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2장. 수호자(守護者). -01
흐릿해져 가는 시야를 느끼며 담현이 힘겹게 말했다.
이제는 막내제자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형체는 보였다.
그렇기에 담현은 목소리에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이 말만큼은 꼭 남기고 싶어서였다.
꾸욱!
서서히 무뎌지는 손의 감각을 느끼며 담현은 눈을 감았다.
더 이상은 눈꺼풀을 뜰 힘이 남지 않아서였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애달프게 부르는 반호진의 목소리와 함께 의식이 끊어졌다.
“크흑!”
뚝. 뚝. 뚝.
반호진의 애절한 외침과 함께 일우를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처연한 얼굴로 눈물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들을 위해, 그리고 중원을 위해 희생한 담현을 위해서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명복을 빌었다.
“……원시천존.”
운상의 도호를 들으며 반호진은 몸을 일으켰다.
서서히 차가워지는 담현의 손을 놓기 싫었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움직여야 했다.
더해서 가슴속에서 치솟는 분노도 털어 내고 싶었다.
“방장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주님.”
반호진의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상일기가 먼저 말했다.
그런 상일기를 향해 반호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닙니다.”
“사부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담현만큼은 아니지만 상일기의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군데군데 깊은 상처가 있는 몸으로 결연하게 대답하자 반호진은 몸을 돌렸다.
이윽고 반호진에게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솟구쳤다.
지금껏 수많은 전장을 함께 다녔지만 이 정도로 살기를 드러내는 건 처음이었기에 상일기는 물론이고 남궁호와 당우혁, 일우와 운상이 크게 놀랐다.
휘이익!
적멸단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은 마교주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곧 모두가 알게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정천맹의 사기가 미친 듯이 오를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그 결과 전선이 순식간에 무너질 게 자명했다.
‘그 전에 살길을 찾아야 해!’
적멸단주의 두 눈에 다급함이 서렸다.
만마(萬魔)의 지존인 마교주는 죽었고, 십대마가의 수장들이자 마교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구마 역시 유명을 달리했다.
거기다 전면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부상을 입은 철마단주와 흑풍단주 역시 죽었다.
광혈단주가 특유의 광기로 어찌어찌 버티고 있긴 하나 그 끝은 명백했다.
‘나만이라도 살아야 한다.’
후방에 있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신강으로 향했겠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전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때문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방향을 정했다.
현재 이곳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라고 생각해서였다.
‘늦기 전에 한 명이라도 잡아야 해! 최대한 많이 사로잡으면 더 좋고!’
현재 정천맹에서 가장 강하고 영향력이 있는 무인은 누가 뭐래도 반호진이었다.
즉 그를 공략해야지만 생존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래서 적멸단주는 사마의성이 있는 곳을 노렸다.
사마의성을 중심으로 선우세가와 모용세가도 진을 치고 있기에 한꺼번에 생포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전부 쓸어버려라! 검신의 의형제를 사로잡아야 우리가 살 수 있다!”
“예!”
적멸단원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호진의 의형제들을 생포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마교주의 죽음으로 이미 전세는 기울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다들 기를 쓰고 길을 열었다.
“마, 막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서서히 괴멸해 가는 다른 사단들과 달리 적멸단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파고들자 선우세가와 모용세가의 무인들이 기겁하며 집결했다.
사마의성도 중요하지만 그녀보다는 선우방과 모용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차기 가주이자 가문의 후계자가 두 사람이었기에 모용세가와 선우세가의 무인들은 물론이고 가주인 모용궁과 선우청도 앞장서서 적멸단을 막았다.
“크아악!”
“그륵!”
하지만 절실함으로 따지자면 적멸단도 만만치 않았다.
인질을 잡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죽는 게 확실했기에 적멸단원들은 적멸단주가 독촉하지 않아도 악착같이 싸웠다.
“어딜 감히!”
“적멸단을 막아라!”
그러나 적멸단은 마음과 달리 많이 이동하지 못했다.
사마의성을 비롯해서 서조운과 정이륭은 정천맹 진영 깊숙한 곳에 있었고, 적멸단이 움직이자마자 소림사와 속가문파들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게다가 사마의성도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적멸단의 목적을 단숨에 파악하고는 순식간에 뒤로 물러났다.
“무리해서 싸우지 마세요! 버티면 우리가 이깁니다! 이미 전세는 기울었어요!”
사마의성의 목소리에 흥분하던 무인들이 차분해졌다.
그들이라고 전황을 모르지 않았다.
방금 전 일우가 마교주의 수급을 들어 올리는 걸 모두가 봤기에 순순히 사마의성의 지시에 따랐다.
마교주가 죽은 이상 전쟁의 승패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어서였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얼른 뚫지 못해?! 다들 이곳에서 뒈지고 싶은 거야!”
지지부진한 상황에 적멸단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단숨에 돌파해서 사로잡아도 모자랄 판에 좀처럼 나아가질 못하자 답답해하는 것이었다.
반호진도 반호진이지만 살아남은 천하십대고수들이 달려올 수도 있기에 적멸단주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면서 빠르게 전장을 살폈다.
‘두 사람이 최대한 시간을 끌어 준다면…….’
잽싸게 전장을 훑던 적멸단주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내심 정천맹의 시선을 끌어 주길 기대하던 야율천과 섭율이 진혈마가와 신성마가의 마인들을 이끌고 북서쪽으로 퇴각하는 게 눈에 들어와서였다.
그 뒤를 반파되다시피 한 흑풍단과 철마단이 따르자 적멸단주는 순간 입술이 바짝 말라왔다.
머릿속에 고립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라서였다.
‘빌어먹을. 이렇게 된 이상 기호지세다. 물러나 봤자 저쪽을 도와주는 꼴밖에 안 돼. 지금으로서는 어떻게든 인질을 손에 넣어 안전을 확보해야 해.’
적멸단주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째 분위기가 점차 악수를 택한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으나 이제 와서 결정을 돌리기에는 늦었다.
그렇다면 남는 건 하나뿐이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일단은 한 명이다. 한 명만 확실하게 사로잡으면 살 수 있다.’
애초부터 자구책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고민은 무의미했다.
적멸단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마의성을 쳐다봤다.
무공이 뛰어난 다른 의형제들과 달리 그녀의 수준은 형편없었기에 가장 만만했다.
휘이이익!
처음의 계획은 서조운과 선우방, 모용척, 정이륭, 사마의성을 전부 생포하는 것이었지만 상황이 변했다.
돌파는 지지부진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적들은 모여들고 있었다.
그렇기에 적멸단주는 계획을 변경했다.
모두 다 잡을 수 없다면 일단 한 명이라도 확실하게 사로잡기로 마음먹었다.
“어딜!”
“더는 못 간다!”
쌔애애액!
노리는 바가 너무나 명백했기에 적멸단주의 앞으로 유호량과 모용궁, 선우청이 달려들었다.
적멸단주를 쓰러뜨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막을 수는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앞서 사마의성이 말한 대로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유리한 건 이쪽이었다.
게다가 계속된 전투로 적멸단주 역시 지쳐 있을 것이기에 세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차합!”
“아미타불!”
거기에 무당파와 소림사의 장로들도 합세했다.
사마의성이 인질로 붙잡히는 것을 막는 것과 동시에 적멸단주를 처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힘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힘을 합쳐 협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튕겨 나가는 건 적멸단주가 아니라 그들이었다.
쿵! 쿵! 쿵! 쿵!
그나마 유호량이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내상이 심각한 모양인지 앙다문 입술 사이로 시뻘건 피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적멸단주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무명에 불과한 유호량이 아무리 다른 이들과 힘을 합쳤다고 하나 자신의 참격을 버텨 내자 그는 벌게진 얼굴로 재차 도를 휘둘렀다.
“감히!”
거력을 머금은 도강이 벼락같이 쇄도했다.
유호량을 단숨에 쪼갤 기세로 쭉 뻗어 나갔던 것이다.
그 광경에 선우청과 모용궁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움직이고 싶어도 몸에 남은 충격으로 인해 움직일 수가 없었기에 둘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쩌억!
그때 눈부신 섬광이 번쩍였다.
허공에서 한줄기 금광이 번뜩이며 유호량은 물론이고 사마세가의 무인들까지 한 번에 양분할 기세로 뻗어 가던 적멸단주의 참격을 찢었다.
쿠우웅!
그뿐만 아니라 도강을 가르고도 힘이 남은 모양인지 빛살은 그대로 적멸단주에게 날아갔다.
그러나 적멸단주에게 닿지는 못했다.
정확히 장정의 한 발자국 정도의 거리를 남겨 두고서 땅에 박혔다.
꿀꺽!
한데 적멸단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잔뜩 겁에 질린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벅저벅.
석상이라도 된 것마냥 적멸단주가 가만히 서 있을 때 묘하게 소름 끼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느릿한데 이상하게도 귀에 쏙쏙 박히는 듯한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근원지로 향했다.
“오빠! 아니, 문주님!”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반호진의 모습에 사마의성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제아무리 적멸단주가 무서운 고수라고 하나 반호진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였다.
감히 비교할 수가 없었기에 사마의성은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 피해라!”
“으아아아!”
한편 반호진의 등장에 적멸단원들은 언제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냐는 듯이 몸을 돌렸다.
마교주보다는 약하지만 중원제일의 고수가 반호진이었다.
그 대단하던 마교주와도 거의 대등하게 손속을 겨룬 이가 반호진이었기에 적멸단원들은 감히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덤벼들어 봤자 불꽃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죽을 게 뻔했기에 다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도주를 택했다.
꿀꺽!
하지만 적멸단주는 그럴 수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치는 게 불가능했다.
이기어검이 도강을 찢어 버리고 땅에 박힌 순간부터 그는 몸이 통제가 되지 않았다.
반호진에게서 흘러나오는 지독한 살기가 그를 옥죄고 있어서였다.
“고생했다.”
“아니에요. 그보다…….”
느릿하게 다가왔지만 누구 하나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 정도로 반호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은 압도적이었다.
지금껏 봐 왔던 반호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반호진의 전신에서는 가공할 패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마의성은 감탄보다 슬픈 눈으로 반호진을 걱정했다.
“얘기는 전투가 끝난 후에 하자꾸나.”
“네.”
사마의성이 공손히 대답했다.
지금 반호진의 마음이 어떨지 모를 수가 없기에 고분고분하게 대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반호진이 어째서 이토록 분노하는지 모를 수 없었기에 다들 말을 아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살고 싶다는 말이 나와?”
“저, 저는. 아니, 소인은 그저…….”
사단 중 한 곳인 적멸단의 단주이자 마교 내의 서열이 십오 위 안에 들어가는 대마두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 대단한 존재가 반호진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초마경에 오른 절대고수가 그였지만 감히 반호진과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붙는 순간 자신이 무조건 죽을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마교주가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그, 그렇습니다!”
“하긴. 그랬을 수도 있지.”
적멸단주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쩌면 대화로 잘 풀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반호진의 말에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근데 문제는 네 손에 죽은 사람들이 많다는 거야. 그중에는 소림사의 제자들도 있지.”
적멸단주의 몸이 떨렸다.
지금의 발언으로 반호진이 그를 살려 둘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 뭐라도 해야……!’
마교주와 구마 바로 아래 서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이지만 지금은 뱀 앞의 개구리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뿐인데도 적멸단주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거기다 감히 내 동생들을 노리기까지 했지.”
“으아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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