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9장. 구마(九魔). -03
“으음!”
“……사부님.”
반호진이 알아차린 걸 다른 이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인지 곳곳에서 무거운 침음성이 들려왔다.
더불어 오중건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개왕을 바라봤다.
“그런 눈빛으로 볼 거 없다. 노개(老丐)도 엄연히 무인이다. 또한 개방의 일원이기도 하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더냐. 안 그렇소이까, 반 문주?”
“맞습니다.”
“검마는 어떻던가?”
“소문대로였습니다.”
“호오. 소문대로였다라.”
개왕이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구마를 상대했던 이들은 물론이고 일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이들 역시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강했습니다. 괜히 마교의 이인자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요.”
“이 노개가 보기에는 전대 북해빙궁주와 엇비슷해 보였는데 말이오.”
“더 젊은 걸 감안하면 전대 북해빙궁주보다는 검마가 위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은 상태이고요.”
“그건 반 문주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개왕이 능글맞게 웃었다.
여유가 없어 반호진과 검마의 대결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개왕 정도의 나이쯤 되면 잠깐만 봐도 얼추 느껴지는 게 있었다.
“서로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문제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마교주입니다.”
“맞네. 분명 와 있을 텐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으니.”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긴. 마교주 정도의 인물이 마음먹고 존재감을 숨기면 웬만한 무인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지. 나야 늙기도 했거니와 감각이 예전 같지 않으니. 어쩌면 초반부터 검마가 나선 게 반 문주의 시선을 가리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네.”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너무 티 나게 접근했기에 이런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검마 정도쯤 되니까 다른 구마들을 밀어내고 반 문주에게 간 것일 수도 있고. 어쨌거나 반 문주도 마교주로 의심 가는 인물은 못 봤단 말이지?”
“예.”
“흐음.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더 많구먼.”
개왕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짐짓 여유로운 척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마교의 전력도 강대한데 구마의 실력 역시 대단했다.
천하십대고수 중 반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할 정도로 말이다.
스윽.
씁쓸함 가득한 개왕의 말에 반호진의 시선이 일우와 팽만철, 당우혁, 황보태경을 지나 성중경과 법무에게로 향했다.
안 좋은 결과도 있지만 반대로 좋은 일도 있었다.
그리고 다섯 명은 구마와 단주들에게 밀렸지만 다른 다섯 명은 압도하지는 못했어도 우위를 점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밀린 게 사실이지만 아직 결판이 난 건 아닙니다. 앞으로의 상황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호사도 있기는 하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개왕의 시선이 반호진을 따라 움직였다.
그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절대고수가 부족한 마당에 둘의 성장은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다만 문제는 그럼에도 마교에 비해 전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네만.”
“그래도 해 볼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미래가 암담하다고 포기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으니까.”
“맞습니다.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니까요. 그리고 좋은 일은 더 있습니다.”
개왕과 반호진의 시선이 제갈문곡에게 향했다.
특히 좋은 일이라는 말에 점점 더 깊은 한숨을 내쉬던 수장들도 고개를 번쩍 들었다.
“좋은 일?”
“예. 해남파와 보타문이 합류했습니다. 두 곳 다 장문인과 문주께서 정예들을 이끌고 직접 오셨습니다.”
“검후가 왔구먼!”
“그렇습니다.”
개왕이 반색했다.
해남파도 명문대파이지만 보타문은 대대로 검후를 배출한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그렇기에 개왕은 물론이고 모두가 화색을 띠며 반가워했다.
“숙영지에 도착했다고 하니 곧 이곳으로 올 겁니다.”
“흘흘흘흘!”
다른 이들은 만난 적이 없으나 개왕은 달랐다.
특유의 방랑벽 때문에 중원에서 안 가 본 곳이 없는 개왕은 보타문의 수장인 검후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깨를 들썩였다.
검후와 해남파 장문인이라면 지금의 마교라도 충분히 해 볼 만했다.
“다행이에요. 정말 필요한 순간에 강력한 지원군이 와서요. 이런 점은 확실히 저희가 유리한 것 같아요.”
“마교에도 지원군이 안 온다면 말이지.”
“으음.”
개왕만큼이나 기대한 얼굴이던 사마의성이 침음을 흘렸다.
정천맹과 마찬가지로 마교 역시 지원군이 올 수 있어서였다.
만약 보타문주와 해남파 장문인과 비슷한 무인이 마교에 합류한다면 격차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심각한 사마의성과 달리 무덤덤한 얼굴로 앉아 있던 반호진의 시선이 출입구 쪽으로 향했다.
낯선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잠시 후 일남일녀가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
끼이익.
중원과 신강의 양식이 교묘하게 뒤섞인 대전의 문이 열리며 열세 명이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구마와 사단의 단주들이었다.
“지존을 뵈옵니다!”
쿠웅!
신강에서부터 가져온 재료로 만든 거대한 태사의에 권태로운 표정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는 사내를 본 사단의 단주들이 오체투지했다.
반면에 십대마가의 가주들인 구마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단주들처럼 오체투지까지는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존께 인사 올립니다.”
공손하기는 하되 깍듯하지는 않은 구마의 인사였으나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사단의 단주들과 달리 구마는 그와 같은 십대마가의 수장들이었다.
그렇기에 이 정도면 충분했다.
너무 굴복적인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라도 반항적인 게 더 재미있기도 했고.
스윽.
너무 고분고분하면 재미가 없었기에 마교주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구마를 일별했다.
그러고는 오체투지하고 있는 사단의 단주들을 차례대로 훑었다.
“실망인데. 철마단주와 흑풍단주야 최상의 몸 상태가 아니었으니 감안의 여지가 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지 않나?”
“죄, 죄송합니다!”
“송구하옵니다, 지존!”
권태로운 분위기만큼이나 무미건조한 목소리였으나 적멸단주와 광혈단주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무심하기에 더욱 섬뜩하다고나 할까.
웃으면서 목을 따는 게 마교주였기에 둘은 오체투지를 한 상태에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교주의 성격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의 머리를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잘못은 아는 모양이네.”
초마경에 오른 고수들이 잔뜩 겁먹은 채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광경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이가 다른 이도 아닌 마교주였기에 다들 수긍하고 납득했다.
“죽여 주시옵소서, 지존!”
“진짜 죽일까?”
“……!”
부르르르!
입을 열었던 광혈단주가 몸을 떨었다.
전장에서는 무서운 것 없이 날뛰던 그가 지금은 범 앞의 토끼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심지어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뭐, 됐어. 단주들만 당한 게 아니니까.”
마교주의 시선이 다시 구마에게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부상을 입은 이들에게로.
심각한 부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가벼운 상처도 아니었다.
“게다가 다치기만 한 것도 아니고.”
“……면목이 없습니다.”
“당연히 없어야지. 구마 전체가 나섰는데 중원십대고수 중 한 명도 못 잡았으니까, 충분히 면목이 없어야지. 사람이라면.”
“…….”
신랄한 한마디에 구마 전체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변명밖에 되지 않음을 모두가 잘 알아서였다.
특히 부상을 당한 이들은 고개까지 숙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실력들이 더 좋았습니다.”
“좋았다?”
“예. 저희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허약하지도, 나약하지도 않았습니다.”
“흐음. 역전의 용사들이란 건가?”
검마를 보며 마교주가 씨익 웃었다.
무심한 척했지만 여기 있는 누구보다 중원무림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게 마교주였다.
그렇기에 이죽거리는 대신 묘한 표정으로 태사의의 팔걸이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지금의 정천맹은 저희가 알던 백도무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긴. 그 어떤 시기보다 많은 적들을 상대하기는 했지. 보통은 한두 곳과 싸웠는데 이번에는 유달리 연속적으로 전쟁을 치렀지.”
“그중 한 번은 저희가 함정을 파 놓기도 했지 않습니까.”
“못난 놈들이라서 그런지 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지만 말이지.”
마교주가 혀를 찼다.
그가 원했던 결과에 턱없이 모자란 성과를 냈기에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해는 갑니다.”
“이해가 간다?”
“예.”
“검신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검마의 모습에 마교주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마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몰라서였다.
하지만 그런 마교주의 시선에도 검마는 당당했다.
“검신으로 인해 모든 게 어그러졌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검신은 그럴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검신을 잡을 수 있다고 나에게 직접 말했던 것 같은데. 근데 지금의 말투만 보면 포기한 것 같군.”
“그렇지 않습니다.”
검마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마교주가 입맛을 다셨다.
일부러 자극하려고 한 말이었음에도 예상과 달리 검마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렇다면 여전히 같은 생각인 모양이군.”
“예.”
대답을 하며 검마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마교주와 대화를 하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신이 굳이 반호진을 쓰러뜨려야 할 이유가 있나 하는.
‘반호진은 분명 강해. 당대 중원제일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법왕이나 검왕 정도만이 검신에 비벼 볼 만하겠지. 그러나 내가 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검마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반호진을 직접 상대해 봤기에 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분명 반호진은 강하지만 제대로 싸우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그래서 검마는 이런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니 교주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반호진은 검마조차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의 강자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와 대등한 무인이 반호진이었다.
그런 만큼 검마는 반호진을 이용한다면 마교주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호진 혼자서는 무리겠지만 법왕과 검왕이 협공을 한다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중원은 예로부터 늘 마교주를 상대로 협공을 하기도 했고.
그러니 세 명이 협공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교주가 죽는다면 그 자리는 내 것이 된다.’
마지막 경쟁에서 안타깝게 밀려 교주가 되지 못한 게 바로 검마였다.
그러므로 교주가 죽는다면 공석이 된 그 자리는 자연스럽게 검마의 차지가 될 터였다.
물론 다른 가주들 역시 교주의 자리를 노리겠으나 검마는 자신이 있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교주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무인은 그였다.
‘거기에 더해 세 명도 쉽게 잡을 수 있고. 이이제이(以夷制夷)에 일거양득(一擧兩得)이지.’
검마의 눈동자에 힘이 서리기 시작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전쟁에서 이기는 건 물론이고 중원을 손에 넣는 것도 가능했다.
세 명이 사라진 정천맹 따위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그런 상황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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