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2장. 수호자(守護者). -02
비명인지 괴성인지 구분이 안 가는 소리와 함께 적멸단주가 달려들었다.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반호진을 향해 도를 휘둘렀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단전에 남아 있던 모든 공력을 쥐어짜 강환을 생성시켰다.
말 그대로 이번 공격에 사활을 건 것이었다.
쌔애애액!
혼신의 힘을 다한 참격과 함께 수십 개의 강환들이 반호진에게 쇄도했다.
그리고 그중 몇 개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반호진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주변으로 흩어졌다.
참격과 선두의 강환으로 반호진의 시선을 가리고 다른 이들을 노린 것이었다.
스윽.
하지만 적멸단주의 얕은수에 넘어갈 반호진이 아니었다.
진즉에 그의 속셈을 꿰뚫어 봤기에 반호진은 기형검을 생성해 가볍게 좌에서 우로 그었다.
그러자 섬뜩한 파공음을 일으키며 쇄도하던 도강과 강환들이 일제히 반으로 갈라졌다.
쩌어억!
반호진에게 쇄도하는 것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로 날아가던 강환들까지 말이다.
그 모습에 적멸단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상대가 반호진이라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최후의 일격이 파훼될 줄은 몰랐기에 적멸단주는 순간적으로 넋을 잃었다.
푹!
그 틈을 반호진은 놓치지 않았다.
여전히 적멸단주의 지근거리에 박혀 있던 소천검을 이용해 이기어검을 펼쳐 아랫배를 꿰뚫었다.
“컥!”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단전을 관통하는 일격에 적멸단주가 신음을 흘리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당해도 너무 허무하게 당해서였다.
덥석.
그러나 적멸단주의 굴욕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반호진은 그의 목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분질렀다.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이 너무나 쉽게 적멸단주를 끝장냈다.
“허어……”
그 압도적인 광경에 지켜보던 무인들이 입을 쩍 벌렸다.
전장에서 사신처럼 군림하던 적멸단주를 너무나 쉽게 처치하자 다들 경악한 것이었다.
반호진이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나 격차가 날 줄은 몰랐기에 다들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반면에 서조운을 비롯한 일행들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툭.
이윽고 축 늘어진 적멸단주의 시체가 허물어지듯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반호진이 짐짝 다루듯이 적멸단주를 버린 것이었다.
그러고는 이내 도망치는 적멸단을 향해 몸을 날렸다.
쑤아아앙!
하지만 반호진보다 먼저 소천검이 움직였다.
가공할 기운을 머금고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쏘아지듯 날아갔다.
한줄기 유성처럼 하늘 높이 솟구쳤던 소천검은 이내 적멸단의 중앙 부근에 떨어져 내렸다.
꽈아아앙!
그 결과 적멸단의 대부분이 육편으로 화했다.
그럼에도 반호진은 서늘한 눈빛으로 다음 목표를 향해 이동했다.
“사천당가와 무당파는 빠르게 이동하여 양쪽을 포위하여 주십시오! 개방은 적들이 퇴각하는 속도를 최대한 늦춰 주십시오! 무리해서 싸울 필요는 절대 없습니다! 시간을 끄는 게 목적입니다! 지연에 집중하여 주십시오!”
총군사나 다름없이 정천맹을 지휘하던 제갈문곡이 목이 터져라 지시를 내렸다.
무경이 깊다면 시끄러운 전장의 소음에 방해받지 않고 다수에게 한 번에 전음을 보내겠으나 안타깝게도 제갈문곡의 무공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최대한 크게 소리쳤다.
물론 그럼에도 먼 곳까지는 그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가주님의 지시를 전달해!”
“예!”
그래서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필요했다.
제갈문곡이 내린 지시를 전장 곳곳에 자리 잡은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전달받아서는 그대로 먼 곳으로 전했다.
이 체계는 철혈성의 전쟁에서부터 시작했기에 이제는 완전히 자리를 잡아 제갈문곡의 뜻대로 완벽하게 몰이사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돼.’
제갈문곡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패색이 짙었던 전투가 전대고수들과 담현의 희생으로 뒤집어졌다.
말 그대로 희생 덕분에 반전이 일어난 만큼 제갈문곡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혈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대로 마교의 잔당들을 살려 보내면 힘을 비축해서 또다시 중원을 노릴 게 분명하기에 전력을 줄일 수 있을 때 최대한 줄이는 게 좋았다.
“야율천과 섭율을 잡아야 합니다!”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났고, 중요한 건 적의 전력을 더 깎아 내는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중원을 위한 일이었기에 제갈문곡은 우선순위를 명확히 했다.
추후 마교를 이끌어 갈 이들이 야율천과 섭율이었기에 두 사람만큼은 반드시 죽일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나머지 십마룡도 전부 죽여 싹을 확실히 밟고자 했다.
“알겠습니다!”
“본녀도 가겠어요.”
“저 역시 가겠소이다!”
제갈문곡의 외침에 성중경과 보타문의 검후, 해남파의 장문인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세 사람 다 야율천과 섭율이 마교 다음 세대의 핵심임을 잘 알았기에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었다.
뒤이어 청성파와 아미파를 비롯한 구파일방이 일제히 이동했다.
특히 개방의 움직임이 가장 격렬했다.
“태상방주님의 복수를 해야 한다!”
“한 놈이라도 더 때려잡아!”
“죽여! 죄다 때려죽여라!”
개방도들의 선두에는 오중건이 있었다.
사부인 개왕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도했기에 오중건은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차가운 얼굴과 눈빛으로 마인들을 죽였다.
수다스러울 정도로 말이 많던 그가 지금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살수(殺手)를 뿌리기만 했다.
“아, 악마……!”
“닥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오중건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한 명이라도 더 죽이겠다는 듯이 지독한 살기를 온몸으로 발산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오중건의 모습을 보고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오중건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아미타불.”
“싹 다 죽여라!”
그리고 미쳐 날뛰는 건 개방만이 아니었다.
방장인 담현의 죽음에 소림사의 무승들 역시 비분강개(悲憤慷慨)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살계를 열었다.
태상가주인 당비를 잃은 사천당가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고.
하지만 가장 무서운 곳은 누가 뭐래도 반호진이 있는 곳이었다.
“으음!”
이기어검 단 한 방에 이백여 명이 넘는 적멸단원들이 처참한 육편으로 화하는 광경에 제갈문곡은 자기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져서였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살수를 뿌리는 건 반호진만이 아니었다.
법무 역시 야율천을 놓쳤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마교도들을 도륙했다.
“피로 원한을 달래리라!”
“감히! 감히!”
거기에 공동파와 속가제자들이 가세했다.
공동산을 수복하는 것도 수복하는 것이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중요한 건 사형제들의 복수였다.
그래서인지 특히 공동파와 속가문파들의 제자들은 살인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살기와 광기를 발산하며 마인들을 미친 듯이 학살했다.
“추격을 해야 하는데…….”
그 광경을 보던 제갈문곡이 말끝을 흐렸다.
지금까지 당한 걸 모조리 되갚아 주겠다는 듯이 달려드는 건 그로서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중원에 침공했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 당연했다.
근데 문제는 퇴각하는 마교의 속도가 상당하다는 점이었다.
“……힘들겠어.”
분명 승기는 정천맹으로 넘어왔고 사기 역시 충천한 상태였다.
한데 문제는 모두가 지쳤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승리에 도취되어 지친 것도 모르고 날뛰지만 제갈문곡의 눈에는 보였다.
얼마 안 가서 탈진할 거라는 게 말이다.
스윽.
그래서 제갈문곡은 천하십대고수들을 비롯해서 검후와 해남파 장문인, 성중경, 법무를 차례대로 바라봤다.
승리하기는 했으나 정천맹의 피해 역시 막심한 상태였다.
상처뿐인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대대적인 추격대를 구성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고수로 이루어진 소수정예를 보내야 하는데 천하십대고수들의 몸 상태가 썩 좋지 못했다.
‘그렇다고 반 문주에게 부탁할 수도 없고.’
이미 수많은 짐을 짊어졌던 무인이 반호진이었다.
나이를 떠나 제갈문곡이 순수하게 존경하는 이가 반호진이기도 했고.
더욱이 이번 전투에서는 사부인 담현마저 잃었다.
그렇기에 제갈문곡은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지.’
말은 하지 않아도 제갈문곡의 눈에는 보였다.
마교를 상대로 분풀이를 하는 반호진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말이다.
동시에 반호진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유일하게 마교주와 자웅을 겨룬 이가 반호진이었기에 다들 경외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아둔한 이들은 반호진이 다음 세대를 이끌 무인이라고 평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미 중원 제일의 고수는 반호진이었다.
더해서 앞으로도 그럴 터였고.
즉 지금부터가 반호진의 시대라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쯤에서 만족해야 하나.’
제갈문곡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천고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안타깝게도 여력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염치없이 반호진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기에 제갈문곡은 욕심을 버렸다.
피해 상황을 파악하며 전력을 수습할 필요가 있기도 했고.
“제갈가주님.”
“반 문주님.”
생각을 정리하며 내심 결정을 내렸을 때 제갈문곡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 틈에 온 것인지 그의 곁에 반호진이 내려섰던 것이다.
그런데 찾아온 이는 반호진 혼자만이 아니었다.
의형제라 할 수 있는 일행들 모두가 모여 있었다.
“추격하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예. 기회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제갈문곡이 말끝을 흐리며 반호진의 표정을 살폈다.
이렇게 먼저 말해 주어서 너무나 고맙지만 그래도 그는 염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부탁하는 게 얼마나 몰염치한 짓인지 알았기에 냉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주께서 무엇을 신경 쓰시는지 압니다. 근데 괜찮습니다.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치 속을 긁어 주듯 말해 주는 반호진의 말에 제갈문곡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배려해 주었음을 모르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솔직히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전투는 끝났으나 아직 전쟁이 끝난 건 아니었다.
“뒤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 주시지요.”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제갈문곡이 대답하자 반호진도 한 차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목표물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광혈단주였다.
미친개라는 별명답게 죽음이 두렵지 않은 모양인지 광혈단주는 수하들과 함께 후미에서 날뛰며 마교의 병력이 퇴각하는 시간을 벌어 주고 있었다.
“우리도 간다!”
“물론이죠!”
“저도 갑니다!”
광혈단주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반호진의 뒤를 선우방과 모용척, 서조운이 뒤따랐다.
그리고 그 뒤를 선우세가와 모용세가가 받쳤다.
부상자를 제외한 모두가 광혈단에게 달려들었다.
“원시천존!”
“아미타불!”
거기에 천하십대고수들도 속속들이 합류했다.
그 결과 퇴군하는 마교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아무리 부상당했다고 하나 한 명 한 명이 천하십대고수였다.
게다가 마교주를 비롯해서 구마가 전부 죽었기에 수뇌부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마교의 피해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감히 버러지 따위가!”
쑤아아앙!
거대한 곰과 같은 우람한 체구를 가진 광혈단주가 양손을 거칠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양손에서 솟구친 조강(爪罡)이 사방을 휩쓸었다.
무려 일 장이나 솟구친 조강이 주변을 할퀴자 정천맹의 무인들이 처참하게 갈라졌다.
절정고수들조차 속수무책으로 사지가 잘려 나가며 즉사했다.
“크큭! 크하하하!”
그 모습에 광혈단주가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마교주와 구마가 죽고 다른 사단의 단주들도 하나둘 쓰러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지금의 살육을 즐기겠다는 듯이 광기를 온몸에서 줄기줄기 흘리며 정천맹을 공격했다.
툭.
그런 광혈단주의 앞에 한 명의 사내가 내려섰다.
군데군데 핏자국이 묻은 흑의무복을 입은 청년이었는데 그가 내려서기 무섭게 광혈단주가 달려들었다.
새로운 먹잇감의 등장에 망설이지 않고 조강을 휘두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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