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8장. 드러나는 음모. -02
공동파와는 이래저래 좋지 않게 엮었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공동파를 싫어하지 않았다.
중원무림을 위해서도 공동파는 존재해야 했고.
“놀랍네요. 비슷한 연배라고 하지만 속가제자가 장로보다 강하다니.”
“드물긴 하나 없는 일은 아니지. 당장 나만 해도 그러니까.”
“그러네요, 정말.”
“어쩌면 벽을 넘을 수도 있겠는데?”
“정말요?”
사마의성의 두 눈이 커졌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반호진이 이렇게 말한다는 건 정말 가능성이 있다는 걸 뜻해서였다.
더구나 상황이 썩 좋지 않은 만큼 새로운 절대고수의 등장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어쩌면. 평생 동안 제자리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전쟁 중에 죽을 수도 있지.”
“어쨌든 벽에 근접해 있는 고수라는 뜻이잖아요?”
“맞아.”
반호진의 눈동자에도 이채가 떠올랐다.
전생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인물이기에 반호진은 기분이 묘했다.
바뀐 미래를 새삼 느끼게 해 주었기에.
“부디 벽을 넘었으면 좋겠어요. 수적으로 우리가 너무 불리하니까요. 마교는 당장 드러난 이만 열여섯 명인데 우리 쪽은…….”
사마의성이 말끝을 흐렸다.
마교의 침공 소식에 개왕이 합류했다고 하나 그래도 반호진을 포함해 열한 명이었다.
무려 다섯 명의 절대고수가 부족하기에 사마의성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한두 명 차이야 인해전술을 펼치면 어찌어찌 붙잡아 둘 수 있겠지만 다섯 명은 달랐다.
“다섯 명까지는 아니야.”
“예?”
“중원의 저력을 잊은 거 아냐?”
“혹시?”
“지금 중요한 건 절대고수의 숫자가 아니야.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마교주이지.”
반호진의 시선이 마교의 진영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보통은 중앙에 수장이 자리 잡기에 가운데를 매서운 눈으로 살펴봤는데 마교주로 짐작되는 인물은 없었다.
“혹시 오지 않은 건 아닐까요?”
“그럴 리가.”
사마의성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지만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역사적으로 마교가 침공해 올 때 마교주가 오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분명 공동산 어딘가에 마교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구마가 모두 쓰러지면 모습을 드러내겠죠?”
“아마도.”
어제 말을 섞었던 창마와 유마를 주시하며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십대마가가 마교의 근간이자 기둥이라지만 핵심은 누가 뭐래도 구마였다.
그렇기에 담현을 비롯해서 천하십대고수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구마가 나설 때를 대비해서.
“야율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직 회복이 덜 된 모양이에요.”
반호진과 대화하면서도 사마의성은 전황을 끊임없이 살폈다.
병력의 전체적인 지휘는 제갈문곡이 하고 있지만 사마의성도 일부분은 맡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마의성은 대화를 하면서도 자신의 소임을 잊지 않았다.
“덜 됐을 수도 있고 다른 꿍꿍이속이 있을 수도 있고.”
“하긴. 초마경이면 회복도 빠를 테니까요. 그래서 이번에 제갈가주님께서 의원들을 대거 데려왔는데.”
“의원들도 많지만 부상자들도 많으니까. 내상이라는 게 원래 회복이 더디기도 하고.”
“공동파가 가지고 있던 약재들은 마교가 다 썼겠죠?”
“그렇겠지. 식량도 마찬가지고.”
사마의성이 입맛을 다셨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쉬워서였다.
물론 마교 역시 식량의 중요성을 알기에 공동파에 터를 잡은 것이겠지만.
그래서 사마의성은 확신할 수 있었다.
마교가 장기전 역시 염두에 두고 있음을 말이다.
때문에 반호진과는 다른 의미로 마음이 무거웠다.
“그나저나 광혈단(狂血團)은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까요? 분명 사단 전체가 움직였다고 들었는데. 가장 흉포한 기질을 가진 전투 부대라 제일 먼저 날뛸 줄 알았는데.”
“나도 그게 의문이긴 해. 철마단, 흑풍단, 적멸단(敵滅團) 모두 모습을 드러냈는데 광혈단만 보이지 않으니.”
“미치광이들이라 통제가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마교 내에서도 문제가 많은 이들이라고 해요. 죄를 지은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말도 있고.”
“이름부터가 정상은 아니지.”
반호진이 정천맹의 후미 쪽을 살펴봤다.
혹시 광혈단을 은밀히 이동시켜 후미를 공략하려 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패도를 숭상하는 집단이 마교이지만 그렇다고 전술과 전략을 아예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귀영마가나 구유마가가 십대마가가 되지는 못했을 터였다.
“어?!”
정천맹만큼은 아니겠지만 공동산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기에 마교 역시 지형지물에 대해서는 빠삭할 것이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냉정한 눈으로 정천맹 진영 후미 쪽을 샅샅이 살펴보는데 사마의성의 입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광혈단인가.”
“제가 보기에도 광혈단 같아 보여요. 일단 규모가 다른 사단과 비슷하고 기세가 확연히 달라요. 절제되지 않은 광기라고나 할까요.”
쿠아아앙!
깜짝 놀란 사마의성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던 반호진의 두 눈이 순간 커졌다.
느닷없이 나타난 광혈단의 수준이 다른 사단과는 확연히 달라서였다.
단순한 돌진에 정천맹의 진영 한쪽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광경에 반호진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거기다 광혈단이 풍기는 기운이 묘하게 익숙하다는 것도 반호진의 신경을 건드렸다.
“크큭! 모두 죽여라!”
“다 내 거다! 손대지 마!”
“끼요옷!”
한순간에 무너진 진영에 제갈문곡이 기겁하며 다른 곳에 있던 무인들을 이동시켰다.
겨우 유지하고 있던 균형이 무너지면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기에 그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구대문파 중 한 곳인 점창파가 나섰음에도 중과부적이었다.
숫자가 훨씬 많았음에도 점창파는 오백 명에 불과한 광혈단에 속절없이 밀렸다.
“크흐! 이 맛이지!”
“신선하구나!”
“중원인의 피도 별다를 거 없는데?”
흉포한 기세도 기세지만 점창파를 비롯해 정천맹의 무인들은 죽은 이들의 피를 마시는 광혈단의 모습에 기함을 내질렀다.
감히 상상도 못 한 광경에 대경실색한 것이었다.
하지만 광혈단은 그런 반응조차도 이용했다.
“크아악!”
“우욱!”
겁에 질려 굳어 버린 점창파의 무인들을 사정없이 도륙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흡혈을 했다.
또는 심장이나 간을 뜯어내서 씹어 먹기까지 했다.
“이놈들!”
죽이는 걸 넘어 시체를 모독하는 행위에 일우가 노성을 터트리며 광혈단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근처에 있었기에 누구보다 빨리 이동한 것이었다.
그의 뒤로 화산파와 종남파의 제자들이 뒤따랐다.
제갈문곡의 전음도 있었지만 광혈단을 이대로 놔두면 안 된다고 생각해 지원을 온 것이었다.
“이, 일우 도장……!”
망설이지 않고 달려 온 일우와 성중경의 모습에 점창파 장문인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서렸다.
성중경이야 천하십대고수에 속하지 않았지만 일우는 달랐다.
투왕이라 불리는 무인이 일우였기에 점창파 장문인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푹!
한데 그때 시뻘겋게 물든 손이 점창파 장문인의 가슴을 뚫고 나왔다.
어느새 다가온 광혈단주가 단숨에 그의 가슴을 꿰뚫은 것이었다.
두근. 두근.
그런데 광혈단주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점창파 장문인의 가슴을 열어 심장을 꺼냈다.
살아 있는 상태로 심장을 뜯어냈던 것이다.
“으억!”
그로 인해 산 채로 심장을 뜯기게 된 점창파 장문인이 두 눈을 부릅떴다.
광혈단주의 손에 의해 자신의 심장이 뜯기자 경악한 것이었다.
차라리 흉부가 관통당했을 때 즉사했다면 이 꼴을 보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껏 쌓아 온 심후한 내공이 생명의 끈을 억지로 붙잡고 있어 죽지도 못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일 테지. 크흐흐흐!”
“자, 장문인!”
산 채로 심장이 뜯기고, 그걸 적에게 씹어 먹히는 걸 보게 된 점창파 장문인의 모습에 성중경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가 어떤 심정일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기에 성중경은 이를 악물고서 검을 쥐었다.
한데 성중경보다 먼저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쌔애애액!
왼팔이 있어야 할 곳이 심하게 펄럭이는 일우가 자하강기(紫霞罡氣)를 일으키고서 광혈단주에게 쇄도했다.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색의 기류가 이내 유형검강(有形劍罡)이 되어 광혈단주에게 쏟아졌다.
“흥!”
허공을 온통 자색으로 물들일 정도로 일우의 자하강기는 거대하고 넓었다.
괜히 천하십대고수가 아니라는 듯이 광혈단주 주변을 삽시간에 장악했다.
그러나 사방이 순식간에 자하강기에 잠식당했음에도 광혈단주는 코웃음을 쳤다.
요란스럽기만 할 뿐 딱히 위협이 되지 않아서였다.
쩌저저적!
그 사실을 증명하듯 광혈단주의 손짓에 허공을 물들이던 자하강기가 찢어졌다.
더해서 검강들 역시 안개처럼 흩어졌다.
광혈단주의 수강에 소멸한 것이었다.
스으윽!
하지만 그 광경을 모두 다 봤음에도 일우는 놀라거나 움찔거리지 않았다.
그저 삼엄한 눈으로 더욱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쩌어엉!
이윽고 일우의 검과 광혈단주의 손등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일우의 일검을 손등으로 받아 낸 것이었다.
“사사혈천교와 무슨 관계지?”
“호오. 꼴에 천하십대고수라고 눈썰미가 있구나.”
일우의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과거에 비하면 성격이 많이 차분해지기는 했으나 특유의 불같은 성정이 어디 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이를 먹으면서, 또 이런저런 사람들을 겪으면서 조금 유해졌을 뿐이었다.
근데 광혈단주가 속을 긁자 일우의 두 눈에서 살기가 폭사되었다.
웅웅웅웅!
동시에 그의 전신을 뒤덮은 자색의 기류가 사납게 일렁거렸다.
자하신공이 주인의 감정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꼴에?”
“중원의 천하십대고수 따위, 본교의 이십 위권에도 들지 못하지.”
“네놈은 열네 번째 정도 되겠군.”
“뭐라고?”
일우의 한마디에 광혈단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역시 폭급한 성격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위인이었다.
그래서인지 광혈단주는 별거 아닌 이죽거림에 격하게 흥분했다.
“열다섯 번째이려나? 진혈마가의 소가주가 제법이던데.”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그래. 개새끼는 그렇게 나와야지. 어디서 사람인 척을 해? 승냥이 따위가.”
“크아아아!”
품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도발에 광혈단주의 눈이 돌아갔다.
뒷골목 왈패나 할 법한 저급스러운 도발이었으나 그렇기에 더욱 효과적이었다.
거기다 광혈단주는 애초에 참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살기를 폭발시키며 일우에게 달려들었다.
꽈아앙! 꽈광! 꽝!
자존심으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위인들이 바로 일우와 광혈단주였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조금도 물러나거나 피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오직 정면 대결만 펼쳤다.
둘 다 상대를 힘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듯이 무식하게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러자 주변이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나머진 내 몫이겠군.”
광혈단주와 살벌한 격전을 치르는 일우를 일별하며 성중경이 잔잔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차분한 신색과 달리 그의 검은 결코 잔잔하지 않았다.
일검에 솟아오르는 검세는 순식간에 미치광이처럼 달려드는 광혈단원들을 밀어버렸다.
종남파가 자랑하는 절학인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에 수십 명의 광혈단원들이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감히!”
“저놈을 죽여라!”
“네놈들에게 감히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내 신분은 낮지 않느니라.”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동료들의 모습에 광혈단원들이 흉흉한 살기를 흩뿌리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광혈단의 부단주도 있었다.
그러나 초마경을 눈앞에 둔 부단주는 성중경의 일검에 온몸이 난자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쿵!
“무, 무슨……!”
“부단주님!”
흉흉하게 달려든 것과는 너무나 상반되게 무력한 몰골로 바닥을 구르는 부단주의 모습에 광혈단원들이 입을 쩍 벌렸다.
그들이 알고 있는 성중경과는 전혀 다른 무위를 보여 주자 대경한 것이었다.
하지만 성중경은 광혈단원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재차 천하삼십육검을 펼쳤다.
츠츠츠츠!
환검(幻劍)의 극의를 품은 천하삼십육검이 이내 도도하게 광혈단을 덮쳤다.
서른여섯 개의 검은 허상이되 허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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