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6장. 진짜 괴물. -04
멱살을 잡음과 동시에 반호진의 오른손이 섬전으로 화했다.
왼손으로 야율천을 고정시키고서 시원스럽게 뺨따귀를 날린 것이었다.
“끄억!”
묘하게 찰진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야율천의 신음이 허공을 갈랐다.
더불어 그의 몸뚱이도 춤을 추듯 흔들렸다.
하지만 날아가지는 못했다.
여전히 반호진의 왼손이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어서였다.
짜아아악!
한데 찰진 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따귀를 날린 상태에서 그대로 오른팔을 반대로 휘둘러 손등으로 야율천의 오른쪽 뺨을 때렸다.
“컥!”
왼쪽 뺨의 얼얼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오른쪽 뺨을 강타당하자 야율천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골을 뒤흔드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아무것도 못 한 채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게 그를 심적으로 무너뜨렸다.
“뭐야? 벌써 포기한 거야? 이거 실망인데?”
저항할 의지를 잃은 듯 축 늘어진 야율천의 모습에 반호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진혈마가의 소가주이자 현 마교주의 아들이 고작 이 정도에 승부를 포기하는 게 반호진은 믿기지 않았다.
“이 정도로 근성이 없을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좌절감이 엄습해 온다고 해도 야율천은 마교를 대표하는 마인이었다.
그것도 그저 그런 마인이 아니라 마교를 지탱하는 열 개의 기둥 중 하나인 진혈마가의 소가주이자 차기 교주에 가장 가까운 젊은 무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인물이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축 늘어진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실망하긴 했어도 이해가 아예 안 되지는 않아서였다.
“뭐, 상관없지.”
야율천으로서는 처음으로 마주한 넘을 수 없는 벽일 터였다.
지금까지 좌절과 절망을 겪어 본 적이 없었을 테니 충격 역시 컸을 테고.
자기보다 강한 이들이 존재하긴 해도 그들은 한 세대 위였다.
또래에게 이렇게 밀린 적이 없었기에 야율천으로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벽을 마주한 느낌일 것이었다.
“너는 어때?”
축 늘어져서 미동도 없는 야율천을 일별한 반호진의 시선이 섭율에게로 향했다.
야율천과 함께 그에게 도전하려 했던 무인이 섭율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지금이 기회라는 표정을 지으며 섭율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나 반호진의 그윽한 눈빛에도 섭율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닌 듯하군. 정당한 상황도 아니고.”
“내가? 아니면 네가?”
“둘 다.”
“솔직하지 못한데.”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실상이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건 섭율 본인도 알았다.
자기가 핑계를 대고 있다는 사실을.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내가 이 녀석을 죽여 주길 원하겠지?”
“인질로 협박할 생각인가?”
섭율이 짐짓 비겁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실제 마음은 달랐다.
반호진의 말대로 그는 야율천이 죽기를 바랐다.
그래야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합당한 이유로 사라지니까.
“협박이라니. 내가 지금 원하는 게 있나? 협박은 보통 요구할 게 있어야 하는 행동인데.”
“…….”
신랄한 한마디에 섭율은 입을 닫았다.
변명할 게 궁색해서였다.
대신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반호진을 주시했다.
“그렇다고 오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난 권유하고 있잖아. 조금 전에 원한 대결, 지금 해 주겠다고 말이지. 근데 안 오는 건 너 아닌가?”
“신성마가의 소가주로서 비겁하게 싸우고 싶지 않을 뿐이다. 네 체력과 내공이 좀 더 회복되면 모를까.”
“마교 출신 마인답지 않게 입심이 있는데.”
끝까지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섭율의 모습에 반호진이 대놓고 이죽거렸다.
그러나 섭율은 반호진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지금 달려들어 봤자 야율천과 똑같은 꼴을 당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았기에 섭율은 냉철한 표정으로 제자리를 지켰다.
“정정당당함이야말로 백도의 기치이지 않나?”
“틀린 말은 아니지. 근데 그 말을 마교의 마인에게, 그것도 십대마가 중 한 곳인 신성마가의 소가주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군.”
이번만큼은 반호진도 진심으로 놀랐다.
설마하니 마교도에게서 정정당당이라는 네 글자를 들을 줄은 몰라서였다.
그래서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돌렸다.
스윽.
당장 달려들 기미가 안 보였기에 반호진은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정확하게는 친구와 동생들의 상황을.
그런데 다들 하나같이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중원에서는 나름 인정받는 후기지수였으나 십마룡을 상대로는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웅웅웅!
대등은커녕 막기 급급한 모습에 반호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다가 이내 주위에 강환을 생성시켰다.
상대의 파상공세에 밀려 위급한 상황이 닥치자 결국 나선 것이었다.
이곳에서 선우방과 동생들을 잃을 수 없기에 반호진은 십마룡을 향해 강환을 날렸다.
퍼퍼퍼펑!
부지불식간에 쏘아진 강환이었으나 괜히 십마룡이 아니라는 듯이 다들 어렵지 않게 반호진의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걸 보고도 반호진은 실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노린 건 십마룡의 목숨이 아니었다.
치명상을 입는다면야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원하는 건 다 얻었기에 반호진은 거리를 벌리고서 숨을 고르는 일행들을 빠르게 살펴봤다.
“못난 꼴을 보였어.”
“죄송합니다, 형님.”
“면목이 없습니다.”
반호진의 도움으로 겨우 숨을 돌린 선우방, 모용척, 정이륭이 창백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크게 다친 곳은 없지만 세 사람 다 만신창이였다.
치명적인 요혈만 가까스로 피한 듯한 셋의 모습을 보며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충분히 잘 싸웠어. 승패야 병가지상사이니까. 그리고 세상이 넓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잖아?”
의기소침해하는 세 사람을 반호진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달랬다.
죽었다면 거기에서 끝이었겠지만 셋에게는 그가 있었다.
패배했을 뿐 끝난 게 아니었기에 다시 시작하면 되었다.
또 어떻게 보면 이번 일이 좋은 약이 될 것이었기에 반호진은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는 달래 주었다.
쒜애애액!
한데 그때 맹렬한 파공성이 들려왔다.
귀청을 찢어발기는 듯한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자 반호진은 고개를 돌렸다.
날아오는 무언가를 향해 시선을 옮긴 것이었다.
그러나 정확히 그에게로 쇄도하고 있었음에도 피하지 않았다.
쿠우웅!
대신 날아오는 무언가를 향해 움켜쥐고 있던 야율천을 내밀었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날아오는 것의 목적이 자신과 야율천을 떨어뜨려 놓는 것임을 단박에 알아차렸기에 반호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자 날아오던 게 귀신같이 방향을 틀어 반호진의 코앞에 떨어졌다.
후우우웅!
무시무시한 기세만큼 땅에 떨어지자 지축이 뒤흔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는데 그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 멀찍이 떨어져 있던 서조운과 사마의성, 유호량도 비틀거릴 정도였다.
거기에 돌풍 역시 주변을 휩쓸었다.
휘이이잉.
잠시 후 흔들리던 땅이 잔잔해지고 바람이 가라앉자 날아온 것의 정체가 밝혀졌다.
검은빛이 도는 평범한 장창이었는데 그걸 본 반호진의 두 눈에 이채가 서렸다.
“검신의 배짱이 상당하다는 말은 들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천이를 내밀 줄은 몰랐어.”
“창마(槍魔)인가?”
“버릇이 없다는 말도 사실이었군.”
“우리가 예의를 차릴 사이는 아니잖아?”
너무도 당당한 반호진의 대꾸에 흑랑마가의 가주인 창마가 실소를 흘렸다.
소문이 오히려 과소평가된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서 그는 내심 놀랐다.
대단하다, 대단하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과장된 게 없지 않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달랐다.
‘천이보다 더한 천재가 있을 줄이야.’
태연한 얼굴과 달리 창마는 경악했다.
야율천을 보았을 때 그는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정도로 야율천의 재능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었다.
그나마 비벼 볼 수 있는 게 섭율이었는데 그것도 겨우 비비는 정도였지 엇비슷한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하필이면 그것도 중원무림에서.’
창마의 시선이 무기력하게 축 늘어져 있는 야율천에게로 향했다.
마혈이나 아혈을 점혈당한 것도 아니건만 야율천은 모든 걸 포기했다는 듯이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게 창마는 거슬렸다.
패배는 병가지상사이기에 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장 교주만 하더라도 젊었을 적에는 패배한 적이 있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패배한 이후였다.
패배를 승복하고 어떻게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노력해야 하는데 야율천은 그게 아니라 모든 걸 놓아 버렸다.
‘아무리 넘어설 엄두가 나지 않는 벽이라지만…….’
똑같은 무인으로서 야율천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창마 역시 어려서부터 천재, 신동, 기재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란 무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야율천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야율천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릇이 저 정도라는 거지.’
창마의 입가에 씁쓸한 기색이 서렸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말이 있지만 그게 늘 맞는 것만은 아니었다.
호부에게서도 견자는 얼마든지 나왔고, 그 반대의 경우도 희박하지만 아예 없지만은 않았다.
‘하나 지금 중요한 건 검신의 손에서 천이를 데려오는 것이다.’
흑랑마가와 진혈마가는 대대로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어렸을 적에는 교주와 호형호제하기도 했고.
그래서 창마에게 있어 야율천은 조카나 다름없었다.
또한 야율천과 달리 그의 자식은 그리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여유가 있기도 했다.
스윽.
창마의 시선이 야율천을 지나 효욱에게로 향했다.
목표는 야율천이었으나 그렇다고 너무 그에게만 시선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티를 내는 순간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창마는 일부러 효욱을 유심히 살펴봤다.
스르륵.
“거래를 하지.”
갑자기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반호진의 시선이 움직였다.
살수처럼 검은색 야행복을 입고 있었는데 복면까지 하고 있어 보이는 것이라고는 두 눈뿐이었다.
눈썹마저 두건으로 꽁꽁 가린 흑의복면인을 응시하던 반호진의 시선이 그의 양손으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양 손가락과 연결되어 있는 은사(銀絲)를.
“과, 광아!”
“성윤아!”
반호진이 정체불명의 흑의복면인과 은사를 살펴볼 때 익숙한 목소리들이 허공을 갈랐다.
바로 남궁호와 황보태경의 음성이었다.
다급함과 초조함으로 가득한 두 사람의 고함에 반호진은 뒤늦게 은사에 목이 감긴 두 명의 얼굴을 살폈다.
“이 두 명이라면 거래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보는데.”
고저 없는 목소리로 흑의복면인이 반호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은사와 연결된 손가락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둘의 목숨을 끊어 놓을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흑의야행복에 복면이라. 귀영마가(鬼影魔家) 아니면 구유마가(九幽魔家) 출신이겠군. 사용하는 무기와 분위기를 보면 전형적인 살수는 아닌 듯하고. 구유마가의 유마(幽魔)인가?”
“추리력이 대단하군. 몸만 잘 쓰는 줄 알았는데.”
“몸도 잘 쓰고, 머리도 웬만큼 쓰지. 엄청 잘 쓰지는 않지만.”
“그런데 너무 여유를 부리는 거 아닌가? 아, 친분이 별로 깊지 않아서 그런가.”
“윽!”
“크흡!”
흑의복면인, 유마가 손목을 살짝 꺾었다.
그러자 은사에 목이 묶여 있던 남궁광과 황보성윤이 반사적으로 신음을 흘렸다.
더욱 강하게 옥죄는 은사에 고통도 고통이지만 화들짝 놀란 것이었다.
강철도 베어 버리는 날카로움을 지닌 게 은사였기에 까딱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내 손에 누가 있는지 잊은 것 같은데.”
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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