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0장. 선배의 몫. -02
검마의 동공이 서서히 커졌다.
그 정도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검마는 놀랐다.
“영광으로 알도록. 장문인과 검을 겨룰 수 있다는 사실에.”
“설마하니 당신이 나올 줄이야.”
“허허허. 빈도 정도면 그대의 상대로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오.”
“검왕이라면, 부족하지는 않지.”
검마는 순순히 인정했다.
다른 이면 몰라도 검왕 운상이라면 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반호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중원제일검의 자리에 있던 대검호가 바로 운상이었다.
검의 경지는 반호진이 높을지 몰라도 깊이만 따지면 운상이 위일 것이었다.
“부족이라니. 오히려 차고 넘치지.”
“그 정도는 아니다. 가까스로 어울리는 정도지.”
검마가 싸늘한 눈빛으로 정정했다.
이것만큼은 절대 인정할 수 없어서였다.
“뭐, 생각은 자유니까.”
“내가 두렵다면 둘이서 협공해도 된다. 중원은 늘 그래 왔지 않더냐.”
이번에는 검마가 대놓고 도발했다.
과거를 거론하면서 말이다.
그 말에 웬만해서는 감정 기복이 없는 운상이 얼굴을 굳혔다.
지금의 발언은 도발을 넘어 모욕적이어서였다.
“협공은 마교 쪽에서 할 것 같은데. 다들 당장이라도 이곳으로 올 기세인데?”
“…….”
검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어서였다.
반호진과 운상이 나란히 서 있자 사단의 단주들이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음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나에게 검왕을 보낸 걸.”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장문인을 너에게 보낸 게 아니다. 장문인께서 널 상대해 주는 거지.”
빠직!
검마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자그마치 검마라 불리는 자신을, 마교주를 제외하면 제일 강한 자신을 면전에서 무시하자 결국 인내심이 끊어진 것이었다.
후우우웅!
그로 인해 검마의 전신에서 살벌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서릿발 같은 살기가 폭발적으로 솟구치며 주변을 잠식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가공할 살기에도 반호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대신 더 이상 검마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며 땅을 박찼다.
“반호진!”
“원시천존. 그대의 상대는 빈도요.”
으득!
무심히 멀어지는 반호진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던 검마가 핏발 선 눈으로 운상을 노려봤다.
반호진에게 쏘아 보낸 살기를 운상이 가벼운 손짓으로 흩트리며 자연스럽게 앞을 가로막아서였다.
“그러니 빈도와 어울려 봅시다. 중원의 검이 소림에만 있지만은 않기도 하고.”
“좋다. 그렇게 이 몸의 검을 보고 싶어 하니 보여 주지. 대신 그 대가는 당신의 목이야.”
“할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쩌어어엉!
자신을 죽이고 반호진을 잡으러 가겠다는 듯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흩뿌리며 검을 휘두르는 검마에게 태극혜검으로 응수하며 운상이 눈을 빛냈다.
그는 결코 검마를 막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니었다.
검마를 잡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었기에 운상은 진지한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그 결과 대지와 하늘이 찢어졌다.
휘이익!
한편 검마를 버리고 마교의 진영으로 빠르게 이동하던 반호진은 날카로운 눈으로 진영 전체를 훑었다.
마교주를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마교주로 의심되는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검마 이상의 무인이 작정하고 숨어 버리면 제아무리 반호진이라도 별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싸우고 있다면 그래도 찾아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마교주는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찾아내는 건 포기했다.
대신 생각을 달리했다.
찾을 수 없다면 자신을 찾아오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스윽.
생각을 바꾸기 무섭게 반호진은 고개를 돌렸다.
마교주가 그에게 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필요해서였다.
뻐어어엉!
표적을 찾아내기 무섭게 반호진은 방향을 틀었다.
물론 그냥 다가가지만은 않았다.
앞을 가로막는 마교도들을 말 그대로 밀어 버렸다.
“끄아악!”
“커헉!”
무지막지한 반호진의 검강에 전방에 있던 마교도들이 육편으로 화했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검격이었기에 반응하는 마교도가 없었다.
그나마 수준이 좀 높은 이들은 몸이 잘려 나가지 않았을 뿐 피를 토하며 죽는 건 똑같았다.
그저 육신의 형태를 제대로 남기느냐, 못 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마, 막아라!”
“소가주님께 가지 못하도록 막아!”
“검신을 막아!”
반호진의 검강이 향하는 곳은 명백했다.
오직 한 명을 향해서만 뿌려졌기에 진혈마가의 마인들이 기겁하며 반호진에게 달려들었다.
야율천을 보호하기 위해 반호진을 막아서려는 것이었다.
퍼퍼퍼펑!
물론 성공하는 이는 없었다.
또한 진혈마가의 마인들도 알았다.
자신들로는 반호진을 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로지 지연시키는 것에만 집중했다.
야율천이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반호진이 그 의도를 훤히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스극.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고 하는 진혈마가의 마인들을 향해 반호진은 검을 그었다.
간절함과 결연함 따위는 단숨에 찢어 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쩌어어억!
단순하기 그지없는 참격이었으나 그로 인한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달려들던 진혈마가의 마인들이 일제히 양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반호진은 그 사이를 유유히 가로질렀다.
“한 번 패배했다고 꼬리를 말면 쓰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교주의 아들이 말이지.”
“……반호진.”
“무서우면 아버지를 불러. 너 혼자서는 안 된다는 걸 너 스스로도 알고 있잖아?”
“목적은 아버지로구나.”
야율천이 이를 갈았다.
마지막 말에 반호진의 목적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어서였다.
“어쩔 수 없잖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는데. 그냥 시원하게 모습을 드러냈으면 내가 여기까지 안 왔지.”
“어리석게도 죽음을 자초하는군.”
“그렇게 말하니까 궁금한 거야.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하나같이 그딴 말을 지껄이는지.”
“네놈 따위가 감히 거론할 수 없는 분이시다.”
“글쎄. 그건 네 생각이지.”
어깨를 으쓱이는 반호진의 모습에 야율천이 은밀하게 주변을 살폈다.
인정하기 싫지만 반호진의 말이 맞았다.
아직 혼자서는 반호진을 상대하기가 버겁기에 야율천은 같이 싸울 수 있는 이를 찾았다.
‘섭율은 안 돼. 협공할 리도 없지만 설사 힘을 합친다고 해도 반호진을 잡을 수 없다.’
가장 가까운 곳에 섭율이 있었으나 야율천은 눈곱만큼도 감안하지 않았다.
이길 가능성도 없거니와 다른 이는 몰라도 섭율과는 협공할 마음이 전혀 없어서였다.
“그놈의 자존심은.”
야율천은 남몰래 살펴본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부처님 손바닥 안의 미후왕처럼 반호진은 야율천의 속내를 모조리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래서 야율천을 주시하며 혀를 찼다.
“제가 힘을 보태겠습니다, 소가주님.”
“철마단주!”
언제 반호진이 공격해 올지 몰랐기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야율천이 반색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한쪽 팔을 잃었지만 철마단주 역시 초마경에 오른 절대마인이었다.
게다가 경험으로 따지면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기에 야율천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철마단주를 불렀다.
“미안하지만 네놈의 상대는 나다.”
“투왕?”
“외팔이는 외팔이와 싸워야 어울리지 않겠어?”
철마단주의 동공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당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야율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이 순간에 일우가 나타날 줄은 몰랐기에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어째서?”
“말했잖아. 외팔이 상대로는 외팔이가 어울린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
“반 문주에게는 갚아야 할 빚도 있고.”
일우는 반호진에게 일절 시선을 주지 않고서 말했다.
아무리 그라도 이런 말을 입 밖에 꺼내는 건 민망했기에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고마워할 것 없네. 말 그대로 빚을 더 묵히기 싫어 나선 것뿐이니.”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일우의 모습에 반호진이 옅게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꼬장꼬장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많이 유순해졌다.
융통성도 늘었고.
“이거 결국 제자리가 되었네? 섭율은 해남파 장문인께서 상대해 주고 계시고.”
“…….”
야율천의 안색이 다시 해쓱해졌다.
믿었던 철마단주는 일우로 인해 그를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최후의 최후로 생각했던 섭율마저도 해남파 장문인 때문에 이쪽을 신경 쓸 수 없게 되자 야율천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온 셈이었기에 야율천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뛰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대로 어울려 보자고. 그게 싫으면 마교주를 부르든가.”
“소림검신이 당돌하다더니. 그 소문이 맞았군.”
부르르르!
멀리서 들려오는 선명하고 익숙한 목소리에 야율천이 몸을 떨었다.
부친의 음성에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드디어 나타났군.”
“나를 애타게 찾는 것 같아서 말이지.”
반호진의 시선이 야율천의 어깨를 지나 마교의 진영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구마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흑의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풍기는 기도가 무난했다.
딱히 특별한 존재감을 뿌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마교주와 눈이 마주친 순간 반호진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강하다.’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걸 느낀 반호진이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단순히 시선이 마주친 것뿐인데도 반호진은 알 수 있었다.
마교주가 정말 강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검마가 왜 이인자일 수밖에 없는지를 반호진은 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못난 자식이지만 꼴사납게 처맞는 걸 보고 싶지 않기도 하고. 나름 진혈마가의 소가주거든. 저 녀석이.”
“아, 아버지.”
“지금은 교주다.”
“죄송합니다!”
기합이 바짝 든 야율천의 모습이 일반적인 부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두 사람의 관계가 아니었다.
꼭꼭 숨어 있던 마교주가 모습을 드러낸 게 중요했다.
결국 전쟁은 마교주를 잡느냐, 잡지 못하느냐로 결판이 날 게 분명했다.
‘정말 끝까지 쉽지 않네.’
마교주를 주시하며 반호진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솔직히 검마는 어렵기는 해도 잡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마교주는 달랐다.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반대로 이길 수 있겠다는 확신 또한 들지 않았다.
‘그래도 싸워야 한다.’
중원무림을 위해서, 사문을 위해서, 친구들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해서 이겨야만 했다.
반호진은 마음을 다잡으며 소천검을 쥐었다.
꽈과과광!
“큭!”
파괴적인 기운이 잔뜩 실린 참격을 가까스로 막아 내며 팽만철이 신음을 흘렸다.
웬만해서는 신음 소리를 내지 않는 그이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상대의 일격은 강력했다.
“실망인데.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도왕이라니. 본교였다면 도왕은커녕 도성(刀星)도 안 될 실력인데.”
“닥쳐라!”
“네놈도 인정하는 모양이야. 흥분하는 꼴을 보면.”
“크아아아!”
대놓고 이죽거리는 도마(刀魔)를 향해 팽만철이 포효했다.
동시에 하북팽가가 자랑하는 절학이자 그를 천하십대고수로 만들어 준 혼원벽력도를 극성으로 펼쳤다.
그러나 팽만철과 달리 호리호리한 체격의 도마는 얄미울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쏟아져 내리는 도세를 피하며 참격을 뿌렸다.
찌이이익!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팽만철의 도세가 너무나 무참하게 갈라졌다.
놀랍게도 팽만철의 혼원벽력도가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으득!
그 사실에 팽만철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더욱 강하게 도격을 날렸지만 역시나 도중에 막혔다.
“안 된다니까.”
“흐하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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