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3장. 끝은 내가 낸다. -02
반호진의 목소리에 한기가 서렸다.
타협은 절대 없다는 듯이 싸늘한 어조로 선포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야율천은 물론이고 아직 살아남은 진혈마가의 마인들이 몸을 떨었다.
단지 말뿐임에도 오금이 저려 와서였다.
스으윽.
말을 마침과 동시에 반호진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야율천이 화들짝 놀라며 진기를 일으켰다.
분명 반호진은 그보다 강한 고수였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당해 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제기랄! 섭율 그놈이라도 있었으면……!’
단전의 마기를 모조리 끌어 올리며 야율천이 이를 악물었다.
평소에는 꼴도 보기 싫은 이가 섭율이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그 혼자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존재가 반호진이었기에 야율천은 섭율의 존재가 아쉬웠다.
호위무사들이 있기는 하나 이들만으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아마도 신나게 도망치고 있겠지. 아직 따라잡히지 않았다는 건 나와 싸우고 있다는 뜻이니까.’
야율천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쉬웠다.
만약 반대였으면 하는 마음이 계속 들어서였다.
“너무 아쉬워할 거 없어. 섭율도 곧 뒤따를 테니까. 곤륜산에서 빠져나가는 마교도는 없을 거다.”
“완벽한 계획에도 구멍은 있는 법이지.”
“맞아. 천라지망이라고 해서 완벽하지는 않지. 근데 전력 차이도 현격할뿐더러 다들 악에 받쳐 있는 상태라.”
마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반호진의 말에 야율천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서 달려들었다.
도망칠 수 없다면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야율천은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시간을 끌면서 버티면 다른 마가들과 사단이 집결할 거라고 생각했다.
흩어지는 순간 각개격파당할 거라는 걸 다른 이들도 분명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라도 뭉칠 수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섭율이 이곳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그럼 가능성이 높아진다.’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르며 야율천은 한 가닥 기대를 품었다.
만에 하나이긴 하나 그래도 가능성이 아예 없지만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야율천은 반호진을 쓰러뜨리겠다는 마음가짐보다는 최대한 버티고 시간을 끈다는 생각으로 파상공세를 펼쳤다.
“저희 왔습니다!”
“잔챙이들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형님!”
그때 야율천의 귓가에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서조운을 비롯해서 일행들이 도착한 것이었다.
그런데 온 건 일행들만이 아니었다.
소림사와 모용세가, 선우세가의 무인들도 함께 왔다.
“이런 젠장……!”
“그륵!”
밀물처럼 밀고 들어오는 공격에 진혈마가의 마인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사기에서 밀리자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선우세가나 모용세가의 돌격은 어찌어찌 막아 냈지만 소림사는 달랐다.
서슬 퍼런 안광과 함께 항마의 기운이 서린 무공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자 마인들은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툭.
그 광경에 야율천이 아연한 얼굴로 멍하니 바라볼 때 무언가가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그러더니 그의 발 근처로 굴러왔다.
“으헉!”
갑자기 떨어진 무언가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야율천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발로 굴러온 건 다름 아닌 섭율의 머리였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으로 인해 얼굴의 반 가까이가 가려져 있었지만 알아보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래서 야율천은 대경하며 뒷걸음질 쳤다.
“고생하셨습니다, 대사형.”
“나머지 십마룡도 곧 올 거다. 이쪽으로 몰고 있거든.”
기겁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야율천을 응시하며 법무가 반호진의 옆에 내려섰다.
섭율을 잡자마자 이곳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몰이사냥 중이군요.”
“제갈가주님의 계획대로 되는 중이다. 사실 전력 차이가 이 정도로 나는데 실패하면 그게 이상하지.”
법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시선은 시종일관 야율천에게 향해 있었다.
불제자이지만 법무는 오늘 하루만큼은 소림사의 제자가 아닌 무인이 될 생각이었다.
“뭐, 뭐야?”
“함정이다!”
“우리를 이곳으로 몰은 거야!”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법무의 말대로 몰이가 제대로 된 것이었다.
이곳까지 쫓긴 십마룡들은 반호진과 법무를 보고는 식겁하며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저벅저벅.
그들을 쫓은 이들이 어느새 코앞까지 도착해 있어서였다.
게다가 포위망 역시 틈이 없었다.
허공 말고는 도망칠 구석이 없는 광경에 십대마가의 마인들이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말했잖아? 네놈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지옥밖에 없다고.”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을 것이다.”
상반신 전체가 붕대로 감겨 있는 팽만철이 살벌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 옆에는 당우혁이 팽만철 못지않은 살기를 흩뿌리며 걸어왔다.
말한 대로 모조리 독수로 녹여 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꿀꺽!
마주 보기만 해도 살이 에일 것 같은 지독한 살기에 추양극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암만 살펴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수적으로도 밀리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반호진과 천하십대고수였다.
“이제 끝을 내죠.”
“한 번에 보내 주게?”
“똑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하긴.”
팽만철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말인지 단박에 이해한 것이었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어떻게 복수하느냐였다.
그런 의미에서 반호진의 결정은 아주 깔끔했다.
“저희는 백도이니까요.”
“알고 있어. 나한테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돼.”
반호진의 결정에 동조하듯 제갈문곡이 입을 열자 팽만철이 투덜거렸다.
아무리 무식한 그이지만 이 정도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빌어먹을.”
“억울한 표정 짓지 마. 네놈들은 그딴 표정을 지을 자격도 없어.”
“모욕하지 마라!”
“모욕을 당하려면 명예가 있어야 해. 근데 마교주라면 모를까 넌 없어.”
“으아아아!”
추양극과 마찬가지로 야율천도 느끼고 있었다.
빠져나갈 틈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그는 악에 받친 얼굴로 반호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동귀어진을 해서라도 반호진을 함께 데려가고 싶었다.
푹!
그러나 야율천은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반호진의 검이 어느 틈에 그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어서였다.
“동귀어진도 실력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 가능하지 막무가내로 달려든다고 해서 성공하는 게 아냐.”
“……제길.”
“외롭지는 않을 거다.”
“죽어서도 네놈을 저주할 거다! 중원무림 전체를 저주…….”
진짜로 피를 토하며 야율천이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반호진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심장에 박혀 있던 검을 움직여 머리를 갈라 버렸기 때문이다.
쿠웅!
머리가 사선으로 갈라진 야율천의 몸뚱이가 뒤로 넘어갔다.
얼마나 원통한지 두 눈도 감지 못한 채였다.
“복수의 시간이다!”
“전부 다 쓸어버려!”
“단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야율천의 죽음과 함께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던 전투가 재개되었다.
수장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이윽고 곳곳에서 비명과 단말마가 난무하며 마인들이 쓰러졌다.
순순히 죽지는 않겠다는 듯이 끝까지 발악했으나 반전은 없었다.
“이겼다!”
“우리가 승리했다!”
마지막까지 버티면 마인이 쓰러지자 내원 곳곳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진짜 승리한 게 실감이 되어서였다.
동시에 곤륜파와 공동파의 제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전쟁이 끝나자 죽은 사형제들이 떠오른 것이었다.
“으아아아!”
“흐흑.”
기쁨의 함성과 슬픔이 가득 담긴 울음소리가 공존하는 곳에서 반호진은 두 눈을 감았다.
그런 반호진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대회의실로 수장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전쟁에서 승리해서 그런지 표정들이 전체적으로 가벼웠다.
“다 참석하신 것 같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보타문주와 해남파의 장문인을 일별하며 제갈문곡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가 회의를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럽시다.”
“회의할 게 있소이까?”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의견이 둘로 갈렸다.
순순히 동조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처음부터 삐딱하게 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논공행상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말이오.”
“의제는 다른 것입니다.”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수장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하며 제갈문곡이 빙긋 웃었다.
그러자 눈이 마주친 이들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참 불만들이 많아. 어련히 이유가 있어서 회의를 하자고 한 것일 텐데.”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하는 이들을 보며 팽만철이 혀를 찼다.
고생한 제갈문곡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초를 치니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나가든가.”
팽만철처럼 주위의 눈치를 크게 보지 않는 일우가 입을 열었다.
특유의 매서운 눈초리로 투덜거렸던 이들을 쏘아보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맞아.”
“자네를 도와주려고 한 건 아니네.”
“암, 알지. 천하의 일우 도장이 나를 도와줄 리가 없지.”
“흥.”
“원시천존. 말씀하시지요, 제갈가주님.”
콧방귀를 뀌는 일우를 보며 팽만철이 키득거릴 때 조용히 앉아 있던 운상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다른 이들과 달리 운상의 말에는 무게감이 있었기에 모두의 시선이 제갈문곡에게로 집중되었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별말씀을요.”
“제가 회의를 청한 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경청하던 수장들이 두 눈을 껌뻑였다.
무슨 소리인지 다들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제갈가주님. 전쟁은 끝났습니다만.”
“맞습니다. 마교의 침공은 막아 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이겼을 뿐 마교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말씀은 마교의 본산이 있는 신강까지 쳐들어가자는 것입니까?”
이어지는 제갈문곡의 말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상상도 못 한 말에 놀란 것이었다.
“꼭 가자는 게 아니라 한 번 정도쯤은 논의해 보자는 것입니다.”
“흐음.”
대부분의 수장들이 눈가를 찡그렸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냐는 표정이었다.
“신강까지 가는 건 무리이지 않겠습니까. 이기긴 했으나 피해가 큽니다. 저도 마교를 지워 버리고 싶은 건 마찬가지입니다만, 안타깝게도 여력이 없습니다.”
“설사 쳐들어간다고 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마교에는 그 유명한 원로원도 있고요.”
곳곳에서 웅성거렸다.
뒤늦게 원로원을 떠올린 것이었다.
비록 전성기가 지났다고 하나 마교의 원로원은 전대 구마들과 사단의 단주들이 득시글거리는 복마전이었다.
그렇기에 가뜩이나 회의적이었던 수장들은 하나같이 질린 표정으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무리인가.’
그 모습에 제갈문곡은 쓴웃음을 삼켰다.
분위기가 예상한 것에서 한 치도 틀리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그 말은 이번 역시도 후환을 남겨 둔다는 걸 뜻했다.
“솔직히 저희는 여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만요.”
십대세가에 속해 있는 공손세가와 하후세가의 가주가 슬쩍 운상을 비롯한 천하십대고수들을 쳐다봤다.
원로원이 대단하다지만 천하십대고수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게다가 죽은 마교주와 거의 대등하게 싸운 반호진도 있었기에 무조건 불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근데 이건 달리 말하면 자신들은 나설 생각이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두 분께서는 지금 천하십대고수만 보내자는 말씀이십니까?”
“꼭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닙니다. 효율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소수정예로 움직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말을 꺼낸 겁니다. 이미 선례도 있지 않습니까.”
제갈문곡이 눈살을 찌푸렸다.
천하십대고수를 비롯해서 반호진과 절대고수들에게 떠넘기려는 속내가 너무 훤히 보여서였다.
근데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몇몇이 대놓고 못마땅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듣다 보니까 기분이 나쁘네. 한마디로 우리만 뭐 빠지게 싸우라는 거 아냐? 자기들은 가만히 있으면서 이득을 챙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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