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441화 (441/468)

제 143장. 끝은 내가 낸다. -01

아쉬운 마음을 애써 달래고 있을 때 반호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 음성에 제갈문곡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겉으로는 전혀 놀란 티를 내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와 동시에 전음으로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무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따 뵙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예.”

진심이 담긴 말에 반호진이 옅게 웃으며 제갈문곡을 일별했다.

그러고는 싸늘한 얼굴로 곤륜산을 향해 날아갔다.

달려가는 다른 이들과 달리 반호진은 어검비행술로 순식간에 곤륜산의 하늘을 갈랐다.

“적……!”

제갈문곡의 예상대로 마교는 정천맹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공동산에서 있었던 전투로 병력이 거의 반파되다시피 했지만 그럼에도 정천맹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단순히 규모만 따지면 정천맹이 압도적이었기에 보초를 촘촘히 세워 사주경계에 신경 썼는데 그중 한 곳이 반호진을 발견하고는 경종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보초의 손보다 반호진의 지풍이 훨씬 더 빨랐다.

푹.

전광석화처럼 날아간 지풍은 정확히 마인의 미간을 꿰뚫었다.

마교의 마인답게 절정에 이른 고수였으나 반호진의 지풍에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뎅뎅뎅뎅!

반호진이 지풍으로 일곱 명을 잡았을 때 곳곳에서 격렬한 경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까운 곳도 있었고 먼 곳도 있었는데 대부분은 곤륜산의 초입 부근이었다.

반면에 반호진은 어느새 곤륜파의 영역에 도착해 있었다.

툭.

편하게 검을 타고 곤륜산을 오른 반호진은 곤륜파의 외원에 내려섰다.

그런데 그 순간 반호진의 전후좌우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구쳤다.

반호진이 땅을 디디기 무섭게 귀영마가의 마인들이 기습하는 것이었다.

“흥.”

착지하는 순간을 노린 영리한 기습이었으나 반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분명 귀영마가의 은신술은 대단했으나 반호진의 기감에서 벗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귀영마가의 가주이자 구마 중 한 명이었던 비마(秘魔)라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었겠으나 안타깝게도 현재 나타난 이들 중 그 정도 실력자는 없었다.

터터터텅!

일격필살의 의지로 목숨을 도외시한 채 귀영마가의 마인들이 달려들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반호진을 감싼 황금빛 호신강기는 그들의 파상공세에도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슈우욱!

오히려 완벽한 구의 형태를 한 호신강기에서 송곳과도 같은 강기가 솟구치자 귀영마가의 마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방식에 당황해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것이었다.

스슥!

물론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었다.

반응속도와 판단력이 뛰어난 몇몇은 가까스로 피해 내기는 했다.

다만 완벽하게는 회피하지 못했다.

스르륵!

게다가 반호진의 공격은 단순히 송곳 같은 강기로 찌르지만 않았다.

채찍처럼 휘어지며 회피한 마인들의 목이나 허리를 휘감았다.

서걱. 스극.

가뜩이나 섬광처럼 빠른 공격인데 도중에 휘어지며 파고들자 마인들로서는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반호진의 주변에는 식어 가는 시체만이 남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수십 명을 죽인 것이었다.

저벅저벅.

뒷짐을 진 채로 반호진은 곤륜파의 내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간의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보여 주듯 외원의 건물들 중에 멀쩡한 건물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반쯤 무너진 게 대부분이었고, 내원에 가까워질수록 그나마 상태가 나았다.

“거, 검신!”

경종 소리를 듣고 다급하게 몰려나오던 음천마가의 여인들이 대경실색했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뒷짐을 지고서 여유롭게 걸어오는 반호진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와서였다.

비록 마교주보다는 못하다지만 그럼에도 정천맹에서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무인이 반호진이었다.

그 대단한 마교주도 반호진의 나이일 때 저 정도는 아니었기에 여인들은 해쓱해진 안색으로 빠르게 서로를 바라봤다.

지금이라도 피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스르릉.

그런 여인들을 대신해 반호진이 결정했다.

무심해서 더욱 서늘하게 느껴지는 눈빛으로 반호진은 의지를 일으켰다.

손이 아닌 마음으로 소천검을 뽑은 것이었다.

“피, 피해!”

저절로 두둥실 떠오르는 소천검의 모습에 강제로 음천마가의 가주가 된 여을영이 뾰족하게 소리쳤다.

이제는 가주가 되었지만 그녀는 결코 엄마와 같은 초마경의 고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애초부터 여을영은 반호진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덤벼 봤자 개죽음만 당할 거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가주님을 지켜야 해!”

“저놈을 막아!”

전대가주가 죽은 마당에 여을영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노파들이 칼칼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을영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이쪽으로!”

“가주님을 모시고 가라!”

음천마가의 여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어떻게든 여을영만은 빼내겠다는 듯이 장로들이 반호진의 앞을 가로막으며 경로를 차단했다.

“더 이상은 못 간다!”

“눈물 나는 충성심이네.”

앞에 선 노파들로 인해 여을영의 모습이 가려졌으나 반호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또한 서두르지도 않았다.

어차피 독 안에 든 쥐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곤륜산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네놈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우리를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을 거다!”

“어리석은 놈! 적진에 혼자 오다니!”

스스슥!

음천마가의 장로들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그런 장로들의 곁으로 검은 인영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귀영마가와 흑풍단이 집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데 흑풍단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다.

“충원된 모양이군.”

“그렇다!”

“근데 단주급은 없는 모양이야.”

순식간에 수백 명에게 포위되었으나 반호진은 여유로웠다.

자세히 살펴봐도 초마경의 수준에 이른 고수는 보이지 않아서였다.

“제아무리 초월경의 고수라도 이 정도 숫자라면…….”

“어리석은 건 너희들이지. 소마(素魔)나 비마, 흑풍단주가 있어도 모자랄 판에.”

반호진이 대놓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초마경도 아닌 주제에 큰소리 땅땅 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신감이 넘치든 말든 그에게는 상관없었다.

스윽.

반호진이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 두둥실 떠 있던 소천검을 움켜쥔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전방을 향해 가볍게 그었다.

“어?”

장난처럼 휘두른 횡베기였으나 결과는 놀라웠다.

기세등등한 얼굴로 큰소리쳤던 음천마가의 장로들이 반으로 갈라졌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나누어지며 서로 반대 방향으로 허물어졌던 것이다.

“공격해!”

“검을 휘두를 틈을 주지 마!”

음천마가의 장로들이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도륙당하자 흑풍단이 기겁하며 달려들었다.

동시에 귀영마가의 마인들도 움직였다.

반호진을 자유롭게 놔둬서는 안 된다고 똑같이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수백 명이 일제히 달려들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쩌어억!

앞서 상대했던 귀영마가의 마인들이 일반 무사들이라면 지금 모인 이들은 장로들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동일했다.

아무리 장로들이 도강과 검강을 일으켜도 반호진의 일검은 모든 걸 갈랐다.

격이 다른 걸 보여 주듯이 어느 누구도 버텨 내지 못했다.

투둑. 투두둑.

음천마가의 장로들처럼 아무것도 못 한 채 귀영마가와 흑풍단이 썰려 나갔다.

단 일격에 포위하고 있던 모든 이들이 시체로 화한 것이었다.

“너, 너는?!”

가로막거나 덤비는 건 모조리 찢어 버리며 파죽지세의 기세로 곤륜파의 내원에 도착한 반호진의 눈에 드디어 목표물이 보였다.

진혈마가와 야율천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옆에는 사이좋게 신성마가와 섭율이 있었다.

“또 도망치려고?”

“큭!”

누가 봐도 떠날 채비를 끝낸 모습의 야율천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속내를 꿰뚫어 보자 당황한 것이었다.

“진혈마가의 소가주다운 기개를 보여 주었으면 좋겠는데. 물론 신성마가의 소가주도. 아, 이제는 둘 다 가주인 건가? 부친이 죽었으니 자연스럽게 승계가 되었을 것 같은데.”

“…….”

반호진의 시선에 섭율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지난번과는 딴판인 것 같아서였다.

말투는 비슷했지만 눈빛이나 흘러나오는 기도는 완전히 달랐다.

전신에서 칼처럼 예리한 기세를 흩뿌렸다.

“아니면 여전히 소가주려나? 뭐, 나한테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스스슥!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혈마가와 신성마가의 장로들이 움직였다.

야율천과 섭율만큼은 어떻게든 지키겠다는 듯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자신들만으로는 반호진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크아아악!”

“으억!”

게다가 적은 반호진 한 명만이 아니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비명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장로들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졌다.

“도망칠 거면 해. 단, 할 수 있다면.”

“공격해!”

“달려들어!”

평소에는 서로를 보면 으르렁대기 바빴던 신성마가와 진혈마가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두 곳 다 소가주인 섭율과 야율천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힘을 합쳤다.

단독으로는 반호진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힘을 합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호위무사들이 야율천과 섭율을 데리고 장내를 떴다.

“실망이야.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말도 이제는 옛말인가. 적어도 마교주는 불리하다고 해서 도망치지는 않았는데 말이지.”

“닥쳐라!”

비꼬는 반호진의 말에 진혈마가의 장로 중 한 명이 노성을 터트렸다.

속을 긁는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평정심이 흔들린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야율천은 자격이 없어. 마교주가 될 자격이 말이지.”

“끄륵!”

대노하며 달려들던 작달막한 키의 노인이 두 눈을 부릅뜨며 양손으로 목을 움켜잡았다.

목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에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그러나 반호진의 검격은 이미 지나간 뒤였다.

푸하학!

말끔하게 베인 목에서 피가 솟구치며 노인의 머리가 등을 타고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이게 시작이었다.

반호진은 가로막은 마인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렸다.

어느 누구도 반호진의 일검을 받아 내지 못했다.

“마, 막아라!”

반호진이 강하다는 건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의 차이는 컸다.

내심 숫자가 많기에 시간 정도는 충분히 벌 수 있다고 다들 생각했는데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 오지 마!”

전력질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안 가서 따라잡힌 야율천이 해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처음 봤을 때의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사라지고 겁에 질린 기색만 가득했다.

“그러니까 오지 말지 그랬어. 안 왔으면 이 꼴을 안 당했을 거 아냐? 신강에서 호화롭게 살았을 텐데.”

“…….”

“설마 항복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다른 이도 아니고 마교주의 아들이자 진혈마가의 후계자인데. 더욱이 부친을 죽인 자에게 항복한다고? 말이 안 되지, 암!”

야율천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최후의 방법으로 항복을 생각하고 있어서였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했다.

복수도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야율천은 내심 항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반호진이 이렇게 말하자 선뜻 꺼내기가 어려웠다.

“자, 잠깐……!”

“설사 항복한다고 해도 받아 줄 생각이 없어. 이제 와서? 절대 안 되지. 침공은 네놈들 마음대로 했지만 끝내는 건 아니야. 끝을 내는 건 나다.”

44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