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2장. 수호자(守護者). -03
까앙!
광혈단주의 두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소리에 당황한 것이었다.
그러나 놀란 것과 달리 후속 조치는 기민했다.
오른손이 막히기 무섭게 왼손을 거침없이 찔러 넣었다.
쉬이이익!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하나로 모인 조강이 송곳처럼 청년의 심장을 노렸다.
단숨에 심장을 꿰뚫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광혈단주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쩌어엉!
느릿하게 올라온 청년의 손이 그의 공격을 막아 내서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년의 손에는 아무런 기운도 서려 있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수기(手氣)조차 서리지 않은 맨손으로 자신의 조강을 막아 내자 광혈단주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청년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왼손을 움직여 조강을 움켜쥐었다.
까드드득!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보통이라면 조강에 닿는 즉시 잘려 나가는 게 정상이었다.
한데 청년의 손은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조강이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무, 무슨……!”
다른 이도 아니고 자그마치 광혈단을 이끄는 자신의 강기였다.
그런 조강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우그러지는 광경에 광혈단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떴다.
“미친놈이라 기억력도 딸리는 모양이야. 보통은 날 보면 꽁지 빠지게 도망치기 마련인데. 설마 광기가 뇌를 잠식한 건가?”
“무슨 개소리를……!”
“개소리는 네가 하는 거고. 개새끼가 지껄이는 게 개소리지.”
“이 새끼가!”
말하는 도중에 반호진이 치고 들어오자 광혈단주의 혈안(血眼)에서 지독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당장이라도 반호진을 천참만륙 낼 살기가 쏘아졌다.
하지만 광혈단주의 가공할 살기에도 반호진은 무표정하게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말 대신 힘으로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쩌저저적!
이윽고 반호진의 아귀힘에 광혈단주의 조강이 으스러졌다.
너무나 허무하게 부서지는 광경에 광혈단주가 반사적으로 왼손을 움직였다.
순간적으로 섬뜩함을 느끼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이었다.
꾸욱.
그러나 뱀처럼 미끄러지듯이 움직였음에도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보지도 않고 반호진이 그의 왼손을 튕겨 내고는 그대로 오른손을 뻗어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광혈단주를 살짝 들었다가 땅바닥에 메다꽂았다.
쿵!
“커헉!”
말 그대로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광혈단주는 어안이 벙벙했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였다.
나이 지긋한 천하십대고수도 아니고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반호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실에 광혈단주는 어이가 없었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광혈단주인데 그 정도 근성은 있어야지. 그래야 두들겨 패는 맛이 있지 않겠어?”
“감히……!”
“감히라는 말은 말이야. 나 같은 사람이 쓰는 거다. 정신 줄을 놓은 미치광이가 쓰는 게 아니라.”
짜아악!
무미건조해서 더욱 소름 끼치게 느껴지는 목소리와 함께 반호진의 왼손이 시원스럽게 허공을 가르며 광혈단주의 뺨에 작렬했다.
묘하게 찰진 소리와 함께 광혈단주의 안면을 강타했던 것이다.
“끄윽!”
“뒈지기 전에는 정신을 차릴지 모르겠군. 뭐, 상관없나.”
반호진의 시선이 북서쪽으로 향했다.
그와 일행들이 광혈단을 붙잡고 있는 사이 거동이 가능한 천하십대고수들은 퇴각하는 마교의 후미를 공격했다.
절대 순순히 보내 주지 않겠다는 듯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거기에 제갈문곡의 신들린 지휘까지 합쳐지자 마교의 진영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으아아아! 감히 애송이 따위가!”
손바닥에 이어 손등으로 반대쪽 따귀를 맞은 광혈단주가 악을 질렀다.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자신을 무시하자 대노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양손을 움직여 반호진의 오른팔을 움켜쥐었다.
이대로 팔을 뜯어 버리려는 것이었다.
부르르르!
하지만 아무리 힘을 써도 반호진의 오른팔은 멀쩡했다.
오히려 광혈단주의 양팔이 애잔할 정도로 떨렸다.
“애송이라. 오랜만에 듣는 말인데. 근데 내가 애송이면 애송이 하나 어쩌지 못하는 넌 뭐지? 그냥 병신인가?”
까드득!
반호진의 이죽거림에 광혈단주의 두 눈이 터질 것처럼 충혈되었다.
그러나 안간힘을 써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강철조차 두부 자르듯이 자를 수 있는 그의 손가락이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팔뚝 하나 어쩌지 못하자 광혈단주는 답답하고 미칠 것 같았다.
그러던 순간 광혈단주의 뇌리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검……신?”
“이제야 알아보는 건가?”
흠칫!
긍정하는 말에 광혈단주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가슴은 물론이고 머리까지 치솟았던 분노 역시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소림검신이라는 네 글자에 작금의 상황이 전부 다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자신이 호랑이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고 성질을 부렸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떻게, 이곳에?”
“미친놈이라서 그런가. 주변이 안 보이는 모양이야.”
“허억!”
반호진의 말에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던 광혈단주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뒤늦게 길쭉한 장대 끝에 매달린 마교주의 수급을 본 것이었다.
일부러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일 장이 넘는 길이의 장대였는데 그 끝에 허탈한 표정을 지은 채로 목이 잘린 마교주의 머리가 매달려 있었다.
“이제는 너 혼자 남았군.”
“젠장…….”
이제야 주변을 살펴본 광혈단주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반호진의 말대로 지금 살아 있는 이는 그 혼자뿐이었다.
수하들은 모조리 시체가 되어 차가운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너도 곧 가겠지만.”
“니미, 혼자 죽지는 않는다!”
“그건 네 생각이고.”
쩌어억!
울부짖던 광혈단주의 몸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허공에 떠 있던 소천검이 벼락같이 내리꽂혀 광혈단주를 양분한 것이었다.
마치 낙뢰처럼 떨어져 내리는 일격에 광혈단주는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그 역시 초마경에 오른 고수였지만 반호진은 격이 달랐다.
“어……? 어……?”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모양인지 광혈단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조차도 얼마 가지 못했다.
눈동자에서 초점과 빛이 사라진 광혈단주의 육신이 양쪽으로 힘없이 허물어졌다.
후우웅.
그리고 그 사이로 떨어졌던 소천검이 다시 떠올랐다.
반호진의 앞으로 서서히 다가왔던 것이다.
스윽.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얌전히 앞으로 돌아온 소천검을 회수한 반호진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도주하고 있는 마교의 진영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잠깐 사이에 점이 될 정도로 거리가 멀어져 있었지만 반호진은 담담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웅웅웅웅!
활짝 펼쳐진 오른손 위로 눈부시게 찬란한 황금빛 광채가 솟구쳤다.
바로 기형검이었다.
완벽한 검의 형상을 한 기형검이 반호진의 손바닥 위에서 묵직한 검명을 토해 내며 잘게 떨었다.
반호진은 그 기형검을 가볍게 던졌다.
쌔애애액!
그러나 가벼운 손놀림과 달리 허공을 가르는 기형검이 쏟아 내는 파공음은 무시무시했다.
그만큼 가공할 속도로 마교의 진영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각하던 마교의 진영 정중앙에 기형검이 떨어졌다.
쿠아아앙!
지면과 충돌한 즉시 기형검이 폭발했다.
다수를 날려 버리기 위해 반호진이 일부러 폭발시킨 것이었다.
“우와…….”
“미쳤다.”
“어마어마하네.”
굉음도 굉음이지만 거대한 폭발이 치솟는 광경에 반호진의 곁으로 다가오던 서조운, 모용척, 선우방이 입을 쩍 벌렸다.
두 눈으로 보고도 위력이 믿기지 않아서였다.
강환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위력에 세 사람과 정이륭, 사마의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놓쳤네.”
“누구요?”
“야율천과 섭율. 초입이기는 해도 꼴에 초마경이라는 건가.”
반호진이 입맛을 다셨다.
숫자를 줄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역시 가장 큰 목표는 야율천과 섭율이었다.
현재 가장 강한 전력이기도 하거니와 마교의 다음 세대를 이끌 두 사람이었기에 반호진은 잡을 수 있을 때 잡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둘은 얄밉게도 기형검의 기운을 느끼기 무섭게 거리를 더욱 벌렸다.
“눈치가 빨라 보이기는 했어요.”
“그러게. 뭐, 기회는 다음에도 있으니까.”
“역시 가실 생각이시죠?”
안색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서조운의 두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가장 큰 은혜를 입은 건 반호진이지만 소림사에게 받은 은혜 역시 적지 않았다.
담현이 축융신공의 사본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그는 있을 수가 없기에 서조운도 반호진만큼이나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가야지. 시작은 마교가 했지만 끝은 내가 낼 거야.”
“저도 함께할게요.”
“나 역시.”
“저도요.”
“저도 복수하고 싶습니다.”
서조운을 시작으로 선우방과 모용척, 정이륭이 살벌한 눈빛으로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마교를 노려봤다.
***
해가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는 시각에 정천맹의 무인들이 움직였다.
제갈문곡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근데 진영이 묘했다.
문파 간의 간격이 상당히 넓었다.
“모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마교의 반응은?”
“아직까지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고 개방에서 전해 왔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제갈문곡이 턱을 쓰다듬었다.
서둘러 마교를 추격한 만큼 상대가 정천맹의 위치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하자 제갈문곡은 미간을 좁혔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을 겁니다. 마교 입장에서는 공동산에서 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유마가 죽었다고 하나 구유마가의 전력이 사라진 건 아니다. 또한 귀영마가 역시 구유마가처럼 움직일 수 있어.”
아들인 제갈기정의 말에도 제갈문곡은 고개를 저었다.
패배를 상정하지 않은 건 맞을 터였다.
하지만 마교는 절대 어수룩한 단체가 아니었다.
패도를 숭배한다고 해서 미련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확실히 두 마가가 마음먹고 움직이면 감지하기가 쉽지 않기는 합니다.”
“거기다 현재 곤륜산은 마교의 영역이다. 과거의 곤륜산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갈기정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더욱이 곤륜산은 신강하고도 가까운 만큼 지금 당장 지원군이 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개방이 감시하고 있다고 하나 언제라도 뚫릴 수 있어. 그 점을 감안해야 해. 어쩌면 해가 뜨기 직전인 지금이 가장 위험할 수도 있어.”
제갈문곡이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곤륜산을 올려다봤다.
중원의 영산답게 안개가 자욱하게 뒤덮인 곤륜산의 풍경은 신비로웠다.
그러나 역시 가장 신비로운 존재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반호진이었다.
“일망타진(一網打盡)할 수 있겠죠?”
“최대한 노력해 봐야지. 이번이 아니면 다음 기회는 없으니.”
“묘강과 서장, 북해에 갔던 것처럼 신강에 가는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네가 갈 것이냐?”
“…….”
제갈기정이 입을 다물었다.
천하십대고수도 아닌 그가 가면 개죽음을 당할 게 분명했다.
아니, 원정대에 끼워 주지도 않을 터였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에 제갈기정은 얼굴을 붉혔다.
“그러니 현재 할 수 있는 걸 확실하게 하면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제갈기정을 일별한 제갈문곡은 시선을 옮겨 반호진을 쳐다봤다.
그러자 오래전 꾹꾹 눌러 놓았던 아쉬움이 다시금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쉽구나.’
제갈문곡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제갈세가 역시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포기했고,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남궁세가, 사천당가, 하북팽가가 지닌 명성에 지레 포기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제갈문곡은 자책했다.
“시작하시죠.”
“알겠습니다.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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