 되게 오랜만에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관리가 상당히 잘되어 있는 거 같은데?”
“사질들이 관리해 주었더군요.”
“하긴. 속가장문인이 사용하던 거처였으니.”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닙니다.”
반호진이 피식 웃으며 익숙하게 차호를 들어 따라 주었다.
이윽고 그윽한 차향이 실내를 서서히 채워 가기 시작했다.
“좋군.”
“똑같죠?”
“그러게. 신기할 정도로 똑같아. 다만 사람이 달라졌을 뿐.”
팽만철이 반호진을 지그시 쳐다봤다.
이렇게 단둘이 앉아 있으니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중 처음 만났을 때가 뇌리에 떠올랐다.
‘그때는 진짜 애송이였는데. 아니, 애송이처럼 보였다는 말이 맞으려나.’
처음 반호진을 봤을 때는 쓸 만한 후기지수가 등장했다고 생각했다.
사룡을 위협할 만한 신진고수가 소림사에서 나왔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그때에도 반호진은 천하를 호령하고도 남을 실력자였다.
‘내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 그때 확 낚아챘어야 했는데.’
후르릅.
차를 들이켜며 팽만철은 다시 한번 아쉬움을 달랬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이 쓰려서였다.
만약 그때 누구보다 먼저 반호진을 낚아챘다면 현재 모용희수의 자리는 팽화영의 것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팽만철은 너무나 아쉬웠다.
“가문의 일로 정신없으실 텐데 위령제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방장께서 희생하신 덕분에 마교와의 전쟁에서 이겼는데. 염치가 있다면 당연히 와야지. 안 온 두 녀석이 이상한 거지.”
“사천당가와 남궁세가도 큰 피해를 입었으니까요.”
“본가는 뭐 피해가 없었나? 당장 나만 하더라도 아직 내상이 완치되지 않았는데.”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반호진의 시선이 팽만철의 몸을 훑었다.
워낙에 튼튼하고 강골이라서 그런지 곤륜산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리 붕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걸음걸이도 부상자답지는 않았으나 내상은 다른 문제였기에 반호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거의 다 나았어. 그러니까 왔지.”
“다행이네요.”
“그보다 내가 묻고 싶은 게 있어. 개인적인 궁금증이라고나 할까. 나름 유추해 보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더라고. 알잖아? 난 제갈가주와 달리 머리가 썩 똑똑하지 않은 거.”
“비교 대상이 너무 뛰어나지 않습니까?”
“크흐흐흐! 남궁가주나 당가주하고 비교하면 비슷한 수준이기는 하지.”
팽만철이 히죽 웃었다.
두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면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다행히 둘은 이곳에 없었기에 반호진은 옅게 웃기만 했다.
“무엇이 궁금하신 겁니까?”
“왜 희수 그 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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